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헤인성 경매장
준은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탁자 위에 약재를 늘어놓았다.
“도마가 갑자기 보수를 내밀었으니 망정이지…아니었으면 여관에 머물 돈도 없었을 텐데…휴우…몇 년 동안 돈 걱정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으니 원…”
준은 약재를 다 꺼낸 뒤 적당한 등급의 약솥을 꺼냈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온 정신을 집중해 연금비약을 만들 일만 남은 것이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손끝에서 푸른 불꽃을 피워냈다. 약솥에 불이 붙자 방안의 온도가 후끈 달아올랐다.
아름답게 일렁이는 푸른 화염을 바라보던 준은 마침내 마음을 굳히고 약재를 밀어 넣었다.
준은 약 솥 안에서 형태를 갖춰가는 연금비약을 바라보며 저장반지 안에서 알약 한 알을 꺼내어 입에 물었다.
보라색 화염이 약 솥 안에 들어가자 준의 표정은 더욱 진지하게 변했다. 하지만 첫 번째 시도는 실패였다.
‘후, 실패야……’
준은 까만 잿더미를 바라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연금비약을 융합할 때,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선 안 된다. 화염을 바꿀 때는 더더욱 정신을 집중해야 하고.”
스승의 지적에 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약솥에 불을 붙였다.
불꽃이 내는 ‘타닥’거리는 소리와 한숨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나지 않는 방안에서 묵묵히 정신을 집중하기를 한 시간…
드디어 푸른색의 연금 비약 한 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금 비약의 매끈한 표면 위로는 보라색과 초록색의 줄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후우…!”
준은 비지땀을 뻘뻘 흘리며 긴 숨을 내뱉었다. 스승의 불꽃까지 사용한다면 최상급 푸른 정령의 비약을 만들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두 줄이라면 40만 골드겠구나. 세 줄 이라면 60만일 텐데 말이지.”
그 때, 약로가 웃으며 준을 꼬드겼다.
“40만으로도 본전은 찾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준은 약로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고 두 줄 짜리 푸른 정령의 비약을 약병에 집어넣고는 한 시간 정도 침대 위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약재와 씨름하기를 반나절…날이 어두워질 무렵이 되자 탁자 위에는 두 개의 약병이 놓였고, 방 안에는 향긋한 약향이 진동했다.
마침내 마지막 약재가 투입되고, 결국 준은 총 세 개의 두 줄짜리 푸른 정령의 비약을 만들 수 있었다. 4번 시도해서 3번.
처음에는 두 알만 만들어도 천운이 따른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과연 스승의 조언이 있으니 혼자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성공률이 높았다.
어차피 처음에 목표로 했던 두 개는 채웠으니, 준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두 줄짜리 푸른 정령단에 열을 가했다. 마지막 하나는 성공해도 그만, 실패해도 그만이다. 하지만 성공하면 훨씬 큰돈을 거머쥘 수 있었다.
“하하, 그래. 네가 두 줄짜리 연금비약에 만족하리라고 생각 하지 않았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만들어 봐야지.”
“어차피 두 개는 성공했으니, 마지막 하나는 실패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준은 약 솥 안으로 약로의 하얀 불꽃을 주입했다. 하얀 불꽃이 들어가고 보라 불꽃이 밀려 나는 순간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흰색 화염이 약 솥 안으로 들어가며 연금 비약에 새하얀 무늬를 더하는 순간, 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흠… 불을 다루는 실력이 아주 제법이구나.”
약로는 준이 무사히 보라색 화염을 흰색 화염으로 바꾸는데 성공한 것을 보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중급 푸른 정령의 비약 두 알, 상급 한 알, 이 정도면 충분해…!”
준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확은 풍족했지만,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리고 준이 약병을 막 저장반지에 넣으려는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약솥이 산산 조각났다.
산산 조각난 약솥을 보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휴…돈 들어갈 일이 또 생겼네.”
* * *
헤인성의 경매장 앞.
준은 유씨 경매장의 본부와도 비교할 수 없는 헤인성 경매장의 규모에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었다.
경매장의 입구에는 십여 명의 사내들이 각각 날카로운 무기를 손에 들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 몸을 검은 망토로 꽁꽁 싸맨 준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완벽히 가린 상태로 안으로 들어갔다.
흑각성처럼 위험한 곳에서는 가급적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적게 흘리는 것이 좋다는 것이 지난 며칠간 그가 배운 것 중 하나였다.
인파를 따라 경매장 안으로 들어가자, 혼이 쏙 빠질 정도로 인파가 가득했다. 사방팔방에 팻말이 걸려 있고, 팻말에는 판매하는 물건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생각보다 희귀한 물건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신기한 물건들이 제법 많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준은 감정소 간판을 발견하고는 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감정소에는 백 개는 족히 넘을 듯한 밀실이 줄지어 마련되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거친 옷을 입은 시녀 한 명이 달려 나와 즉시 고개를 숙이며 환히 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물건을 보러 오셨나요, 아니면 감정을 받고 판매를 하러 오셨나요?”
“후자입니다.”
“따라오시죠.”
시녀는 10 미터 정도 걸음을 옮기더니 작은 밀실 앞에 멈춰 섰다.
“선생님께서 판매하시려는 물건은 이 방에 계신 대가께서 평가하실 예정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 물건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에 따라 경매석이 다르게 배정될 예정입니다.”
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검은색으로 칠한 나무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작은 밀실 안에는 등 하나가 켜져 있어 비교적 밝은 편이었고, 그 안에는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앉으시죠.”
노인이 무심한 말투로 측정 도구들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가져온 물건을 보여주시지요.”
