제202화. 최종전
경기 시작을 알리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오하늘의 상대는 뒤로 걸음을 물리며 신속하게 염력을 끌어올리며 무기를 움켜쥐었다.
반면, 오하늘은 피로 물든듯한 불길한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여유롭게 상대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에는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와도 같은 살기가 깃들어 있었고, 어딘지 모르게 공허하고 무감정한 그의 표정은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기권하는 게 좋을 텐데?”
그렇게 수 초간 상대를 노려보던 오하늘이 입을 열자, 그의 상대인 ‘철연우’의 눈썹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날 너무 무시하는군! 어디 집행부의 사형집행인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볼까!”
철연우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오하늘은 무심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다가 상대가 코 앞까지 다가오자 그제서야 무성의하게 손을 한번 휘두를 뿐 이었다.
챙!
하지만 오하늘의 가벼운 일격에 철연우의 검이 튕겨져 날아가고, 그의 손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무시무시한 광경에 관객석에는 또 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 앉았다.
철연우는 5성 무투사로,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건만, 오하늘은 마치 모기나 파리를 쫓듯 가볍게 손을 한번 휘둘러 그를 뿌리쳐 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갑자기 철연우의 등 뒤에서 새빨간 망토가 펄럭였고, 철연우의 목에는 어느새 서슬 퍼런 칼날이 닿아 있었다.
……
“정말 빠르군…”
이 광경을 바라보던 준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그간 많은 강자들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섬칫한 느낌을 가진 상대는 드물었다.
더욱 무시무시한 것은, 그가 자신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투사라는 점 이었다. 얼마나 살인을 많이 하면 사람이 저렇게 될까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처음 입학 할 때부터 눈에 띄게 빠른 편이었어. 게다가 3격 상 수준의 ‘붉은 번개’라는 무투기까지 익혔거든.”
예진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자, 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속도도 속도지만…힘도 나랑 동급이거나 그 이상인 것 같은데? 역시 가람 아카데미의 명성이 허명은 아니구나.’
그 사이,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경기가 종료됐고, 오하늘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말 없이 망토를 펄럭이며 관중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그렇게 침묵 속에서 광장을 벗어나던 오하늘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어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이준이 서 있는 곳 이었다.
준 역시 상대의 시선을 느끼고는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상대를 마주봤다.
평소 냉정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오하늘이 이준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관객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오하늘은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준을 노려보다가 한쪽 입꼬리를 가볍게 씰룩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빨간 망토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준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정말 대단한 살기군…분위기만 놓고보면 투왕급 강자에 비해서도 밀리지 않겠어.’
그리고…드디어 이은의 차례가 왔다.
모두가 예상한대로 그녀는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가볍게 상대의 가슴에 일격을 날렸고, 경기는 거기서 끝이 났다.
다음은 백성찬과 빨간 옷을 입은 소녀의 차례였다. 둘의 상대는 각각 6성, 7성 무투사로, 백성찬은 7~8수 만에, 빨간 옷의 소녀는 단 3수 만에 승리를 거두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외원 기대주들의 경기가 모두 끝나자, 그 뒤로는 그저 그런 지루한 경기들의 연속이었다.
이준과 이은은 경기가 지루해지자 광장을 벗어나 아카데미의 잔디밭을 거닐며 둘만의 시간을 즐겼다.
……
이준과 이은은 하늘에 어둠이 내릴 무렵이 되어서야 예진이 기거하는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두 사람이 숙소로 돌아가고 있을 때, 보라색 옷을 입은 귀여운 여자 아이 하나가 둘을 향해 달려왔다.
“오라버니!”
“안?”
보라색 옷을 입은 소녀를 발견한 순간, 준은 다소 난처한 듯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이안은 준을 몹시도 반가워했지만, 준은 그녀가 불편했다.
결국 이안의 기대와 달리 준은 무성의한 대답만을 몇 번 반복하다가 핑계거리를 찾아 이은과 함께 숙소로 돌아갔고, 이안은 멀어지는 이준이 등을 한없이 바라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 * *
방안에 도착하자, 준은 곧바로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수련을 시작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수련을 거듭한지 3시간…마침내 준이 눈을 뜨자, 그의 동공에 파란 불꽃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음…좋아…이대로라면 조만간 6성 대투사가 될 수 있을지도…”
준은 살짝 인상을 쓴 채 손을 흔들어 낡은 옥 조각 하나를 꺼내들었다. 은은한 녹색 빛을 띤 옥 조각은 이씨 가문의 장로에게서 받았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아직 녹색 빛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버지가 무사하다는 것이었으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아버지, 꼭 찾으러 갈게요.’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흥분이 되었는지, 준의 손에서 푸른 불꽃이 일었다.
“헉!”
준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손바닥 안에 있던 옥조각이 무사한지를 확인했다.
“말도 안돼…”
그러나 그의 걱정과는 달리, 낡아 빠진 옥조각은 대지의 불꽃이 뿜어낸 무시무시한 고온에도 전혀 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대지의 불꽃과 접촉하자, 그 옥조각 위로 기묘한 문양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던 문양이었다.
“응…?”
준은 손으로 옥조각을 천천히 문지르며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옥조각의 한쪽 구석에서 조그마하게 깨진 것 같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준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옥 조각을 다시 저장반지 안으로 집어넣었다. 자기가 고민해봤자 알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흠…언젠가 이씨 가문으로 돌아가면 장로님들에게 여쭤봐야겠어. 이 돌, 내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사연이 깊은 물건 같아…’
그 때, 갑자기 그의 반지가 흔들리며 약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흠…이곳에서는 천지의 불꽃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구나.”
