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천계의 불꽃 제 1장
범령은 부하의 말을 되새김질 하듯 중얼거린 뒤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섬뜩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속도를 높여라. 뼈의 무덤 녀석들을 따라가 보자고. 원래 그쪽을 건드릴 생각은 없었지만, 그 녀석들이 이런 산길을 고집하겠다고 하니 우리한테 잡히더라도 그 자식들 운명인 셈이지.”
“작은 종주님, 종주님께서는 용의 구슬을 황혼의 성까지 안전하게 가져다 놓을 것을 명하셨습니다. 만일 더 부딪히게 되면 저희에게 조금…”
범령이 뼈의 무덤의 앞길을 막아서려하자, 그 옆에 있던 노인이 황급히 그를 제지했다.
“장로님. 너무 걱정 마시죠. 상대방의 실력은 저희보다 훨씬 약합니다.”
“그게…”
장로는 잠시 망설이다가 옆에 있던 또 다른 장로를 힐끔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써는 경매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범령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 * *
한편, 숲속에 숨어 10분 정도 기다리던 준은 조금 다시 거리를 좁힌 뒤 나무 기둥 뒤에 숨어 범령 일행의 동태를 살폈다.
그와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수십 명의 피의 호위대가 원형으로 대형을 만들어 놓고 있었고, 뼈의 무덤 사람들도 똑같이 작은 원형을 만들어 놓은 채 서 있었다.
양측의 몸에 새겨진 상처로 미루어보아 짧은 시간 동안 이미 불꽃 튀는 전투가 벌어진 듯 했다.
“벌써 싸우기 시작했나보군…”
피융-!
다음 순간, 새까만 화살 하나가 대투사의 목을 꿰뚫고 뒤에 있던 나무 기둥에 피로 물든 화살촉을 밀어 넣었다.
준은 재빨리 화살이 날아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활을 당긴 사람을 다름아닌 범령이었다. 그는 대투사 한 명을 죽이고 나서 또 다른 대투사를 향해 활촉을 조준하고 있었다.
범령의 활이 가리키는 방향을 본 대투사는 황급히 염력을 뿜어내며 몸 위로 엉성한 염력 갑옷을 만들어냈다. 갑옷의 모양이나 질로 보아, 2성, 3성 정도의 대투사인 듯 했다.
“오오, 그 쓰레기 같은 갑옷으로 내 피의 화살을 막아보시겠다?”
범령은 대투사의 갑옷을 보고는 싸늘하게 웃으며 다시 손가락을 퉁겼고, 다음 순간, 또 다시 날카로운 화살이 대투사의 갑옷을 꿰뚫었다.
범령은 그 대투사 주변에 깔린 호위대의 시체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빌어먹을 놈들…이 보상은 번개의 춤으로 받도록 하지.’
그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린 뒤 고개를 들어 뼈의 무덤의 투령강자 두 명을 노려봤다.
“서기한, 번개의 춤을 내놔라.”
“범령! 오늘 이일을 반드시 후회하게 될거다!”
서기한이라고 불리운 사내는 노발대발하며 살기등등하게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나 범령은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대답 대신 또 다시 활을 들었다.
쉬익-!
다음 순간, 피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화살이 무정하게 투령의 가슴을 꿰뚫었다.
“죽을 거면 같이 죽자!”
하지만 뼈의 무덤의 투령 강자는 범령이 쏜 활에 치명상을 입어 입으로는 피를 토해내면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적을 향해 집어던졌다.
“해골의 폭발!”
“젠장! 한 장로, 어서 퇴각해!”
펑!
그리고 범령의 외침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무섭게 투령 강자의 몸이 폭발하며 폭풍처럼 사방을 향해 염력을 뿜어냈고, 그와 가장 가까이 있던 피의 종족의 호위대 중 하나는 순식간에 걸레짝이 되고 말았다.
“젠장!”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전투력을 상실하게 된 한 장로를 보자, 범령의 붉은 눈이 점점 더 살기로 물들었다.
“피의 호위대! 지금 당장 서기한을 죽여버려라!”
“예!”
