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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185화 (185/818)

제185화. 검은 평야

“하지만, 그 재능이 꽃피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죠. 그리고 우리 집안에서는 그걸 기다려주지 않을 거구요.”

”그렇습니다.”

세형은 소녀의 말에 공감을 표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뭐, 그래도 기다려보죠. 오라버니는 언젠가 꼭 투기대륙 전체를 호령하는 강자가 될 거에요. 아참, 그럼 지금 오라버니의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제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가 1성 대투사 정도였습니다.”

“1성 대투사란 말이죠…”

노인의 설명에 이은의 얼굴에는 또 다시 미소가 번졌다.

“2년 사이에 투사에서 대투사라…거의 1년에 한 단계씩 성장했구나…그 정도 속도라면 가람아카데미내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일 텐데…역시 오라버니는 대단해.”

“허허, 그렇지요. 게다가 제가 보기에는 앞으로 더욱 더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보입니다.”

세형이 계속해서 칭찬하자, 이은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하하, 고마워요. 그럼 우선 이 근처에서 조금 쉬고 계세요. 급한 일이 없다면 굳이 안으로 들어오시지 않아도 되구요. 혹시라도 그 노인네들이 알게 된다면 귀찮을 일 밖에 더 생기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노인은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한 줄의 그림자가 되어 산정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 * *

“오오, 이은 아가씨! 방금 산에서 수련 끝내고 내려오시는 길인가요?”

세형과의 대화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던 이은의 곁으로 새하얀 옷을 걸친 청년 하나가 다가왔다.

“네.”

이은의 덤덤한 표정에도 흰색 옷의 청년은 변함없이 밝은 웃음을 지었다. 그는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이은에게 말을 더 걸려고 했다. 그러나 이은이 먼저 기회를 가로챘다.

“백성찬 장로님, 죄송합니다만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 또 뵙죠……”

소녀는 가볍게 웃음을 남기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또 다른 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길로 들어서기도 전에 또 다른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이은, 또 이쪽으로 왔구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하나 서있었다.

“예진 선생님?”

그녀를 불러 세운 것은 바로 몇 년 전 은빛성에서 준의 입학시험을 치렀던 예진이었다.

“보름 뒤에 승급 대회가 열리는 거, 알고 있지? 올해는 작년처럼 포기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여기 온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선배님들과 경쟁을 벌일 수 있겠어요?”

예진은 새침하게 웃으며 겸손한 척 고개를 젓는 이은을 보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였다.

“거짓말 하지마. 그 녀석을 기다리고 있는 거잖아. 정말 오기는 하는 거니?”

“그럼요. 걱정 마세요. 곧 올 거예요.”

이은의 확신에 가득한 말투에 예진은 더욱 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와도 뭘 어떻게 하겠니? 2년이나 자리를 비웠잖아. 밖에서 무슨 수련을 하든 이곳에서 보다 빨리 실력이 늘겠니? 2년이야 2년, 이곳에서 열심히 수련했다면, 어쩌면 대투사가 됐을지도 모르는 시간이라구.”

“선생님, 오라버니를 너무 과소평가 하시면 안돼요. 지금쯤이면 엄청나게 성장해있을걸요?”

이은이 또 다시 싱긋 웃으며 준을 두둔하고 들자, 예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래줬으면 얼마나 고맙겠니. 하지만 이번 승급대회는 정말 치열하다구, 실력 있는 지원자만 어림잡아 300명은 될 텐데.”

연신 준을 원망하는 듯 했지만, 그녀의 말투에는 준을 향한 기대와 애정이 가득했다. 이은이 예진을 고깝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녀의 이런 말들이 모두 준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렇게 된 거, 이번 참가자 명단에 오라버니 이름도 넣어주세요.”

“어휴, 정말 너도 대단하구나. 2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이준, 이준…가람 아카데미에 괜찮은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예진은 그렇게 말하며 근처에 있던 성찬을 바라보았지만, 이은은 그저 빙긋이 웃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에휴… 그래.”

제자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예진은 흥미를 잃었는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곧 수업을 시작하니 함께 돌아가면 되겠구나.”

“네.”

이은은 고개를 끄덕인 뒤 밝게 웃으며 예진을 따라 걸음을 옮겼고, 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걸어갔다.

투기대륙의 많은 사람들은 왜 흑각성처럼 위험한 장소가 가람아카데미 근처에 있는지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대륙 전체를 호령하는 세를 가진 전설의 아카데미 주변에 대륙 최고의 우범 구역이 존재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있는 것은 있는 것이다.

게다가 흑각성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었고,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영역을 꾸준히 확장해오면서 투기대륙 도처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국가와 비슷한 수준의 넓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다만 독특한 점은, 흑각성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지배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지배자’가 없기 때문에 더욱 혼돈스러운 무법지대가 된 것 일 수도 있고, 반대로 너무나 혼란스러운 무법지대였기 때문에 누구도 이곳을 정돈하고 질서를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못 한 것일지도 모른다.

* * *

‘영혼의 궁전’에 대한 이야기는 준의 온 신경을 팽팽하게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비록 지금 당장 그들에게 추격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스승의 위치가 발각되는 순간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될 것이 자명했다.

가한제국을 떠날 때만 해도 새로운 곳으로 향한다는 설레임을 가졌던 그였지만, 스승을 쫓는 위험한 조직과 아버지의 실종을 떠올리자, 낯선 것에 대한 기대와 설렘 따위의 사치스런 감상은 거짓말처럼 녹아 사라지고, 어느 새 무거운 책임감이 두 어깨를 내리 눌렀다.

