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무법지대
조금 더 달려가자, 마을의 규모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크고 작은 천막이 줄줄이 100개는 되어보였고, 곳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쉭!
그러나 마을의 천막들을 둘러싼 울타리가 뚜렷하게 보이고, 나름대로 규모를 갖춘 대문이 눈에 들어올 무렵, 갑자기 날카로운 화살 하나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왔다.
바닥에 꽂힌 화살이 요란스레 몸을 떠는 것으로 보아, 활 시위를 당긴 자는 자신을 죽일 생각으로 화살을 날린 것이 분명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영문 없이 날아온 살의에 분노한 준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마을 입구 어귀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뭐? 너 설마 흑각성에 처음 오는 거냐? 우리 마을에 들어오려면 미리 통행료로 500골드를 내야 하는 것도 모르는 거야?”
“하…!”
그렇다고 화살을 날리다니…정말이지 황당한 곳 이었다. 준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신 뒤 저장반지에서 500 골드를 꺼내 사내에게 집어던졌다.
사내는 준이 던진 자그마한 주머니를 열어 통행료를 확인한 뒤 손을 흔들어 문지기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문을 열어라!”
사내의 고함 소리에 마을의 낡아 빠진 목재 문이 삐그덕 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리기 시작했다.
“들어와라, 햇병아리.”
준은 잔뜩 긴장한 상태로 언제라도 검은 송곳을 뽑을 준비를 한 채 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일단 지도 파는 곳을 찾아야겠어.’
그러나 준이 문을 지나 길가로 진입하려는 순간, 갑자기 거대한 검을 든 사내를 위시한 몇 몇 사내가 준을 막아섰고, 동시에 등 뒤로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방금 전 준에게 통행료를 요구하던 사내가 활을 들고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가진 물건 다 꺼내봐. 돈이든, 무기든, 다행인 줄 알아. 평소 같으면 일단 죽이고 털었을 텐데 오늘은 내가 기분이 좋아서 목숨만은 살려주는 거니까.”
이런 대로변에서 강도질이라니, 과연 명성대로였다. 길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고 있었지만, 누구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있었다.
“어떠냐, 흑각성에 처음 온 티가 나자마자 이 모양이다. 이게 흑각성이지. 껄껄. 내가 왜 자비를 베풀지 말라고 했는지 알겠느냐?”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스승의 말에 준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준의 손이 등 뒤에 짊어진 검은 송곳으로 향했다.
쉬익!
준의 앞을 막아서고 있던 사내는 소년이 등 뒤에 짊어진 송곳으로 손을 옮기자마자 즉시 수중에 들린 거대한 검을 휘둘렀다.
쾅!
하지만 사내의 칼이 채 절반도 휘둘러지기 전에 검은 빛이 번뜩였고, 준을 포위하고 있던 세 명의 사내는 순식간에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런!”
비쩍 마른 사내는 갑작스런 상황에 허겁지겁 시위를 당겼지만, 검은 송곳을 든 그림자는 어느 새 시야에서 사라져 그의 등 뒤에 나타나 있었다.
쾅!
“어억!”
코를 찌르는 역겨운 피비린내와 함께 활을 든 사내가 바닥에 쓰러지자, 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무기를 다시 짊어진 뒤 걸음을 옮겼다.
……
“오오, 저 애송이 손이 아주 매운데? 저렇게 한 방에 죽여 버리다니.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고 말이야. 자식! 흑각성 체질이야!”
잠시 후, 대로를 지나던 사람들 중 하나가 박수를 치며 준을 칭찬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 이었다. 사람을 죽여 놓고 칭찬을 받다니…
하지만 황당한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무리 길을 걷고 걸어도 지도 상점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무슨 마을에 지도 파는 곳 하나가 없어. 그것도 흑각성 초입이잖아. 보통 이런 곳에는 지도 파는 곳이 몇 군데는 있는 게 정상 아니야?’
바로 그 때, 웬 뚱뚱한 사내 하나가 방실 방실 웃으며 준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지도 사려는 사람이오? 아까부터 쭉 묻고 다닌다던데.”
“갖고 계신 건가요?”
“나는 이 평야를 거쳐 가는 상인이오. 그러니 당연히 아주 정밀하게 그려진 지도를 갖고 있지.”
“가격은?”
준의 눈빛에는 의심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길에서 물건을 팔겠다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라 해도 신용이 가지 않는 곳 이었다.