범령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직 살아 있는 스무 명 남짓의 전사들이 칼을 높이 들어 올리고는 피 비린내를 풍기며 서기한을 향해 질주했다.
“퉷!”
한 장로와 함께 있던 나 장로도 적잖은 상처를 입었는지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뼈의 무덤 무리의 대장격인 서기한이 마침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범령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서기한을 바라보다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재차 활을 치켜들었고, 그의 화살이 서기한의 몸을 꿰뚫는 것과 동시에 피의 호위대중 하나가 서기한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서기한이 사망하자, 범령은 잽싸게 서기한의 손가락에 있던 저장반지를 빼내더니 신비한 빛을 내뿜는 은색 두루마리를 꺼내들었다.
“하하, 번개의 춤! 젠장! 겨우 손에 넣었군! 이것만 잘 익혀두면 투왕 강자가 와도 날 어찌 못하겠지? 하하하!”
범령은 숲이 떠나가라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그가 2격 무투기를 손에 넣은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갑자기 누군가가 그의 손에 들린 은색 두루마리를 낚아채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하, 범령 작은 종주의 고생에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물건은 제가 갖고 있는 게 더 좋은 것 같네요.”
검은 망토는 먹이를 채가는 독수리처럼 날렵하게 은색 두루마리를 낚아채 허공으로 달아났고, 범령은 순간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식…! 죽여 버리겠어!”
범령이 말을 하자 주위에 있던 열 명 남짓의 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검은 망토를 옥죄여갔다.
“하하, 범령 종주, 또 만나는군요.”
“큭큭큭… 이 자식,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줄을 알았다만 생각보다 재회가 빠르군. 두루마리를 내놔라.”
범령은 피로 흠뻑 젖은 듯 새빨간 검을 들어 준을 가리키며 위협했지만, 준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보란 듯이 두루마리를 자신의 저장반지 안으로 집어넣을 뿐 이었다.
“좋아. 해보자.”
이준의 행동에 범령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뒤틀렸고, 이를 신호로 십 여명의 피의 종족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검은 망토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방팔방에서 접근해오는 피의 호위단들을 쓱 둘러보던 준은 손을 뒤로 뻗어 등에 매달아 놓은 검은 송곳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챙! 챙! 챙!
곧이어 회오리바람 같은 검 놀림에 사방에서 불꽃이 튀었고, 피의 호위단의 손에 들린 검들이 무기력하게 튕겨 나갔다. 오직 소수의 전사들만이 자신의 무기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들마저도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챙!
그리고 다음 순간부터는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한 번 날 때마다 피의 호위대 중 한 명이 지푸라기처럼 쓰러져 나갔다.
“겨우 4성 대투사 주제에…나 범령의 먹잇감이 되겠다고 먼저 나타났다 이거지? 나 장로, 저놈은 내가 맡습니다. 만일 저 놈이 도망갈 낌새를 보이면 즉시 길을 막아주세요. 오늘 저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 속이 시원할 것 같군요.”
“네. 작은 종주님, 조심하셔야 합니다.”
범령 옆에 있던 노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전투력을 상실한 다른 장로를 부축해 뒤로 몇 걸음을 물러섰다.
눈앞의 상대가 대투사 치고는 매우 강력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투령 계급에 오른 범령이 패배할리는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네가 날 쫓아온 건 그 찢어진 지도 조각 때문이지?”
범령은 피식 웃으며 준을 바라봤다. 이에 검은 망토 아래 숨겨진 청년의 얼굴에 한기가 감돌았다.
“보아하니 내가 운이 아주 좋았던 모양이군. 아직 이 물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네 놈이 굳이 이곳까지 쫓아온 것을 보면 뭔가 대단한 물건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이는군.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훨씬 견문이 넓으니 이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겠지.”
“과연 그럴 기회가 올까?”
준은 싸늘한 말투로 범령을 비웃으며 조용히 자신의 푸른 불꽃을 꺼내들었다.
“하하, 글쎄? 너 같이 보물에 눈이 멀어 여기저기 덤비다가 죽어나는 놈들을 흑각성에서 너무 많이 봐서 말이지!”
