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미행
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 대투사인 그가 투종을 논하다니…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웠다.
하지만 대체 언제가 되면 투종에 대해 논할 수 있을까? 평생이 걸려도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일 이었다.
“녀석, 또 자책하고 있구나. 자신감을 가지거라. 자기 자신을 믿고 지금처럼 조금씩 수련을 해나가면 된단다. ‘불개’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수련법이니까 말이다. 지금은 새로운 천지의 불꽃을 찾아 그것을 삼키는 데만 집중하면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고영찬을 뛰어넘는것도 꿈은 아니니까.”
약로는 준의 마음을 꿰뚫기라도 한 듯 인자하게 웃으며 제자를 달랬다.
“후…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경매대 위로 수많은 시선들이 교차했다. 하지만 앞줄에 앉은 이들을 제외하고는 이 물건을 구매할만한 여력이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에 경매사는 거의 앞줄에 선 몇 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가격부터 부릅시다.”
바로 그 때, 성미가 급한 피의 종족의 범령이 미간을 좁히며 운을 뗐다. 그러자 경매사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감돌았다.
“여러분들께서도 아시다시피, 이 용의 구슬은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물건입니다. 그렇기에 이 연금비약의 소유주께서는 이 연금비약을 갖게 되는 낙찰자가 소유주를 위해 두 가지 일을 해달라는 조건을 내거셨습니다.”
순간 모든 세력들이 얼빠진 모습으로 경매사를 응시했다. 다음 순간 하늘 뱀 족의 청 장로가 어이가 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정말 우스운 얘기이군요. 우리의 실력을 모두 쏟아 부어 누군가와, 혹은 어떤 세력과 붙으라고 하면 그걸 다 들어줘야 한다는 소리입니까?”
“하하,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 두 가지 일은 여러분들께서 행동 하실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습니다. 그러나 의뢰자께서 낙찰 전에 내용을 밝히길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는 알려드릴 수가 없군요. 물론, 이 정도의 연금비약을 소유하는 소유주께서도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니 그 분께서 하시는 부탁이 그리 간단한 것일 리는 없겠지요.”
경매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판매자의 말도 전했으니 이제 정말 경매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아까 진행했던 2격 무투기처럼 이번에도 시작가는 없습니다.”
그렇게 경매가 시작되려는 순간, 다시 약로의 목소리가 준의 머리에 울려 퍼졌다.
“가자. 어차피 더 이상 구경할 물건도 없고 용의 구슬을 네가 살 수 있는 형편도 되지 않으니 말이다.”
준 역시 쉽게 동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의 장면을 구경했으니 더 이상 볼거리도 없었다.
그는 앞자리에서 불꽃 튀기는 신경전을 벌이는 세력들을 힐끔 쳐다보고는 유유히 발걸음을 옮겨 경매장에서 사라졌다.
느긋한 걸음으로 경매장을 나온 준은 입구 쪽에 몸을 기대고 이미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뱉었다.
잠시 후, 경매장 맞은편에 자리한 객실을 향해 걸어가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아무래도 먼저 경매로 번 돈이랑 물건을 받는 게 낫겠지…?”
객실로 들어간 준은 자신의 2등급 귀빈카드를 시녀에게 건네고는 그녀를 따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생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경매가 곧 끝납니다. 경매가 끝나면 그 때 물건과 돈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녀는 젊은 염금술사의 곁에 차 한 잔을 올려놓고 공손하게 미소를 짓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들었지만, 결코 입에 넣지는 않았다. 이 빌어먹을 곳에서는 모든 행동에 신중을 기하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눈을 감고 한참을 기다리자, 멀리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담한 체구의 노인 하나가 시녀 두 명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아아, 선생님께서 바로 푸른 정령의 비약을 판매하신 분이시군요? 저는 이곳 경매장의 책임자입니다. 오 장로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이석입니다. 그럼 오 장로님, 경매는 어떻게 됐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하하, 성황리에 마무리 되었습니다.”
오 장로는 슬며시 준을 위아래로 훑어본 뒤 시녀를 불러 은쟁반을 가져오게 했다.
쟁반 위에는 금색의 카드 한 장이 있었고, 카드에는 형형색색의 물결무늬가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 아름다운 금색 카드는 투령 강자나, 3레벨 연금술사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석 선생님께서 경매에 부치신 연금비약은 총 270만 골드에 낙찰되었습니다. 그리고 불의 버섯을 120만 골드에 낙찰받으셨고, 반딧불이라는 약솥을 40만 골드에 구매하셨지요. 카드에는 수수료 27만 골드를 뺀 243만 골드에서 다시 160만 골드를 뺀 83만 골드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낙찰 받으신 물건은…이 저장반지 안에 있습니다.”
‘지독하게도 떼먹는 군……’
반나절이나 고생하고 83만 골드라니…생각보다 남는 것이 적었다. 하지만 아쉽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준은 일단 물건들을 받아들었다.
“아, 오 장로님, 혹시 마지막에 올라갔던 용의 구슬이 누구에게 낙찰되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물건 정리를 끝낸 준은 갑자기 호기심이 일어 7레벨 연금비약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하하, 그 물건은 결국 하늘뱀족에게로 넘어갔답니다.”
“하늘뱀족이라… 알겠습니다. 일단 물건을 다 전달 받았으니 더 방해하지 않고 이만 물러나보겠습니다.”
오장로의 답을 들은 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가벼운 인사를 끝으로 그곳을 빠져나가고자 했다. 하지만 준이 막 몸을 돌리려는 찰나, 오장로가 입을 열었다.
