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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196화 (196/818)

제196화. 평화 마을

긴 침묵 끝에 약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약로의 말은 준을 충격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잘 알 수밖에 없지. 용의 구슬의 조합표를 만든 게 나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투기대륙에서 이 물건은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단 둘뿐이다. 하나는 바로 나이고, 다른 하나는……”

여기까지 말하자 약로의 목소리가 더욱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다른 하나는…내가 아주 완벽한 계승자라고 여겼던 제자란다. 놈의 타고난 재능은 너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였지. 나도 심혈을 기울여 가르쳤다. 끌끌…폐기물 더미에 버려진 걸 데려와 친아들처럼 길렀는데…”

스승은 잠시 말을 삼키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애써 밝은 척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나중에 어떤 계기로 날 배신했단다. 하하. 내가 이렇게 된 게 그 녀석에게는 다행일 수도 있겠구나. 아니면 진작 내 손에 죽었을 테니 말이다.”

버려진 아이를 거둔것도 모자라 연금술까지 가르쳐준 은인에게 배신이라니…준은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정말 배은망덕한 놈이군요…!”

그리고 다음 순간, 준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요 스승님…그럼 팔선문에서 그자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요?”

“하하, 회색 성에 들어가 정말 그 녀석을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아까 말 했듯, 그 녀석의 연금술 실력은 투기대륙을 빛낸 위인이라 불릴 정도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지금은 더 대단한 녀석이 되었겠지. 게다가 지금은 나도 몸 사려야할 상황이니, 알아낸다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스승의 차분한 말투에 준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분노가 깔려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사냥감의 숨통을 끊을 단 한 순간을 노리는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칼을 갈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준은 스승을 달래기 위해 애써 밝은 척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밝음을 가장했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은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제가 그 녀석을 뛰어넘고 말겁니다. 연금술 실력에서나 전투 실력에서나, 모두요! 선생님의 두 번째 선택이 절대 잘못되지 않으셨다는 걸 제가 증명해보일게요!”

“하하…그래, 좋구나!”

이준의 말에 약로는 마음 한켠이 시큰했다. 사랑했던 제자의 배신이 그에게 남기고 간 상처가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리라.

“번개의 춤은 2격 무투기이니, 배우기가 쉬울 리가 없다. 네가 태양검을 익힐 때 쏟았던 노고를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번개의 움직임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많은 피와 땀을 흘려야 할 게다.”

약로는 더 이상 자신의 예전 제자 이야기를 하기가 싫었는지 화두를 돌렸고, 준 역시 더 이상 스승의 아픈 곳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 웃음을 지었다.

“제가 아직 고생을 덜 했나 봐요.”

준은 가볍게 웃으며 손가락에 끼워진 저장반지 안에서 회색 성에서 도마로부터 받았던 흑각성 지도를 꺼내 자세히 살펴본 뒤 다시 집어넣었다.

“가죠. 지도로 봤을 때, 지금부터 가람 아카데미까지 제 속도로 3일 정도 걸릴 것 같아요.”

“그래. 영혼의 궁전 녀석들도 가람 아카데미까지 들어갈 순 없을 게다. 그 아카데미 사람들은 외부인에게 인색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내 힘을 활용하기는 어려울 게다. 그쪽 사람들은 몹시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라 내 행적을 금세 들킬게 뻔하거든.”

스승의 말에 준은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윽…스승님! 저를 너무 과소평가 하시는 거 아니에요? 계속 오르지 못할 산 같은 강자들만 만나다보니 스승님의 도움을 받았던거죠. 저도 제 나이 또래에서는 천재축에 낀다니까요!”

“허허허. 글쎄다. 가람 아카데미는 투기대륙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투사 양성소이니 천재도 한 둘이 아닐 것이야. 게다가 그 안에 본원이 따로 부설되어 있는데, 본원에 소속된 학생들은 하나 같이 걸출한 천재들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지.”

“그렇다면 더욱 기대 되는 걸요.”

약로는 계속해서 제자를 놀려댔지만, 준은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어깨를 움직여 자신의 날개를 펼친 뒤 공중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 * *

비행을 계속한지 3일째 되던 날, 날이 조금 저물 때쯤, 약로가 피로에 절어 반쯤 눈을 감고 있는 준을 깨웠다.

“정신 차리거라. 이제 곧 가람 아카데미니 아래로 내려가거라. 가람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반경 1km 정도는 비행금지 구역이야.”

준은 약로의 말을 듣자마자 신속하게 속도를 낮추고 아래로 내려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발로 산 위에 안착했다.

산 꼭대기에서 마을 위치를 확인한 뒤 빠르게 산을 내려가 마을과 통하는 황토 길을 걷자, 드문 드문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니 사람들의 수가 더욱 늘어났지만, 흑각성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누구도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가람 아카데미가 대단하긴한 모양이네. 흑각성의 개망나니들이 이렇게 얌전히 굴다니…’

* * *

그렇게 한참을 걷자 작은 마을의 입구 앞에 도착할 수 있었고, 입구 위에는 ‘평화 마을’이라는 표지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준이 막 마을 안으로 들어가려 하던 그 때, 주변이 갑자기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상한 분위기에 옆을 돌아보자, 사람들이 겁에 질린 눈으로 나무 한 그루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무는 온통 검정색이었고, 가지가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참으로 음산한 기운이 가득한 나무였다.