“하하, 그 전에 뭐 하나 알려줄게 있소. 여기 검은 평야에서는 정확한 지도를 갖고 있어도 정확한 위치를 찾기는 어렵지. 평야에 갑자기 해를 가리는 검은 폭풍이 몰아치거든. 그럼 시야가 완전히 가려져서 지도도 무용지물이 되버리지. 결국 길을 잘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요.”
소년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계속 훑어보자, 사내는 피식 웃으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더 돌려서 얘기하지 않겠소. 사실 문 앞에서 당신이 싸우는 걸 봤다오. 실력이 꽤 괜찮던데. 우리 상인들의 호위를 의뢰하지. 흑각성으로 가는 거라면 이 곳의 지리를 잘 아는 자가 필요할 테니, 서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준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먼저 마음속으로 약로에게 의견을 물었다.
“선생님, 어떡할까요?”
“음…검은 폭풍은 검은 평야의 명물이기는 하지. 경험이 없다면 길을 잃기 쉬운 것도 사실이니, 이곳 지리를 잘 아는 상인과 동행하는 편이 좋을게다.”
소년이 답변을 하지 않고 망설이는 듯 하자, 뚱뚱한 사내는 투실투실한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하, 우리들의 목적지는 흑각성 안쪽의 ‘헤인성’이오. 그곳에서 며칠내로 일 년에 한 번 있는 경매가 열리니, 우리도 제법 급하거든. 시기를 놓치면 안 되니까. 그러니 의심은 그만하고, 같이 가는 게 어떻소?”
“경매장이요?”
경매장이라는 말에 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흑각성의 경매장에는 온갖 기이한 물건들이 쏟아지기로 유명하니, 그도 꼭 경매에 참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좋아요. 갑시다.”
“껄껄, 동행하게 돼서 기쁘구려. 도마라고 불러주시오.”
* * *
칠흑 같은 평야 위로 기다란 마차 행렬이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질주한다.
준은 위 아래로 요동치는 마차 안에 앉아 조용히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마을에서 만난 뚱보 상인 ‘도마’가 자리하고 있었다. 도마의 상단에는 호위 무사가 제법 많았지만, 그 중 가장 강한 것으로 보이는 사내도 5성 무투사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지금 대열에서 가장 강한 것은 바로 준이었다.
도마는 품속에서 지도 한 장을 꺼내어 천천히 펼친 뒤 손가락으로 빨간 점 하나를 가리키며 히죽 웃음을 지었다.
“여기가 우리의 목적지인 ‘헤인성’이오. 지금 이 속도라면 내일 오후쯤이면 도착할 것 같소.”
준은 노랗게 변색 된 지도 위에 그려진 작은 점 하나를 응시했다. 작은 점 옆으로는 파란 별 표시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여기가 가람 아카데미인가요?”
이준은 파란 별 모양을 보며 무심한 척 질문을 던졌다.
“그렇소. 투기대륙에서 아주 유명한 아카데미지. 내 딸내미도 거기에 있소. 하하!”
딸 이야기가 나오자, 도마는 자랑스러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파란 별 주변의 땅들은 굵은 선 몇 개로 구역이 나뉘어져 있었다. 도마는 그 구역들은 손으로 짚어가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지금 흑각성은 거대한 세력으로 인해 나뉘어져 싸움이 끊이지 않고 있소. 우리가 가려는 헤인성은 그 세력 중 하나인 ‘팔선문’의 관할 지역이지. ‘팔선문’은 검은 뿔 지역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세력이지. 그들의 수장인 안휘라는 자는 흑각성의 검은 명단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라고 들었소. 이번 헤인성에서 열리는 경매도 팔선문에서 주관하는 것이고…”
“검은 명단?”
“하하하, 흑각성 일대의 강자들의 실력에 대한 평가지. 다만 다른 제국들의 강자들과 월등한 실력차이를 보인다는 것이 특징일 것 같소. 가장 끄트머리에 있다가 2년 사이에 교체된 꼴찌 세 명이 투왕이니 말이오.”
준의 얼굴에는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가한제국에서는 이미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10대 강자 명단에 변화가 없었다.
게다가 10대 강자 중에는 투왕도 제법 많았는데, 이곳에서는 불과 2년 사이에 투왕 셋이 물갈이가 된 것이다. 흑각성 일대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가혹한 곳 이었다.
