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4화. 영혼의 궁전
“겨우 이 정도 실력으로 날 잡겠다고?”
준은 혼신의 힘을 다해 염력을 불어넣는 모성원을 비웃으며 검은 송곳을 움켜쥔 양손 중 한손을 떼어 느긋하게 상대의 가슴팍에 가져다댔다.
퍼억-
소년의 몸짓은 한없이 여유롭고 부드러웠지만, 모성원은 마치 거대한 쇳덩이로 가슴을 얻어맞은 듯한 통증을 느꼈다.
쾅!
그리고 준의 손에서 거대한 파문이 일자, 모성원의 거구가 순식간에 문철이 그려놓은 원을 벗어나 성벽에 쳐박히고 말았다.
“커헉…”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일고, 모성원의 입에서는 자신의 검처럼 붉은 피가 울컥 울컥 흘러나오고 있었다.
17살 난 소년이 투령급 강자를 일격에 물리치는 장면에 주위에는 순간 적막이 감돌았다.
……
“더 지체할 수 없다. 어서 떠나는 게 좋겠구나.”
주위에 싸늘한 정적이 감돌자, 약로의 목소리가 준의 머릿속에 울렸다. 준 역시 스승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즉시 입을 뗐다.
“문철 여단장님, 죄송하지만 상황이 급박해 지금 떠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음대로 하게.”
문철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준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겠습니다.”
말을 마친 준은 곧바로 성문을 지나려다 갑자기 방향을 돌려 성벽 앞에서 피를 토하며 무릎 꿇고 있는 모성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부 여단장님…”
소년이 갑자기 방향을 틀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성원을 향했다.
그는 새파란 애송이에게 일격에 당한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지 연신 씩씩거리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염력 갑옷은 완전히 부서져 있었고, 그의 몸에는 눈 앞의 상대에게 맞설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준은 무력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모성원에게 다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운산에게 이말을 전해주시죠.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뒤에 돌아올테니 너무 안달하지 말라고.”
죽음의 관문의 동쪽문…회색 망토를 입은 청년 하나가 느릿느릿 걸어 나와 멀리 펼쳐진 산봉우리를 응시했다. 그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긴 뒤 잠시 근처의 호수에 멈춰서서 뒤를 돌아 거대한 요새를 멍하니 바라봤다.
익숙한 곳을 떠나는 아쉬움과,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기대감이 그의 가슴안에서 뒤엉켜 올라왔다.
“후우…”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른 뒤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새로운 세계에서 더욱 크게 자라 익숙한 곳으로 돌아올 것을 기약하며.
……
회색 망토 입은 청년이 사라진지 30분 정도 되었을까. ‘죽음의 관문’ 상공에 돌연 검은 기운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기운은 귀신같은 음산함을 풍기며 꾸물꾸물 주위를 배회하다 이내 준의 뒤를 쫓았다.
* * *
울창한 숲 속의 큰 길 위에는 나무 위에서 부지런히 울어대는 새 소리와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스승님, 아까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준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 하고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스승이 그 정도로 자신을 재촉하는 것은 처음이었 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어떤 누구도 약로의 상대가 될 수 없었고, 운산이 국경까지 날아온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으니 약로의 재촉에는 필경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휴우. 가한제국 근처에 그 녀석들이 있을 줄이야. 대체 그놈들이 왜 여기까지 온거지…”
스승의 엉뚱한 대답에 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스승님 ‘그 녀석들’이라니…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죠?”
하지만 약로는 더 이상 답하지 않고 침묵에 빠졌고, 준은 더 이상 스승을 채근하지 않은 채 묵묵히 지도를 손에 들고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말없이 숲길을 다시 걸어나간지 몇 분 뒤, 마침내 스승이 입을 열었다.
“후…사실 이 문제는 네가 조금 더 강해지면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우리의 행적을 놈들에게 들켜버렸으니, 내 계획도 모두 틀어지고 말겠지. 만일 네가 알고 싶다면, 지금 말해주는 수 밖에 없겠구나.”
약로는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허나, 이 일과 엮여 있는 세력들은 운남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존재들이다. 나 역시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없지. 그래도 알고 싶느냐? 신중히 생각하고 답하거라. 일단 이 문제에 발을 들였다가 잘못되면 목숨을 잃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 조차도 어쩔 수 없다.’니, 스승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이었다. 준은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지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마치 거대한 마수가 차디찬 혀로 온 몸을 핥는 것처럼.
한참을 제자리에 서서 고민하던 이준은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 도움만 받았는걸요. 스승님께서 어쩔 수 없는 문제라면 제가 힘을 보태는게 당연한거죠. 오히려 기쁜걸요. 제가 스승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준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약로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래, 그래! 나 약선! 이번에는 제자를 아주 제대로 뒀구나! 하하하!”
‘약선?’
산이 떠나가라 웃는 약로의 모습에 준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번졌다. 그간 웃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지만, 이토록 가슴 깊은 곳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듯한 웃음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스승의 본명을 듣는 것도.
‘약선…그게 스승님의 이름이었어!’
스승의 본명, 그리고 그가 오랜 시간 가슴에 담아두었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준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번에는’ 이라는 말이 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마도 스승의 이전 제자와의 관계는 그 끝이 좋지 않았던 것 같았다.
바로 그 때, 한참을 기분 좋게 웃던 약로가 드디어 웃음을 그치고 입을 열었다.
“준아. 내가 너에게 누누이 이야기 했듯이, 투기 대륙은 넓고, 강자도 그만큼 많단다. 그야말로 하늘의 별처럼 강자들이 가득하지. 운남종의 전임 종주인 운산 정도는 발에 채일 정도로 널린 것이 바로 투기대륙이지. 그리고 대륙 여기저기에는 그런 강자들이 모여 저마다 독특한 조직을 형성해왔다.”
