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결정적 순간
“자료를 보면 2년 전에는 4성 투사였군…허허…2년 사이에 이 정도 성장이라니…실로 대단하구나. 최소한 무투사급 이상인 것 같은데, 고생 좀 했겠는 걸?”
황두식의 발언에 주변에 서있던 집행관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몇 번이나 준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2년 사이에 4성 투사에서 무투사라니, 실로 믿을 수 없는 성장 속도였다.
준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검은 성 지역을 통과해 왔다는건…이제 휴학을 끝내고 가람 아카데미로 복귀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네.“
“좋아. 이걸 받거라. 이 휘장이 있어야만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
사내는 저장반지에서 파란 휘장 하나를 꺼낸 뒤 그것을 소년에게 건네며 옆에 있던 청년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내일이 본원에서 선발 경기가 열리는 날이지?”
“네, 맞습니다.”
“운이 좋은 녀석이군. 아카데미에 오자마자 이런 경기가 펼쳐지다니. 그런데 작년에는 예진 선생이 본원 선발 경기 참가자 명단에 네 이름을 올렸었는데…올해는 네 이름을 올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구나. 이번 선발 경기는 예진 선생의 승진 여부와 관련되어 있어서 말이다.”
“아아…”
준은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때는 정말 사정이 있어서…”
“하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괜찮다. 그런 설명은 예진 선생님을 만나면 하도록 해. 화가 난건 그쪽이니까 말이야.”
황두식은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오늘은 이미 해가 졌지만, 네 사정이 꽤 급한 것 같으니 먼저 보내주마. 아카데미 밖의 숲에는 상급 마수들이 많으니 뭔가 탈게 필요할 것 같은데, 괜찮겠나?”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준은 황두식의 호의에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마가 준 지도는 검은 뿔 구역만 표시되어 있었으니, 평화 마을에서 가람 아카데미로 가는 길은 알지 못 했기 때문이다.
황두식은 집행부의 학생 두 명을 불러 무언가를 분부하더니, 갑자기 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미 가람 아카데미 안에는 네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이 많다. 뭐…네 잘못은 아니지만, 어쨌든…많은 학생들이 네 버릇을 고쳐주겠다고 벼르고 있으니 주의하거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꼭 기억해 둘게요.”
준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렸다. 때 마침 준을 아카데미까지 데려다 줄 마수가 도착했고, 사자의 형상을 한 마수 위에는 두 명의 집행원이 앉아 있었다.
“이준 후배님, 어서 타시죠.”
“감사합니다.”
준이 마수의 등 뒤에 오르자 집행부가 휘파람을 불었고, 바닥에 엎드려있던 사자는 날개를 펼쳐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마수의 등 뒤에 오른 채 꼬박 하루를 이동하자, 가람아카데미의 관할 구역내로 들어설 수 있었다.
“여기가 가람성인가요?”
“하하. 맞습니다. 이준 후배님, 우리는 이 사자를 정류장에 놓고 와야 하니 먼저 아카데미로 들어가세요. 단, 평화 지대를 벗어나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들.”
“아, 괜찮아요. 우린 우리 할 일을 한 것 뿐이니까. 명성이 자자한 후배를 직접 볼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그럼 이만…!”
청년은 다시 휘파람을 불어 사자 마수에게 명령을 내렸고, 이내 준의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져갔다.
준은 천천히 넓은 길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30분 가량을 쉬지 않고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람아카데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뭐가 이렇게 넓어…”
그렇게 투덜거리며 한참을 더 걸어가자, 멀리 오래된 성 같은 것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너 이 자식, 거기 서!”
그 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린 곳 주위에는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사람들로 만들어진 원의 중심에는 19살 정도 되어보이는 파란 옷을 입은 소년 하나가 네 명의 사내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싸움이 벌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 중 한명의 주먹이 파란 옷의 소년에게 적중했고, 연달아 소년의 복부와 가슴 팍, 그리고 등에 주먹이과 발이 날아들었다.
결국 소년이 배를 부여잡고 쓰러지자, 네 사내가 일제히 달려들어 그 아이를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퍽, 퍽, 퍽…
그렇게 네 명의 사내가 소년 하나를 흠씬 두들겨 주고 있을 때, 갑자기 시커먼 송곳이 하나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들었다.
검은 송곳은 네 사람의 다리를 후려갈긴 뒤 날아왔던 방향으로 돌아갔고, 곧이어 검은 망토를 걸친 사내 하나가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정신을 못 차리고 얻어터지던 소년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자신을 도와준 검은 망토의 사내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못 본 사이에 너무 약해진거 아니야?”
“이…준?”
“그래도 아직 내 목소리를 기억하긴 하네.”
“너…너…!”
검은 망토의 사내가 얼굴을 가린 커다란 모자를 젖히는 순간, 이혁의 얼굴에 반가움과 씁쓸함, 민망함과 놀라움이 한데 섞인 기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 그의 앞에 서있는 사람은 2년 전 마을을 떠났던 그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성숙해져 있었다.
“저 놈들은 뭐야?”
“후…은이 때문이야. 우리가 먼 친척이라는 걸 알고 나서부터 저래. 어떻게든 은이와 자리를 만들어달라고…그나마 아카데미에서는 말로 끝났지만, 밖에서 마주치니 바로 이 꼴이네.”