“그럼 선두에 이름을 올린 사람을 누구인가요? 실력이 어느 정도 되죠?”
“1위, 2위는 모두 베일에 감춰져 있어 그들을 본 사람이 몹시 드물다오. 나도 깊이는 모르니까 말이오. 다만 서열 3위만 해도 어마어마하지. 진작에 투황 최고 단계에 올랐고, 연금술에도 능통한 자라더군. 흑각성에서 연금술로는 제일 가는 사람이라 ‘약의 황제’라고 불리고 있소.”
“약의 황제? 이름이 뭔가요?”
“음, 누구였더라, 아마도…… 한샘이었지?”
바로 그 때, 준의 손가락에 끼워진 검은 반지가 백색 화염을 뱉어내며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반지의 움직임에 준은 황급히 손을 뒤로 물렀다. 반지가 소매 안에 숨겨져 있었길래 망정이지, 도마가 보기라도 했다면 문제가 생겼을 것이 뻔했다.
‘스승님, 왜 그러세요?’
약로답지 않은 행동에 당황한 준은 즉시 머릿속으로 약로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약로는 침묵을 유지할 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이석 선생?”
갑작스레 준이 식은땀을 흘리자, 영문을 모르는 도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네.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준이 다시 무언가를 물어보려던 찰나, 갑자기 마차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여러분 조심하세요! 검은 폭풍이 몰려오려고 합니다! 즉시 마차를 세우고 똘똘 뭉치셔야 합니다! 절대로 흩어지면 안 됩니다. 흩어지면 방향을 잃게 됩니다!”
“검은 폭풍이라고? 재수도 없지. 이걸 또 겪게 되다니.”
밖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도마의 얼굴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석 선생, 먼저 내리시오. 보아하니 그렇게 큰 폭풍은 아닌 것 같으니, 큰 위험은 없을 거요.”
이준은 끄덕인 뒤 곧바로 마차 밖으로 뛰어 내렸다.
밖으로 나와 보니, 10여분 전까지도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까만 안개로 덮여 있었고, 시커먼 안개로 인해 시야가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래서 지도가 무용지물 이라고 했던거군.’
“너무 걱정 마시오. 불행 중 다행으로 이번에 불어오는 폭풍은 규모가 크지 않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정도니, 잘 버텨 보시오.”
도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칠흑 같은 강풍이 휘몰아치며 거대한 회오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호위대는 마차를 둘러싼 채 원형으로 모여 손에 들린 무기를 바닥 깊숙이 꽂고 있었다.
곧이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덮쳐오며 매서운 바람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바로 옆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암흑이었다.
준 역시 주위 사람들을 따라 검은 송곳을 바닥에 깊숙이 꽂아 넣은 뒤 그 송곳을 붙잡고 광풍에 맞섰다. 바람이 불 때 마다 검은 송곳에서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렸다.
‘이게 작은 편이라고?’
그리고 바람이 조금씩 잦아들 무렵, 갑자기 주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빛이 깜빡였다. 사람의 형상처럼 보였지만,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준은 궁금증을 못 이기고 그쪽으로 송곳을 꽂으며 기어가다시피 이동했다.
“영혼체인가? 준아! 뭔가가 어둠속에 숨어있다. 움직이지 말거라!”
바로 그 때, 갑자기 약로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준은 반사적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아무래도 그들은 아직 이준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너희들은 대체 누구길래 우릴 쫓아오는 거지? 우린 당신들과 아무런 으아아악!”
어둠 속에 숨에 있던 누군가가 소리쳤다.
“킬킬!”
어둠 속에서 털이 곤두서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뱀 모양의 무언가가 붉은 영혼체를 휘감았다. 영혼체를 옭아맨 것은 불길한 광택을 뿜어내는 검정색의 사슬이었다.
치익—
“아아아악!”
그것이 붉은 영혼체에 닿자마자 하얀 연기가 새어 나왔고, 곧이어 처참한 비명 소리와 함께 영혼체의 입에서 시커먼 연기가 새어나왔다.
“끌끌…네가 이전에 얼마나 강한 존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혼체가 되었다면 그저 우리의 사냥감일 뿐이다.”
형언할 수 없는 불길한 목소리는 그 말을 끝으로 종적을 감췄다.
수풀 속에서 숨을 참고 있던 이준의 옷은 비 오듯 흐른 땀으로 인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