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비행 무투기: 박쥐의 날개
통로를 따라 경매장 안으로 들어가자,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경매장이 눈 앞에 펼쳐졌다.
한 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규모의 거대한 경매장에는 자수정으로 만들어진 좌석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판매대는 그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화려했다.
“안녕하세요. 좌석 번호가 어떻게 되시나요?”
이준이 한창 넋을 놓고 있을 때 아름다운 시녀 한 명이 빠르게 걸어와 공손히 물었다.
준이 말없이 초록색 카드를 건네자, 시녀는 카드 색깔을 보고 조금 놀란 듯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선생님께서는 2급 귀빈이십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시녀는 즉시 판매대와 가까운 자리로 그를 안내했고, 준은 화려한 의자에 앉아 화려한 판매대를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대단한 곳 이었다.
바로 그 때,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이 든 준은 즉시 좌우를 돌아봤다.
‘히익…’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바로 방금 전에 보았던 창백한 청년이었다.
핏기 없는 얼굴과 시체의 그것처럼 텅빈 눈동자를 정면에서 마주하자, 준은 온 몸의 털이 거꾸로 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작은 종주님, 무슨 일 이십니까?”
준과 눈이 마주친 청년은 이내 시선을 거두었고, 옆에 있던 창백한 노인은 젊은 사내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 녀석이 조금 이상해서요. 괜히 보고 있자니 마음속에 뭔가 두려움 같은 게 생기는 것 같군요.”
범령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으로 영문을 알 수 없는 일 이었다.
“하하, 우리 피의 종족은 냉혈 종족이다 보니 선천적으로 강한 불꽃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요. 저 사람은 아마도 불꽃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군요.”
노인이 그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그럴 수 있죠.”
청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판매대로 시선을 옮겼다.
“그 소문이 진짜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물건을 손에 넣어야 합니다!”
“하하, 작은 종주님 걱정 마시죠. 설령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그 자가 헤인성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하게끔 미리 손을 써놓았습니다.”
“그렇다면 한결 낫군요.”
청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음을 짓고는 눈을 감고 조용히 경매의 시작을 기다렸다.
그렇게 30분이 흐르자, 경쾌한 종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경쾌한 종소리를 신호로 경매장 사람들의 이목이 앞쪽에 놓인 수정 탁자 위로 집중되기 시작했고, 소란스럽던 장내에 잠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하하, 여러분, 아주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말들은 생략하겠습니다.”
화려하게 빼 입은 백발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경매장을 빼곡히 메운 인파들을 바라봤다.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경매인만큼 귀한 물건들만을 엄선했으니, 오늘 경매에 참여하신분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곧이어 노인은 손뼉을 치더니 큰 소리로 경매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 지금부터 헤인성의 경매가 시작됐음을 공식 선언합니다!”
그 때, 거대한 수정 탁자가 갑자기 시선을 압도하는 빛을 발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서서히 잦아들었다.
수정 탁자 위에는 푸른색의 장검이 놓여져 있었다.
조명을 받아 섬뜩하게 반짝이는 칼날은 무엇이든 가차 없이 베어버릴 것 같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이 검의 이름은 겨울 칼날입니다. 아주 단단해 쇠도 흙처럼 잘라 버리지요. 이 위에는 아름다운 3레벨 얼음 속성의 마정석 한 알이 박혀 있습니다. 얼음 속성이나 물 속성이신 분들께서는 이 검을 쥐는 순간 실력이 배가 되지요. 관심 있는 분들께서는 돈을 아끼시면 안 됩니다. 돈이 귀한 것도 사실이나 목숨은 달려 있어야 누릴 것도 누리지 않겠습니까? 하하!”
곧이어 노인이 푸른 장검을 들어 올리자, 서늘한 한기가 무대위를 가득 메웠다.
“시작가는 10만 골드입니다.”
‘마정석이 박힌 무기란 말이지…’
준에게는 큰 매력이 없는 무기였다. 속성도 안 맞고, 자신에게는 이미 검은 송곳이 있었다.
하지만 경매장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그 검을 탐내고 있었다.
첫 경매의 승자는 피골이 상접한 사내였다. 최종 낙찰가는 15만 골드.
