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헤인성
준은 사정없이 불어대는 광풍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몸을 떨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거지?’
그렇게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공포에 몸을 떨기를 수 분…드디어 햇볕이 들며 어둠을 조금씩 걷어내고, 준은 그제서야 자신의 주위에 그 불길하고도 끔찍한 존재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는 5분 남짓한 시간 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 준은 5시간 동안은 바닥에 누워있었던 듯한 피로감을 느꼈다.
“이석 선생, 괜찮은 거 맞소?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져 깜짝 놀랐다오.”
그 때, 통통한 볼살을 열심히 흔들어대며 도마가 달려왔다. 온 몸에 땀이 흥건한 것으로 보아 준을 찾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닌 듯 했다.
“괜찮습니다. 실수로 바람에 날아가 버렸네요.”
준은 웃는 얼굴로 도마를 안심시켰다. 당연히 상단을 보호할 강한 투사가 필요하기 때문이었겠지만, 그래도 흑각성에서 이렇게 괜찮은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에 준은 그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바람에 불려 날아갔다니, 정말이지 천만 다행이오! 정말 재수가 없었으면 평야에서 길을 잃었을 텐데.”
도마는 웃으며 말했다.
“이석 선생, 어서 마차 위에 타시오. 나는 바람 때문에 날아가 버린 물건들을 좀 정리하고 나서 타겠소.”
준은 고개를 끄덕인 뒤 물건 정리를 시작한 상인들을 흘깃 보고는 곧바로 마차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아직도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스, 스승님…아까 그자들이 바로…”
“그래. 그들은 영혼체에 물리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반면 영혼체는 염력을 사용할 수 없으니, 천지의 불꽃이나 다른 종류의 불꽃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고 그들에게 당할 수밖에. 나도 얼음 불꽃의 정수가 아니었다면 아까 그 자와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투기나 염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본래 영혼체는 염력을 사용하지 못 하는 대신, 염력에 의해 해를 당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방금 전 그 사내는 분명히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며 단박에 죽음을 맞이했었다.
“그래, 하지만 정확히 무슨 힘을 사용하는지는 나도 알 수가 없구나.”
약로는 긴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네가 강해질 방법만 생각하거라. 내가 쓸데없이 나서지만 않는다면, 그들 또한 나를 찾아내지 못할 테니까 말이야.”
“네.”
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매번 조금씩 변하지만, 언제나 그의 과제는 동일했다. 지금보다 더 강해질 것. 오직 그뿐이었다.
“우선 헤인성에 하루 정도 머무르며 경매장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찾아보자꾸나. 이번 기회에 견문도 좀 넓히고, 가한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물건들이 가득할게다. 그나저나, 돈은 충분히 갖고 있느냐?”
“으음…이제 10만 골드 정도 남은 것 같아요.”
“십만 골드라…경매장에서 쓸 만한 것을 구하기는 어렵겠구나.”
이준은 민망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정 안 되면 약재나 연금비약을 좀 팔아볼까요?”
“하늘 사자의 정수를 조금 파는 것도 괜찮을 게다. 흑각성에는 그런 물건을 원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니까.”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준은 약로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으음… 어려울 것 같아요. 이걸 팔아버리면 칠색 이무기가 제 말을 듣지 않을걸요? 스승님은 가급적 모습을 드러내시면 안되니까, 지금은 칠색 이무기를 달랠 수단이 필요해요. 역시 연금비약을 파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여기서도 4레벨 연금비약이라면 제법 가격이 나가지 않을까요?”
“그럼, 물론이지. 4레벨 연금술사면 어딜 가도 투왕 수준의 대접을 받을 수 있으니까.”
“하하, 그럼 다행이네요.”
* * *
거대한 뱀처럼 기다란 마차 행렬은 검은 평야를 빠져 나온 뒤 서서히 속도를 낮췄다.
이후 산길을 따라 두 시간 정도를 달리자, 어느 새 오후 시간이 되었고, 다시 산을 하나 넘고 그 아래까지 도착했을 때 즈음 새까만 돌을 쌓아 만들어진 성이 흐릿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하하, 이석 선생, 여기가 바로 헤인성이오. 요 며칠 경매가 열려 근처에 있던 여러 강자들이 찾아오고 있지. 작년에는 2격 무투기가 경매에 올랐었는데, 아주 난리가 났다고 들었소.”
“2격 무투기요? 정말인가요?”
이준은 저도 모르게 도마의 말을 재확인 했다.
“하하, 그렇소. 2격 무투기요. 갑시다.”
곧이어 도마의 손짓에 따라 마차들이 다시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기 시작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새까만 문 앞에 도착한 도마의 상단과 준은 새까맣게 몰려든 인파 뒤에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렸다.
마차 앞에 서있던 준은 고개를 들어 칠흑같이 까만 성벽을 가만히 바라봤다.
문의 중앙에는 ‘헤인성’ 이라고 표시되어 있었고,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내리자 성 입구 쪽에 까만 옷을 갖춰 입은 열댓 명의 남자가 보였다.
사람들은 그 남자들에게 통행료를 지불하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만일 가한제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난리가 낫겠지만, 이곳에서는 아주 흔한 풍경인 듯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꺼져, 빨리. 이 형님 앞에서 꾸물대지 좀 말란 말이야!”
준이 흑각성의 독특한 풍경에 흥미를 느껴 이곳저곳 훑어보고 있는 사이, 등 뒤에서 욕설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대머리 사내 하나가 뼈가 앙상한 사내의 멱살을 붙잡고 있었다.