범령 역시 이에 맞서 자신의 새빨간 염력을 끌어올렸고, 곧이어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피내음이 숲속을 가득 메워나갔다.
“죽어!”
곧이어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붉은 장검이 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준 역시 망설이지 않고 검은 송곳을 꺼내든 뒤 자신을 향해 굶주린 이리의 이빨처럼 날아드는 핏빛 검을 받아냈다.
챙!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푸른색과 붉은 염력이 휘몰아치고, 그들의 발 아래에서는 자욱하게 흙먼지가 일었다.
하지만, 두 검이 얽히는 순간 준은 상대의 공격이 어딘지 모르게 ‘텅 빈’ 것 같다는 기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팔이 저릿하기는 했지만, 투령의 공격치고는 너무나 가벼웠던 것 이다.
‘이상하군. 무투기도 사용하지 않고 받아냈는데…투령의 공격이 겨우 이 정도라니…’
‘쳇…아버지 말씀이 맞아. 우리 피의 종족의 수련법은 무자비하고 수련도 쉽지만, 외부의 힘에 너무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체내의 염력에 의지한 육탄전에는 약하다고 하셨지. 과연 제법 실력이 있는 놈과 정면으로 맞붙으니 단점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군.’
범령은 속으로 아버지의 말을 곱씹으며 즉시 손에 든 무기를 내던졌다.
그러자 핏기 없던 그의 얼굴에 붉게 물들며 손바닥 역시 급격하게 붉은 색을 띄기 시작했다.
“네가 누구든 상관없다.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될 테니까! 내가 갖고 있는 지도 조각이 귀한 물건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러 온 것에 대한 답례로 무덤은 좋은 곳에 마련해주마!”
곧이어 그의 양손에서 진한 피냄새가 풍겨 나왔고, 그가 발을 구르자 순식간에 그의 몸이 붉은 안개로 변해 준을 향해 날아갔다.
“피의 주먹?”
범령의 새빨간 양 손을 보며 한켠에 자리 잡고 있던 피의 종족 장로들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종주님께서 이런 고급 무투기까지 작은 종주님께 가르쳐주셨을 줄이야. 저 검정 망토는 죽은 목숨이군.”
“죽어도 싸지. 우리 피의 종족 물건을 가져가려 했으니 말이야…끌끌…”
그러나 검정 망토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빨간 안개를 노려보고 있었다.
“조심하거라. 지금 네 실력으로 투령 강자의 상대가 될 수 없어.”
“혹시 또 모르죠.”
다음 순간, 준은 역한 피 냄새를 느끼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의 염력 회오리 중심부에 있던 납령에서 푸른 불꽃이 화산처럼 들끓으며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혹시…… 그걸 할 생각이냐?”
이내 푸른 불꽃이 온 몸을 폭풍처럼 훑고 지나갔고, 준은 온 몸에서 야수같은 힘이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범령이 자신의 지척까지 날아온 순간, 그는 재빨리 검은 망토 안에서 두 손을 꺼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천계의 불꽃 제 1장, 대지의 약동!”
콰-직!
붉은 안개 속에서 붉은 주먹과 푸른 주먹이 세차게 충돌하며 무시무시한 파동이 퍼져나갔다.
두 주먹이 충돌하며 일으킨 강렬한 힘은 구석에 있던 피의 종족 장로 두 명이 재빨리 몸을 숨길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불? 젠장, 천지의 불꽃을 갖고 있단 말인가!”
화르륵…!
그리고 순식간에 또 한 번의 뜨거운 불길이 빨간 연기를 덮쳤다.
“…쿨럭!”
다음 순간, 피 안개가 흩어지며 피의 종족의 작은 종주가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작은 종주님!”
궁지에 빠진 범령을 발견한 피의 종족의 두 장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실성한 듯 소리를 질러댔다.
범은 이를 악물고 온 몸을 파르르 떨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이미 새빨간 선지피가 한 움큼이나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의 자랑스러운 핏빛 주먹은 새까맣게 숯덩이가 되어 버리고 만 상태였다.
곧이어 범령이 만들어 낸 붉은 안개가 조금씩 날아가고, 그 안에서 푸른 불꽃에 휩싸인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