“네? 그럴리가요…전에 스승님께서 이곳에 구름의 불꽃이 있다고…”
“그래…그 때는 분명히 느껴졌지. 하지만 지금은 어찌된 일인지 전혀 천지의 불꽃의 기운을 느낄 수가 없구나.”
“설마 다른 사람에 들어갔다는 말씀이신가요?!”
스승의 말에 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아버지를 구하고 스승을 부활시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천지의 불꽃이었다. 그런데, 천지의 불꽃이 없다니!
“아니…그건 아닌 것 같다. 아카데미에서는 구름 불꽃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지만…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아직 천지의 불꽃이 기운이 남아 있어. 헌데…흠…방향을 알기가 힘들구나.”
“그럼 언제 찾으러 가야 하나요?”
준은 초조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었다.
“가람 아카데미의 노인네들은 구름 불꽃의 존재를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고…왠지 본원 쪽과 관련 있는 것 같구나……”
“본원이요?”
“그래. 본원이야말로 가람 아카데미의 핵심이지. 네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아마 천지의 불꽃과 관련된 정보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아, 노력해볼게요.”
천지의 불꽃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말에 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앞으로도 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예정이다. 네 그 조그만 여자친구 옆에 강자들이 잠복하고 있어서 말이지.”
약로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 * *
마침내 선발전의 마지막 날…외원의 분위기는 지난 이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조되어 있었다.
누가 본원에 가게 될지, 최강자는 누구일지, 모든 학생들이 그런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뜨거운 관심을 반영하듯, 오늘 광장에 모인 사람은 지난 이틀의 두 배가 넘었고, 그 중에는 가람 아카데미의 학생이 아닌 외부인들도 제법 섞여 있었다.
* * *
준을 비롯한 참가자들이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을 정도로 입구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결국 준과 이은은 예진의 도움을 받아 경비들이 지키고 있는 비밀 통로로 광장안에 들어가야 했다.
기다란 통로를 한참 지나자, 출구가 나타났고, 출구 밖으로 빠져 나오자마자 시끌시끌한 소음이 귓등을 때렸다.
그리고 사람들을 피해 자신의 자리에 착석한 이준과 이은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예의 비밀 통로에서 백성찬을 비롯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백성찬은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준을 노려보았고, 준 역시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백성찬이 들어오고 머지 않아 부원장의 손녀인 ‘이윤영’이 느긋한 표정으로 광장 안에 입장했다.
그녀는 광장안에 들어서자마자 ‘이은’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이준을 노려보고는 불쾌하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려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하아…이걸 대체 뭐라고 받아들여야 하는거야…’
그리고 문자 그대로 태양이 중천에 뜨자, 경쾌한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이내 광장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잠시 후…부원장인 대건이 천천히 걸어나와 주위를 한바퀴 둘러보고는 위엄있는 목소리로 선발전의 시작을 알렸다.
“어제 본원 선발경기에서 최후의 50명을 선출했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학생들은 모두 본원에 들어가 수련 받을 자격이 있지만, 본원에서는 더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끔 내부에서도 등급을 확실하게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분이 거두는 성적이, 여러분의 등급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대건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흥분으로 들떠 있는 학생들을 주욱 훑어본 뒤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전까지 우리 선발경기는 토너먼트 식으로 진행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부 회의를 거쳐, 마지막 경기의 규칙을 달리 하게 되었습니다…변경된 규칙은 바로…최후의 50인이 동시에 무대 위로 올라가 경합을 벌이는 것 입니다!”
“뭐…뭐라고!?”
대건의 발언에 광장에는 일대 소란이 일었다. 하지만 참가자들 중 몇 몇이 묵묵히 광장위로 발걸음을 옮기자, 서서히 소란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가자.”
준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뒤 이은에게 손을 내밀었다.
“힘내렴!”
예진은 두 사람을 향해 마지막 응원의 말을 남기며 손을 흔들었고, 두 사람은 이내 난간을 밟고 날아올라 광장 안으로 착지했다.
백성찬, 이윤영에 이어 이준과 이은이 광장안으로 들어서자, 터질 것 같은 함성이 울려퍼졌다.
“오늘은 일대일 경기를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모두가 한데 모여 대결을 벌이고, 이 경기장 안에서 오래 버틸수록 높은 등수를 차지하게 됩니다.”
대건은 참가자들을 향해 경기 규칙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경기장 안에서는 그 어떤 수단도 허용 됩니다. 이를 테면 연합을통해 누군가를 밀어낼 수도 있겠죠. 경기의 유일한 규칙은 단 하나, 어떻게든 마지막까지 버틴 사람이 우승을 차지하는 것 뿐입니다.”
‘흥미로운 방식이군.’
준은 은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백성찬을 발견했을 때, 그의 시선은 못 박힌 듯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도 우리에게 나쁠 건 없지. 일단 저 녀석부터 몰아내자고.”
준은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입을 뗐지만, 왠일인지 이은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그런데…백성찬이나 오하늘 같은 사람들과 동맹을 맺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을거예요.”
“무슨 소리야. 너랑 같은 편이 되고 싶어하는 아이들도 엄청나게…”
“하…오라버니…오라버니가 여기서 제 손을 잡는 순간, 남학생들에게 선전 포고를 한거나 다름없어요.”
아니나 다를까, 시선을 돌리자 수 많은 남학생들이 자신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조,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우리 스스로의 힘을 믿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