나설아와의 문제만 끝난다면 조금 더 자유로워질 줄 알았건만, 지금의 그는 편안해지기는커녕 강해져야 할 이유가 산더미처럼 늘어나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강해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은 바로 새로운 천지의 불꽃인 ‘구름의 불꽃’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준은 1분 1초가 아쉽다고 느끼며 전력을 다해 날갯짓을 거듭했다.

미리 만들어 둔 기력의 조각과 3격 중급 수준까지 성장한 ‘불개’덕에 이틀에 한번 정도 땅으로 내려가 휴식을 취하는 정도면 충분했기에, 준은 ‘죽음의 관문’을 벗어난지 불과 열흘 만에 ‘혼돈의 땅’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열흘을 날고 또 날자, 끝없이 펼쳐진 산과 숲이 사라지고, 갑작스레 거짓말처럼 새까맣고 황량한 평야가 펼쳐졌다.

그 검은 평야는 아주 자연스럽게 흑각성의 영역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혼돈의 성’, ‘죽음의 성’, ‘범죄의 성’ 이라는 별명에 걸맞는, 참으로 음산한 영역 표시 방식이었다.

“여기가 검은 평야인가?”

마침내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주희가 준 지도에 따르면 분명히 검은 평야부터 흑각성의 구역이었다.

소년은 피곤한 표정으로 날개를 거두어들이며 천천히 아래로 하강했다.

목적지가 멀지 않았지만, 이렇게 기력이 쇠한 상태로 그 안에 들어갔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염력과 체력을 회복하자. 열흘 동안 엄청난 양의 염력을 사용했으니, 그것을 다시 원래대로 돌리는 과정만으로도 상당한 수행이 될게다.”

“네.”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근처의 산으로 이동한 뒤 바닥에 주저 앉아 눈을 감았다.

기력의 조각 한 알을 꺼내 입안에 넣고 정신을 집중하자, 주위에 떠다니던 에너지들이 그의 몸 안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후 내내 수련이 지속 되었고, 마침내 준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에너지의 파동이 점점 잦아들다 이윽고 완전히 흩어졌다.

염력을 회복한 준이 눈을 뜨고 긴 호흡을 내뱉는 순간, 갑자기 그의 입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음침한 검은 빛의 연기가 나뭇잎에 닿자, 갑자기 나뭇잎이 시커멓게 물들며 시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각인독’의 등장에 준은 화들짝 놀라 즉시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역시나 그의 손가락 끝에는 먹처럼 새카만 각인 독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준은 사라진 것처럼 한동안 보이지 않던 각인독이 다시 나타나자, 자기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지었다.

“잘만 다루면 좋은 무기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못 다루면 독소가 변이를 일으키고, 해독약에 저항이 생겨 빠른 속도로 몸이 망가질게다.”

약로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빌어먹을 나원승! 이렇게 목숨을 걸고 구해줬는데…”

자신을 ‘선생’이라고 부르며 무엇이든 돕겠다고 말하고는 운남종과 문제가 생기자마자 수수방관하던 나원승의 모습을 떠올리자,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준은 고개를 저으며 긴 한숨을 내쉰 뒤 다시 고개를 들어 검은 평야를 바라봤다. 이제와서 생각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 문제였다.

‘후! 나씨 문중과의 악연은 끝나질 않는군.’

그리고 준이 막 날개를 펼치려는 순간, 갑자기 약로가 말을 걸어왔다

“흑각성 근처에서는 날개 사용을 자제하는 게 좋을 게다. 비행 무투기는 아주 드문 물건이니, 많은 사람들이 비행 무투기를 차지하기 위해 널 노릴게야.”

“네?”

스승의 경고에 준은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 정말 엉망이군요. 가한제국에 있을 동안은 투황이라 해도 제 날개를 보고 바로 뺏으려드는 자는 없었는데…”

“하하하, 괜히 투기대륙 제일의 무법지대라는 별명이 붙었겠느냐. 이제 들어가 보도록 하자. 그래도 흑각성에는 귀한 보물들이 많으니, 동해의 연금비약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물건들도 많이 구할 수 있을게다.”

동해를 위한 연금비약이라는 말에 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스승이 없어진 틈을 타 배신을 할 것이라고 의심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동해가 없었다면 운남종과의 전투에서 진작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럼 정말 잘됐네요.”

조금이나마 동해에게 보답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준의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졌고, 그는 해맑게 웃으며 검은 송곳을 등에 지고 검은 초원을 향해 달려 나갔다.

* * *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는 어디를 둘러봐도 단조로운 검은색만이 가득했다. 어둑어둑한 하늘은 시커먼 대지와 어우러져 더욱 더 불길한 느낌을 풍겼다.

널리 펼쳐진 조용한 평지 위로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질주하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 달렸는데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질 않네.’

달리고 또 달려도 사람은커녕 마수 한 마리보이지 않는 살풍경한 광야의 모습에 준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계속 앞으로 가거라. 동해도 여기엔 와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다른 지도처럼 세밀하게 지형이 그려져 있지는 않구나. 일단 작은 마을이라도 들어가 지도를 한 장 구매해야 할 것 같다.”

“네.”

“그리고, 흑각성에 들어가기 전에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곳에서는 절대로 자비를 베풀지 말거라.”

무법자의 성에 가까워질수록 스승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해 지고 있었다. 약로의 그런 태도만 보아도, 지금 향하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걱정 마세요. 아시잖아요. 제가 그렇게 마음이 넓은 편은 아니라는거.”

준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다시 고개를 숙이고 달려 나갔다. 그렇게 쉼 없이 달리기를 30여분, 드디어 검은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몇 분을 더 달리니, 그 점들이 점점 커지며 하얀색 천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마을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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