“한심하네…”
“글쎄…꼭 한심한건 아닐지도 모르지…”
내막을 알게 된 준은 즉시 혀를 끌끌차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정작 두들겨 맞은 장본인은 자신을 두들겨 팬 사내가 이해가 간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
이혁의 너무나 어이없는 발언에 준은 고개를 저으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휴…어린 여자애 하나 놓고 이게 무슨 짓이야…난 도저히 이해 못하겠어. 게다가 은이가 마음에 들면 은이에게 말을 해야지, 왜 애꿎은 사람을 두들겨 패. 결국 은이한테 말을 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으니까 이러는거 아니야?”
그러나 이혁은 이번에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 이었다.
“글쎄…나는 네가 지금의 은이를 못 봐서 그런 말을 하는거라고 생각한다. 4대 1로 얻어터진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야…사실 이 놈들 기분이 전혀 이해가 안가는건 아니거든.”
반복되는 한심한 발언에 할 말을 잃은 준은 말 없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 하려 했다.
그 때, 이혁이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준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아 젠장, 깜빡했다. 오늘이 본원 선발대회 날인데! 예진 스승님이 네 이름을 또 참가자 명단에 올리셨단 말이야! 네가 매번 결석해준 덕분에 벌써 3년 동안 승진을 못하고 계시다고!”
“응? 내 이름을 올렸다고?”
“아우우…모르겠다. 하여간, 그런 사정이 있어! 빨리 따라와!”
* * *
본원 선발경기는 명실 상부한 가람 아카데미의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 중 하나인만큼,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이 선발 경기에는 매년 가람 아카데미 내에서 가장 촉망받는 인재들이 출전해 각축을 벌였으니 관람 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행사였다.
따라서 학생들의 실력 증진을 위해 가람 아카데미에서는 대규모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광장을 미리 준비해 두었고, 매년 경기 당일에는 광장안에 개미떼처럼 학생들이 모여들곤 했다.
광장은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광장 주위로는 돌계단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어 마치 투우장을 연상시키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광장 안에서 사내 하나와 여자 아이 하나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 십번의 공방을 주고 받았고, 치열한 공방 끝에 상대가 균형을 잃은 순간, 여자 아이의 손에서 금빛 투기가 터져 나와 사내의 가슴을 강타했다.
“선배님, 이제 패배를 인정하시죠!”
푸른 옷을 입은 소녀가 해맑게 웃으며 입을 열자, 광장 바닥에 나가떨어졌던 사내는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은 후배님, 역시 대단하네요. 과연 이번 선발전에서 가장 잠재력 있는 참가자라 불리는 이유가 있었군요. 제가 졌습니다.”
“이번 경기의 승자는…이은입니다!”
곧이어 심판석에서 이은의 승리를 선언했고, 청색 옷의 소녀는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경기장 밖으로 향했다.
“은아! 잘했어! 아이고 이쁜 것! 얼굴도 이쁜 것이 어쩜 하는 짓도 이렇게 이쁘니!”
“예진 스승님!”
이은은 예진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예진의 곁에는 언제나 그렇듯 이옥이 찰싹 달라 붙어 있었다.
“이옥 언니, 안녕하세요.”
“아주 훌륭하구나. 날이 갈수록 실력이 더 성장하고 있어. 이미 본원에 들어올 실력은 차고 넘치는 것 같은데?”
“그랬으면 좋겠어요.”
소녀는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 뒤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저기…혹시 오라버니는 아직 소식이 없나요?“
“그러게 말이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건지…올해도 그 놈 얼굴 보기는 그른 것 같은데…”
예진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자, 이은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아니예요 스승님, 이번에는 꼭 올 거예요!”
“그래, 나도 너만큼이나 간절하단다…그 놈 덕분에 지금 2년이나 승진을 못 하고 있거든…”
그렇게 두 사람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사이, 광장에서는 어느 새 세 번째 경기가 마무리 되었고, 이제 이준의 차례였다.
“자, 다음 참가자는 B등급 3반의 임필 대, C등급 2반의 이준!”
이준의 이름이 호명되자 광장의 소음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소문만 무성한 그 천재 소년은 벌써 2년째 선발전에서 이름만 불리고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으니, 자리에 있는 모든 학생들이 그 문제의 소년을 보고 싶어하고 있었다.
“뭐야. 이번에도 또야? 어휴, 정말이지. 정말이지 대단한 천재납셨군.”
하지만 예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준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관객석에 앉아있던 여자 아이 하나가 못 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짜증을 부려댔다.
“어허, 앉거라. 보는 눈이 많다.”
그러자 빨간 옷을 입은 소녀 곁에 있던 흰 수염의 노인이 그녀를 나무랐다. 노인은 한 눈에 보기에도 아카데미내에서 제법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는 듯 했다.
“부원장님도 참 대단하세요. 저 같았으면 진작 내쫓았어요. 매년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가람아카데미가 무슨 애들 놀이터라도 되는 줄 아나보죠?”
“어쩔 수 없잖니. 이은이 그렇게까지 싸고 도는데…하지만 이번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정말로 규정대로 할 생각이다.”
“하! 참도 그러시겠어요! 작년에도 그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말이죠!”
빨간 치마의 소녀는 노인을 노려보며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하아…”
노인은 말없이 한숨을 내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2,3분 뒤…광장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정말이지…! 뭐 이런 인간 말종이 다있어! 스승님이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데…!”
예진이 말없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 위에 손을 올리자, 이옥의 입에서 결국 험한 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하…됐어. 옥아, 그만하자. 일어나.”
그리고 예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갑자기 이옥이 스승의 팔목을 덥썩 붙잡았다.
“왔어요…”
“응? 뭐라고?”
갑자기 광장 안에 소란이 일고, 이옥의 손끝을 따라 광장 중앙을 바라보자…검은 옷을 입은 소년 하나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2격 2반 이준, 지금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