약로는 한껏 긴장된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긴한숨과 함께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그런 세력들 중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조직 중 하나가 바로 ‘영혼의 궁전’이라는 조직이다. 투기대륙 전체에 이들의 손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지. 다만, 가한제국은 투기 대륙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니, 그들의 영향력이 비교적 적게 미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지.”
“영혼의 궁전이요? 그럼 죽음의 관문에서 느끼신 것이 혹시…”
“맞다. 그들의 기운을 느꼈지.”
약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영혼의 궁전이라는 세력은 몹시 강하면서도 비밀스럽기 짝이 없지. 그들이 어떤 명분으로,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지 아무도 모른단다. 다만…그들은 육체 없이 영혼만 살아있는 자들을 찾아내어 철저히 말살하고 있지.”
“설마…”
“그래. 나같은 존재들 말이지.”
스승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분노와 슬픔, 회한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래, 굳이 비유하자면, 영혼의 청소부랄까…육신에서 떨어져 나온 영혼들은 모두 그들의 손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당연히 나도 그들에게 쫓긴 적이 있었지. 운 좋게 그들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그 때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을 입고 말았다. 때마침 누군가에게 받은 ‘은혼납령’이라는 보물이 있어, 그것으로 네 손에 끼워진 까만 반지를 만들어 그 안에 숨어 놈들의 추적을 피한 것이지. 그 반지가 계속해서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또 거쳐 결국 네 손에 들어간 것이다.”
준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대단한 스승의 힘으로도 달아나는 것이 고작이라니…
“내가 부활을 서두르는 이유도 바로 그들 때문이란다. 물론…누군가에게 갚아야 할 빚이 좀 있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약로는 여기까지 말을 마치고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준아, 마음은 고맙지만, 네가 날 도울 필요는 없단다. 영혼의 궁전은 적으로 삼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자들이야. 날 위해 목숨을 걸지 않더라도,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을 것이니, 너는 오로지 강해지는 것만을 생각하거라. 그리고…가한제국의 영역을 벗어나면 놈들의 영향력도 점점 더 강해질테니 앞으로 내가 직접 나서기는 어려울 것 같구나. 그러니…”
“그러니, 앞으로는 제 힘으로 해쳐나가야 한다. 이 말이죠?”
준은 자신을 아끼는 스승의 마음에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끼며 환히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 말이지.”
“좋아요. 일단 강해지는게 먼저겠네요. 그래야 운남종과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아버지도 구할 수 있고, 스승님도 도울 수 있으니까요.”
자신을 생각하는 제자의 마음에 스승 역시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랜 시간 반지 안에 갇혀 어둠속에서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이 바로 이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 였구나, 그런 생각이 약로의 가슴을 스쳤다.
“녀석, 언제봐도 배짱 하나는 마음에 드는구나. 그럼 바로 가람 아카데미로 가자. 여기서 낭비할 시간이 없겠구나. 한시라도 빨리 강해져야 하니까.”
* * *
가람 아카데미의 뒷산…수풀이 우거진 산 정상에 푸른 옷을 입은 소녀 하나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소녀의 허리에 달린 보라색 끈이 바람에 날려 허공에 그림을 그려내고, 그녀의 허리 춤에 있던 작은 녹색 방울은 그 때마다 은은하게 울리며 기분 좋은 소리를 자아냈다.
그리고 소녀가 사색에 잠긴 수분 뒤…그녀의 등 뒤로 빼빼 마른 노인 하나가 나타났다. 노인은 자신의 손녀뻘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녀를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가씨.”
“아아, 오셨군요.”
소녀는 천천히 뒤를 돌아 환히 웃으며 노인을 맞이했다.
“허허허…아가씨께서 내리신 임무를 완벽히 해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가씨 손에 죽을게 겁나 돌아오지도 않았을 겝니다.”
노인의 농담에 소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아이 참, 무슨 말씀을 하시는거예요. 그럼…오라버니는 괜찮은거에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적어도 제가 떠나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나설아라는 꼬마 아이와의 승부에서도 완승을 거두셨습니다. 다만…”
세형은 잠시 머뭇거더니 이준이 운남종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을 천천히, 그리고 상세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허허, 그래도 다행인 건, 이준 도련님이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인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운산이 나타나면서 계획이 틀어진 듯했지만 메두사 여왕까지 합세하니 운산도 감히 어쩌지를 못 하더군요. 결국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운남산을 떠났습니다.”
“메두사 여왕이요?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뱀인간의 여왕을…하여간 모를 사람이야. 그보다 운산이라…운산…운남종도 참 한심하군. 가한제국 내에서만 천하무적인 것처럼 굴 뿐 사실 그렇게 대단한 강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쪽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네…”
소녀는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한번 이준의 안부를 물었다.
“어찌됐든, 오라버니는 무사한거네요?”
노인은 몇 번이나 거듭 이준의 안부를 묻는 소녀를 보며 또 다시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걱정마십시오. 무사하십니다. 사실 예전에는 왜 그런 어린 아이 하나를 그렇게 신경 쓰시나 했는데, 이번에 직접 만나보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과연 아가씨의 안목은 참으로 대단하시더군요. 아주 대단한 재능이었습니다. 이 노인네도 나름대로 견문이 넓다 자부하지만, 그만한 인물은 본 적이 없습니다.”
세형의 칭찬에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칭찬할 때 보다 이준을 칭찬할 때 더 기분이 좋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