나무 위로는 열매가 열린 듯 시체가 널려 있었다. 보다, 정확히는 나뭇가지에 박혀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시체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죽은 자의 나무’ 라고 불리는 나무에서 새어 나오는 음산한 기운에 마을 입구를 지나는 모든 사람들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죽은 자의 나무’의 별칭은 ‘시체 나무’로, 흑각성 전역에 그 명성이 자자해 인근에 있는 투사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나이가 조금 있는 자들 중에는 아직도 흑각성의 검은 뿔 구역과 가람 아카데미가 펼친 피의 사투를 기억하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전투가 끝났을 때…‘시체 나무’에는 투왕 두 명과 투 황 한명의 시체가 전시되었다.

그 날 이후로 흑각성에서의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가람 아카데미의 관할 구역에서 살인을 하거나 소란을 피울 경우 나무 위에 처참한 모습으로 걸려 본보기가 되는 것이 전통이 된 것 이다.

마을 입구로 들어서자 알 수 없는 진동이 몸을 스쳐 지나갔다. 준은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샅샅이 훑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길 위에는 많은 행인들이 있었고 양쪽으로 작은 점포들이 줄 지어 서있었다.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종종 들렸다.

전체적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불과 몇 키로 미터 떨어진 흑각성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걸음을 옮겨 마을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한 무리 사람들이 지붕 위로 날아왔고, 그 중 중년의 사내 한 명이 흑각성에서 들어온 사람들을 노려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 평화 마을에 들어온 자는 반드시 자신의 신분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아니면 바로 쫓겨날 거다.”

열댓 명의 사람 중 중년은 그 사내 한 명이었고 대부분은 20살 안팎의 젊은이들이었는데, 하나 같이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고, 가슴팍에는 푸른 휘장을 달고 있었다.

“또한, 신분을 명확히 밝힌 뒤 이 연금비약을 복용하거라.”

곧이어 중년 남성이 손을 흔들자 한 명이 손에 다홍색의 연금비약을 들고 나타났다.

“독약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은 우리 아카데미에서 직접 만든 살기 감지 비약이다. 누군가가 마음속에 살기를 품게 되면 몸에서 붉은 빛이 발산 되고, 우리 집행부에서 그 자를 찾아낼 수 있게 되지. 이 마을을 떠날 때 해독약을 받아갈 수 있고, 해독약을 받은 자들은 마을을 떠나는 순간까지 집행관이 붙어 지켜볼 것이다.”

이어지는 설명에 사람들의 안색이 바뀌었다.

“이것이 평화 마을의 규칙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지금 바로 떠나거라. 행여나 안으로 들어갔는데 규율을 배반한다면…시체 나무 위에 또 다른 시체가 전시되겠지.”

중년의 사내는 그렇게 담담하고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경고의 말을 마무리했다.

그러자 주변이 삽시간에 침묵으로 물들었다. 일부 사람들은 시체나무와 중년의 남성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다가 마을 밖으로 나가버렸고, 일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 남았다.

그렇게 남은 사람들은 앞으로 걸어가 중년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힌 뒤 다홍색 연금비약을 받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 약을 집어삼켰다.

“저기…저는 가람 아카데미 학생인데… 혹시 약을 안 먹어도 될까요?”

바로 그 때, 준이 중년의 사내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엥?”

그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과 열댓 명의 집행부들이 고개를 돌려 이준을 바라봤다. 몹시 놀란 눈치였다. 사내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준을 몇 번이나 훑어보았다.

“우리 아카데미의 학생이라고?”

“예전에 모집 시험에 통과했었는데 잠깐 휴학을 했습니다. 그래서 인솔자님 없이 혼자 올 수밖에 없었어요.”

이준의 말에 그들은 더욱 놀란 표정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름, 나이, 지도교사를 밝히거라.”

“이준, 18살. 지도교사는…예진 선생님입니다.”

“18살? 18살이 혼자 흑각성을 지나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네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너 같은 녀석은 또 처음 보는구나.”

중년 남성은 놀랍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그의 인적사항을 확인하기 위해 자료를 찾다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준을 바라봤다.

“이준? 네가 바로 가한제국에서 2년 휴학을 신청했다는 신입생 이준이란 말이야?”

중년의 말에 다른 집행부들 또한 눈을 크게 떴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도 전에 휴학부터 한 이준이라는 소년은 이미 아카데미 내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듯 했다.

‘이준? 이은이 항상 입에 달고 사는 그 이준?’

심지어 몇 명의 청년은 넋을 놓은 채 이준을 한참이나 바라보기까지 했다.

“넌 그럼 우리랑 같이 가서 신원을 확인해보자. 만일 네 말이 진짜라면 이 약은 먹지 않아도 된다. 내 이름은 황두식이다. 가람 아카데미 법률집행부의 2소대 대장이고, 가람아카데미의 교사이기도 하지.”

“네, 황 선생님.”

이준은 가볍게 답하고는 열댓 명의 집행부원들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저 사람이 진짜 그 이준이란 사람이 맞는 걸까?”

황두식과 조금 떨어져 있는 자리에 있던 집행부원들은 이준의 뒷모습을 보며 서로 귓속말을 해댔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외모도 그렇게 잘생긴 게 아닌데 이은님이 왜 그렇게 잊지 못하셨지? 고백도 전부 거절하셨잖아.”

“혼자 흑각성을 뚫고 무사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거 자체로 이미 저 녀석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잖아. 웬만한 학생이라면 흑각성에서 열흘은커녕 3일도 버티지 못한다고…”

“2년이나 휴학 신청을 한 녀석이라니 진짜 특이하군. 앞으로 아카데미 생활이 더 재미있어지겠어.”

“허허, 정말로 네가 2년 휴학 원서를 냈던 그 신입생일 줄이야…”

황두식은 준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를 손에 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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