그 이후로도 각종 보석이나 갑옷, 무투기, 염력 수련법이나 약재가 줄줄이 올라왔다.
땡-
그리고 또 한 번의 종소리가 울리자 시녀 하나가 은색 쟁반을 들고 걸어왔다.
은 쟁반 위에는 투명한 재질의 작은 약병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바로 준의 연금비약이 들어있었다.
“하하, 이 연금비약이 바로 그 유명한 ‘푸른 정령의 비약’입니다. 무투사 최고 단계에서 머무는 분들께서 빠르게 벽을 넘어서고 싶으시다면 이 푸른 정령단을 복용하시면 됩니다. 게다가 이 비약은 두 줄 짜리이니, 운이 좋다면 바로 두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지요.”
백발의 경매사가 푸른 정령의 비약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수 백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약병으로 쏠렸다.
9레벨 무투사와 1레벨 대투사는 겨우 한 레벨 차이이지만, 그 실력은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 투사라면 당연히 눈이 뒤집힐만한 물건이었다.
경매사는 교활하게도 부작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바로 경매에 들어갔다.
물론 대다수의 투사들은 부작용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테지만…그래도 교활한 상술이었다.
“경매 시작가격은 33만 골드입니다!”
“34만!”
“35만!”
이준은 조용히 의자에 앉아 계속해서 치솟는 가격을 들으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 기세가 이어진다면 소생의 비약을 만들기 위한 약재 구매도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외침이 끊이지 않았고, 가격이 어느 정도 올라가고 난 뒤에야 비로소 가격을 부르는 사람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55만.”
그렇게 가격이 49만에서 정체되어 있을 때 게으른 목소리 하나가 앞좌석에서 들려왔다. 놀랍게도, 55만 골드를 내겠다고 한 사람은 바로 피의 종족의 작은 종주였다.
‘저 사람도 푸른 정령단에 관심이 있단 말이야? 투령이잖아.’
“56만.”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누군가가 또 다시 더 높은 값을 불렀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가장 앞줄에 앉아 있던 해골 무늬 두루마기를 걸친 중년이 눈에 들어왔다.
‘뼈의 무덤 쪽 사람이군.’
뼈의 무덤은 흑각성에서 손꼽히는 세력 중 하나로, 기이한 염력 수련법과 무투기를 사용하는 것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리고 그들이 유명한 가장 큰 이유는, 투기 대륙 전체에서도 드물기로 유명한 어둠속성의 염력을 다루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하나 같이 걸출한 강자였고…무엇보다, 피의 종족과는 앙숙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피의 종족과 뼈의 무덤이 맞부딪히자, 준은 문득 어린 시절 박씨 가문과 가씨 가문, 이씨 가문, 세 가문이 경매장에서 맞붙었던 일이 떠올랐다.
“58만.”
“59만.”
“작은 종주님, 더 이상 참여하시면 도리어 손해입니다. 잘 생각하시지요.”
“60만.”
노인이 범령을 말렸지만, 작은 종주는 아랑곳 않고 다시 가격을 올렸다.
하지만 무표정한 중년의 사내는 가격이 60만 골드에 달하는 순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순간 사내의 의도를 알아차린 범령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드리웠다.
“좋아. 이번에 아버지께서 움직이신다면, 서기한 네 놈은 내가 맡도록 하지.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주마.”
청년이 살기어린 눈빛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하하, 범령 작은 종주님께서 60만 골드를 부르셨습니다! 더 참여하실 분 계신가요? 만일 없으시다면 푸른 정령단 두 알은 이 분께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푸른 정령의 비약은 120만 골드에 범령에게 넘어갔고,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익에 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
푸른 정령의 비약이 낙찰되고 난 후로도 계속해서 다양한 물건들이 탁자 위에 올랐지만, 높은 가격에 팔리는 것은 없었다.
경매의 분위기가 생각보다 달아오르지 않자, 백발의 경매사는 마침내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는 한 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황금빛 상자 하나를 꺼내들고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지금 경매에 부칠 물건은 아주 귀한 물건입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분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보물이지요. 일종의 무투기이지만…”
경매사의 말에 준의 머리에 퍼뜩 무언가가 스쳤다.