“하하, 선생님 잠깐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저희 팔선문의 주인님께서 선생님께 아주 큰 관심을 갖고 계신 듯 한데,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잠깐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아뇨, 괜찮습니다. 저는 그냥 물건을 보러 온 것 뿐이라서요. 그 분께서 관심을 가지실 만한 인물도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뒤에 또 일정이 있어 오래 머무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만일 또 물건을 사거나 팔 일이 있다면 그 때 뵙지요.”
그러나 준은 오 장로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바로 몸을 돌렸고, 노인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떤 자인지 파악했나?”
그 때, 객실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노인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기골이 장대한 중년의 사내 한 명이 어느 새 이준이 앉아있던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주인님……”
머리에 온통 흰 서리가 내려앉은 백발의 중년을 발견하자, 오장로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짧은 시간 안에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힘을 워낙 깊숙이 숨겨두고 있었서… 하지만 일단 한 번에 푸른 정령의 비약을 세 알씩이나 가져올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연금술사일 확률이 아주 높고, 등급도 꽤 높은 편인 듯 합니다. 게다가 저 자가 가져온 푸른 정령의 비약은 그 품질이 대단해 일반 4레벨 연금술사도 만들기 힘든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아무리 수소문 해봐도 짚이는 인물이 없었습니다.”
보고를 듣던 중년의 남성은 낮은 소리로 헛기침을 한 뒤 싸늘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몰래 사람을 붙여 뒤를 밟아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파악해라. 상급의 푸른 정령의 비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테니 말이야. 어떻게든 우리 팔선문으로 끌고 와야 해.”
“네, 알겠습니다.”
“지금 시작하거라. 은신술에 능한 사람을 찾아서 뒤를 캐도록.”
할 말을 끝낸 뒤 사내는 곧장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고, 사내가 일어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장로도 긴장한 표정으로 조용히 객실을 빠져나갔다.
* * *
준은 경매가 끝난 즉시 ‘천약방’으로 향했다. 소생의 비약을 만들기 위한 재료들을 싹 다 구매하자 어느 새 금색 카드에는 20만 골드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정말이지… 쓰는건 한순간이구만…”
준이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약방을 나서자, 약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조심하거라. 누군가가 널 뒤쫓고 있다. 아마 팔선문쪽 사람인 듯 하구나.”
스승의 경고에 준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가 다시 아무 일이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역시 괜히 흑각성이 아니네요. 이런 놈들한테 경매에 부칠 물건을 어떻게 믿고 맡기죠? 가한제국이었으면 이런 식으로 영업을 했다가는 순식간에 망했을텐데 말이에요.”
“어쩔 수 없다. 이정도 규모의 경매를 열 수 있는 세력이 많지도 않고, 이 곳이 워낙 혼란한 곳이니 말이다. 그리고 당장은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굳이 놈들과 부딪혀서 좋을게 없으니 말이야.”
“네.”
“우선 뒤따라오는 놈을 따돌리고 범령의 거처를 알아보자. 지금 당장은 지도 조각이 급선무니까.”
스승의 명에 따라 준은 곧바로 작은 골목길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준이 들어간 골목으로 들어온 팔선문의 투사들은 목표물을 놓친 것을 깨닫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뿔뿔이 흩어져 준을 찾았다.
……
“어디까지 따라오나 보자.”
준은 자신을 미행하던 자들을 손쉽게 따돌린 뒤 옷을 갈아입고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거리에서 곳곳에 돈을 쓰며 범령에 관련된 정보를 캐냈지만 만족할만한 소득을 거두지 못한 준은 결국 회색 성에서 가장 호화로운 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범령을 비롯한 이들은 회색 성을 떠나지 않고 하루 정도를 더 머물다 다음날 낮이 되어서야 우르르 여관에서 나와 회색 성을 빠져 나갔다.
* * *
빽빽한 수풀 속,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무성한 나뭇잎 사이를 오가며 작은 틈새로 주위를 살폈다. 그의 시선은 백 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십 여명의 사람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비록 목표물이 바로 앞에 있었지만 곧장 손을 쓸 수는 없었다.
범령 본인도 투령 강자였을 뿐 아니라 그의 옆에 있는 두 노인도 투령 정도로 보였고, 실력이 막강한 호위대까지 합세한다면 약로의 도움을 받더라도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명이라도 놓치게 되는 날이면 ‘피의 종족’의 일원들이 우르르 몰려올 것이 뻔하니만큼 지금은 기회를 보는 것이 상책이었다.
범령 일행은 10분 정도 휴식을 취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은 그들이 가던 방향으로 직진하리라 예상했으나, 뜻 밖에도 놈들은 갑자기 크게 한 바퀴를 돌며 회색 성의 서쪽 방면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엥…?’
범령 일행의 돌발 행동에 이준은 화들짝 놀라 낯빛이 변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인 채 그들을 바라봤다.
‘설마…들킨 건가? 아니야, 그들은 내 실력을 대투사 정도로 알고 있으니 나를 발견했다면 바로 손을 썼겠지. 투령이 셋이나 있는데 뭐가 무서워서 방향을 틀겠어.’
준의 예상대로, 그들은 준이 멈추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자신의 미행이 아직 발각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한 준은 박쥐처럼 조용히 나뭇가지 위를 날아 그들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피의 종족과 백 미터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며 그들을 20분쯤 쫓아갔을 때 즈음, 약로가 다급한 목소리로 준을 불러 세웠다.
“조심하거라. 앞 쪽에 있는 산에서 강력한 기운이 느껴진다. 아까 경매장에서 느꼈던 투황의 기운보다 강한 자들이야. 게다가 기운이 아주 차가운 걸로 보아 범령의 동족일지도 모르겠구나.”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려던 준은 순간 가슴이 철렁해 곧바로 거대한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