준은 말없이 손을 흔들어 작은 약병 세 개를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연금비약인가요?”
옥병을 발견한 노인은 조금 놀란 듯 하더니 고개를 들어 약병 세 개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는 아주 얇은 장갑 두 짝을 끼고 아주 조심스레 작은 병을 열고, 푸른 정령단 한 알을 꺼내어 손바닥 위에 올려 두었다.
“제대로 확인을 좀 해보도록 하죠.”
노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도구들을 쥐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이내 더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 줄이 새겨진 푸른 정령의 비약이 확실하군요. 품질도 꽤 좋은 편이고요. 일반 4레벨 연금술사들도 만들어내기 힘든 수준의 물건입니다. 여기 흑각성의 시세로 따지면 경매 시작가가 30만 정도 되겠군요. 경매에 부치면 50만까지 뛸 수 있을 테고요.”
“그럼 이건 얼마 정도 될까요?”
만족스러운 가격이었다. 자신이 생각한 것 보다 10만 골드나 더 받을 수 있다니, 기분이 좋아지는 게 당연했다.
“으음?”
다음 순간, 소년이 내민 물건에 노인은 반쯤 넋을 잃었다.
“세 줄이군요!“
“네.”
준이 옅은 미소를 띈 채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의 얼굴에 화색이 만연했다.
“정말 좋은 물건을 가져오셨습니다.”
노인은 이빨을 활짝 드러내며 웃었다.
“이 푸른 정령의 비약은 시작가를 70만 골드 정도로 설정해도 되겠군요. 아마 90만 골드는 받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13만 골드를 투자해서 170만 골드라니…상상 이상의 이득에 준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이 정도 물건이면 저희 경매장에서도 2등급 물건으로 취급됩니다. 좌석 번호를 드리지요. 오늘 오후에 경매가 정식으로 시작하니, 그 때 이 좌석표에 적힌 곳에 자리를 잡으시면 됩니다.”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준에게 녹색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그럼 이제 가도 되나요?”
“허허, 편하신 대로 하시죠.”
노인은 세 알의 연금비약을 조심스레 집어들며 미소를 지었다. 노인의 태도는 처음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준이 사라지자, 노인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군. 한 번에 푸른 연금의 비약을 세 알이나 가져오다니! 이 정도 고급 연금 비약을 제조할 수 있는 연금술사는 흑각성에도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주인님께서 아주 좋아하시겠어.”
* * *
헤인성 경매장을 나와 준은 바로 여관으로 들어가 작은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경매 시간이 다가오자, 준은 다시 망토를 걸쳐 입은채 성큼성큼 경매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경매장 입구에 도착하자, 또 다시 익숙한 소음이 고막을 괴롭혔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거친 욕설이 이곳이 ‘무법지대’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새치기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 그러다가 붙잡혀 두들겨 맡는 사람, 서로 밀고 밀리다가 욕설이 터져 나오고, 또 주먹이 오고가고…정말이지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 이었다. 그리고 문제의 해결 방법은 언제나 주먹다짐이었다.
참담한 비명소리들이 끝이지 않는 인파속을 간신히 빠져 나온 준의 시선이 경매장 대문 밖에 있는 넓은 통로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빨간 카펫이 깔려 있었고, 그 주위로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줄줄이 서있었다.
그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빨간 카펫이 깔린 통로로 천천히 들어갔다. 이준의 시선은 가장 중앙에 있는 창백한 인상의 청년에게 고정 됐다.
‘투령…?’
청년의 나이는 20대 초반 정도로 보였지만,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운은 투령급 이상의 그것이었다.
“오오, 저기 봐. 피의 종족 사람들 아니야?”
“가운데 있는 사람이 피의 종족 자은 종주 범령 아니야? 하하, 듣기로 팔선문 장로 한 명이 실종 된 사건이 저 사람과 관련이 있다던데.”
“온 몸에 피가 싹 마른 모양이, 누가 강제로 피를 다 뽑아낸 모양인가봐. 피의 종족 아니면 누가 했겠어. 그런데, 정말 팔선문과 전면전이라도 벌일 요량인가?”
“무서울 게 뭐가 있겠어? 아버지가 검은 명단 5위에 드는 강자인데. 게다가 피의 종족이 팔선문보다 강하지 않아? 팔선문에서는 감히 범령을 건드릴 생각도 못할걸.”
인파 속에서 소리에 집중하던 준은 다시 한 번 혈색 없는 얼굴의 청년을 힐끗 바라보고는 피의 종족이란 이름을 가슴에 새겨 두었다.
그 때,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는지, 청년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이 곳에는 정상적인 사람이 없군.”
그들이 지나가자 빨간 카펫이 깔린 통로는 다시 텅텅 비었다. 사람들이 잔뜩 부대끼는 대문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염병, 귀빈 카드 한 장 주면 어디 덧나나! 이 망할 팔선문 자식들! 돈만 더럽게 밝혀가지고. 내가 여기에서 쏟아 부은 돈이 얼마인데!”
바로 그 때, 깡마른 사내 하나가 텅 빈 통로를 바라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귀빈 카드?”
사내의 말에 준은 무심코 아까 노인이 건넨 카드를 꺼내들었다.
“뭘 꼬나봐? 정신 나갔어?”
뺨에 홍조도 가시지 않은 어린 아이 하나가 멍하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자, 사내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야, 이 자식! 귀빈 카드도 있는 자식이 왜 여기서 낑기고 앉아 있어? 미친놈 아니야?”
“아…”
준은 그제서야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고는 붉은 카펫이 깔린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