“아악…”
그러나 멱살을 붙잡힌 사내가 소매속에 감춰둔 단도를 휘둘러 대머리의 목언저리를 베었고, 이내 핏줄기가 솟구쳤다.
마른 남성은 대머리에게 날카로운 일격을 날린 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빠르게 숲 속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췄고, 대머리는 눈을 시뻘겋게 뜨고는 이내 그를 따라 달려갔다.
잠시 후, 숲 속에서 처량한 비명소리가 들렸고 마침내 정적이 흘렀다.
준은 넋을 놓고 숲 속을 바라봤다. 사라진 것은 대머리의 기운이었다. 그의 영혼 탐지능력에 의하면 대머리 사내는 2성 투사, 마른 사내는 1성 투사였지만, 더 강한 쪽이 목숨을 잃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하하, 이석 선생, 이 흑각성에서는 절대 겉으로 보이는 실력으로 상대를 평가해선 안 되오. 매일 같이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죽어나가곤 하지요.”
그 때, 도마가 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고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그렇군요.”
30분 가량이 흐르자 도마의 상단도 입구 앞에 도착할 수 있었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에게 골드를 건네자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즉시 길게 늘어선 마차들을 모두 통과시켜 주었다.
* * *
“이석 선생은 이제 어디로 갈 예정이오?”
성에 무사히 진입하자마자 도마가 마차를 멈춰 세우고 웃는 얼굴로 물었다.
“일단 성 안에서 좀 돌아다녀 보려고요. 아 맞다, 여기 헤인성에서 약재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요?”
“약재 말이오? 그렇다면 ‘천약방’을 방문하는게 가장 좋소. 돈만 충분히 갖고 있다면 밖에서는 구경도 못할 약재들을 마음껏 구할 수 있을 거요.”
도마는 웃으며 친절하게 약재상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여기서 인사드리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뵙겠습니다.”
준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파 속으로 섞여 사라졌다.
“그러게 말이오. 꼭 다시 봤으면 좋겠는데. 부디 목숨을 부지하길 바라오.”
사라지는 이준의 뒷모습을 보며 도마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 *
천약방이라는 곳으로 향하는 내내 거리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개의 경우 싸움의 끝은 한쪽이 죽는 것이었다.
그렇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걷자 마침내 ‘천약방’이라는 간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가 맞겠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진한 약 향기가 코 끝을 찔렀다.
약방의 내부는 매우 넓었고, 사방에 수정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수납장이 그득했다. 수납장 안에는 약재가 가득했고, 끝없이 늘어선 약재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약방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약재를 구경하던 준은 그 밑에 붙은 가격표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바깥에서 보기 힘든 약재는 맞지만 비싸 봤자 5만 골드 상당인 물건을 여기서는 보통 세 배는 올려 팔고 있었다.
“약재 하나에 17만골드라고? 날강도가 따로 없군.”
지금 그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나무 정령 꽃’ 하나도 구매하기 힘들었다.
“스승님, 이제 어쩌죠?”
“하하, 내가 말 하지 않았니. 흑각성에서 돈이 없으면 생활이 아주 힘들다고.”
약로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달리 방법이 있겠니? 물물교환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우선은 소생의 비약을 만들 생각은 잠시 접고 남은 돈으로 푸른 정령의 비약을 만들 약재를 사서 비약을 만들어 경매장에 팔거라. 그게 아니라면 약재를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게다.
“휴, 정말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겠네요.”
준은 한숨을 푹 내쉬며 이내 푸른 정령 비약을 만들 약재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푸른 정령은 4레벨 연금비약이었기에 소생의 비약을 만드는데 필요한 것 보다는 훨씬 저렴하게 약재를 구할 수 있었다.
“아아, 중요한 이야기 하나를 잊고 있었구나. 마음에 여유가 없는 지금의 네게는 독이 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갑작스런 약로의 말에 준의 가슴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네가 ‘구름의 불꽃’을 네 것으로 만들 생각이라면, 지난번에 대지의 불꽃을 삼켰던 때처럼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해둬야 한다. 게다가 대지의 불꽃 때는 피의 결정 정도로 성공률을 높일 수 있었지만, 구름의 불꽃은 천지의 불꽃 중에서도 14번째에 이름을 올린 불꽃이다. 19번째인 대지의 불꽃보다 훨씬 강력하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느냐?”
“이번엔 뭐가 필요한가요?”
준은 자기도 모르게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6레벨 연금비약, 땅의 정령의 비약이다. 필요한 재료는 4개 뿐이지. 땅의 심장, 용의 얼음열매, 푸른 나무넝쿨 그리고 6레벨 물 속성 마수의 마정석 한 알이다.
약로의 말에 준의 마음이 납덩이를 삼킨 것처럼 무거워졌다. 약로가 말한 약재 중 단 하나도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 했다. 게다가 6레벨 물 속성 마수의 마정석이라니…한숨이 절로 나오는 재료들이었다.
* * *
천약방에서 나온 준은 고개를 들어 어두워지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푸른 정령의 비약 만들기 위한 재료를 사느라 그가 가진 13만 골드를 모두 탕진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것도 돈이 모자라 기력의 조각을 세 병이나 주고 나서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만일 연금비약 제조에 실패라도 하는 날이면…정말 하늘 사자의 정수를 팔아서 연명해야 할지도 모를 일 이었다.
물론 푸른 정령의 비약 4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의 재료를 사두었지만, 지금 그의 실력으로는 성공률이 절반에도 못 미쳤으니, 두 알만 만들어낼 수 있어도 천만다행이었다.
준은 연금비약을 만들 수 있을만한 조용한 장소를 물색하며 한 시간 가까이 거리를 방황한 끝에 조용해 보이는 여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