“바로 비행 무투기, 박쥐의 날개입니다!”
경매사가 상자를 여는 순간, 새카맣게 빛나는 날개 문양이 떠올랐다. 날개는 왠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역시…’
은은한 광택이 감도는 한쌍의 날개가 등장하자, 경매장이 후끈 달아올랐다.
“마음에 드는데? 흥미롭군.”
“작은 종주님, 이 비행 무투기의 가격은 100만을 훌쩍 뛰어넘을 것 같은데…이대로라면 원래 사려고 했던 물건을 못 사게 될 수도 있습니다.”
범령의 말에 곁에 있던 창백한 인상의 노인이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걱정할 게 뭐가 있죠? 어차피 그 물건은, 낙찰 받지 못하더라도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 아닌가요? 오히려 돈을 안 쓰고 얻는 편이 훨씬 이득이죠.”
“그러나 만일 정보가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범령은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뼈의 무덤측 사람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이고!”
작은 종주의 눈빛에 노인은 무기력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그의 성품으로 미루어 보아, 어떤 조언도 소용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하, 여러분들께서도 오늘날 이 비행 무투기가 얼마나 보기 드문 건지 잘 아실 겁니다. 우리 팔선문에서는, 이 박쥐의 날개를 3격 무투기로 정하고 시작가를 100만 골드로 정했습니다. 이제부터 입찰을 시작하겠습니다.”
하지만 상상 이상의 시작 금액에 후끈 달아올랐던 경매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확실히 비싸긴 하구나. 하지만 비행 무투기의 가치를 보면 충분한 가격이기도 하지. 네가 동굴에서 보라색 날개를 얻었을 때 내가 아주 운이 좋았다고 얘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최소한 가한제국에서는 그 누구도 비행 무투기를 갖고 있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신기하네요. 제 날개 이후로 다른 종류는 처음 보는 것 같아요. 그럼 제 것과 비교했을 때 뭐가 더 빠를까요?”
“네 날개는 3격에서도 중급이고, 저 물건은 3격 하급이니 네가 조금 더 빠르겠구나. 다만, 저 박쥐 날개는 번개 속성을 가진 만큼 번개가 치면 속도가 배는 빨라지지.”
그렇게 준과 약로가 매의 날개와 박쥐의 날개의 성능을 비교하고 있는 사이, 범령이 가격을 불렀다.
“130만!”
단번에 30만 골드가 오르자, 경매장의 분위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바로 그 때, 킬킬거리는 비웃음 소리가 적막한 장내에 울려 퍼졌다.
“작은 종주, 당신도 참 손이 큰 사람이군요. 그런데 우리 하늘뱀족도 이물건은 탐이 나는군요. 미안하지만, 140만을 부르겠어요.”
범령은 특유의 서늘한 눈빛으로 도도하게 다리를 꼬고 뱀처럼 요사스러운 기운을 풍기며 앉아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하하, 누군가 했더니 하늘뱀족의 청 장로시군요. 이번에 경매에 참여하실 줄은 몰랐네요.”
“우리도 물건을 사러 왔으니까요.”
“하늘뱀족이요?”
이준은 생전 처음 듣는 기묘한 종족의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약로는 그런 준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예전에 하늘뱀족과 겨뤄본 적도 있지 않느냐? 벌써 잊었단 말이야?”
“제가 겨뤄본 적이 있다고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처음 듣는 종족이었다. 그런데 이미 자신과 싸워 본 적이 있다니!
‘하늘뱀…하늘…뱀?’
그 때, 준의 머릿속에 퍼뜩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 정체 모를 여자랑 흑색 이무기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응, 그래. 그들이 바로 하늘뱀족이다.”
“예린이가 저 사람들 손에 있다는 거네요…”
약로의 한마디에 갑자기 준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하하, 그런데 그 여자아이는 너무 걱정할 필요 없을 게다. 하늘뱀족에서의 생활이 다른 곳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단다. 뱀의 눈을 갖고 있으니 더욱 그렇지. 아마 아주 귀빈 대접을 받고 있을게야.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너보다 강해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제가 찾으러 가야죠.”
예린을 떠올리자 준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