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폭로
대로변에는 사람과 말이 가득했고, 허공에는 그들이 이동하며 일으킨 모래먼지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대열의 끝에는 깃발을 꼿꼿하게 세운 마차 한 대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마차를 몰고 있는 사내의 머리에는 먼지조차 제대로 털어내지 않은 너저분한 모자가 걸려있었고, 옷은 몇 달은 빨지 않은 듯 너덜너덜하고 허름하기 찍이없었다.
‘후…괜히 마지막 관문이 아니군. 제국안에 있는 성들은 이곳에 비하면 담장처럼 느껴질 정도야.’
허름한 옷을 입은 사내는 살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로 솟아있는 성벽을 바라보았다.
대열은 점점 성벽과 가까워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 미터도 넘는 성문이 그를 맞이했다. 성벽 상단에서는 피부를 찌를듯한 강자의 염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게다가 성벽 곳곳에는 가한제국의 국경을 지키기 위해 특수 제작된 석궁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역시 날아서 지나려고 하지 않길 잘했군…’
마침내 성벽이 코 앞에 다다르자, 말들이 발걸음을 멈췄고, 곧이어 대열을 이끌던 두 명의 사내가 말에서 내려 성문으로 향했다.
두 사내는 문지기들과 한참을 떠들며 친한 척 웃음을 짓더니 은근슬쩍 그들의 손을 붙잡았다.
용병단의 수장으로 보이는 사내와 악수를 나눈 병사는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이내 뒤를 돌아 지나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고, 그러자 굳게 닫혀있던 성문이 육중한 소리와 함께 입을 벌렸다.
“휴…”
무사히 수색을 피한 준의 얼굴에는 설핏 안도한 기색이 어렸다. 그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마차를 끄는 말의 고삐를 잡은 채 요새 안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준이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누군가의 호통 소리와 함께 갑자기 용병단 대열이 발걸음을 멈췄다.
“누구 마음대로 성문을 통과시키는거야!”
잠시 후…화려한 복장을 갖춘 병사들이 손에 창을 쥐고 나타나 성문을 막아섰고, 음침한 인상의 청년 하나가 병사들의 틈을 가르고 나와 싸늘한 눈으로 용병단의 수장을 노려봤다.
“하하, 모혁 도련님이셨군요.”
용병단의 단장은 자신을 막아선 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고는 즉시 억지 웃음을 지으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박노하, 예전 같으면 그냥 눈 감아 줬겠지만 오늘은 안 되겠어. 아버지께서 ‘죽음의 관문’을 거치는 모든 사람들을 철저히 검사하라고 하셨다.”
청년은 쌀쌀 맞은 태도로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그것을 문지기에게 건넸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이 종이에 그려진 자와 꼼꼼히 대조하고, 그 인물을 발견한다면 즉시 죽여버려라!”
그러자 백 명에 이르는 문지기들이 달려나와 한 손에 창을 든 채로 대열 안으로 들어가 수색을 시작했다.
‘젠장…’
준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하는 욕설을 목구멍 근처에서 멈춰 세우고는 연신 눈알을 굴려댔다.
창을 든 병사들은 가족을 죽인 원수라도 찾는 마냥 용병 하나하나의 얼굴을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보며 조금이라도 그림과 비슷한 자가 있으면 즉시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내 그를 둘러싸고 한참을 확인한 뒤에서야 통행을 허가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모혁’이라고 불리던 사내가 뒷짐을 진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입을 여는 순간, 준은 등줄기에서 비오듯이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얼굴을 닦도록!”
……
“너는 고개를 들어라.”
잠시 후, 모혁의 싸늘한 목소리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 마차로 쏠렸다.
먼지로 뿌옇게 뒤덮인 회색 옷을 입은 마부는 모혁의 말에 따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부와 모혁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목구멍에서 반사적으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잡아라! 이준…! 어억…!”
하지만 말을 마치기도 전에 허름한 옷을 입은 마부의 일격이 그의 가슴팍을 가격했고, 모혁은 새빨간 피를 뿜으며 병사들 틈으로 달려갔다.
“쳇…!”
준은 피를 토하는 모혁을 쫓아가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 했지만, 발을 떼기도 전에 수 십개의 날카로운 창끝이 그를 향했다.
“이준? 운남종에서 투왕 운령을 죽였다는 그 이준?”
갑작스레 벌어진 소동에 용병단원 중 하나가 소리를 치고, 곧이어 수 백개의 눈동자가 거지같은 옷차림을 한 마부를 향했다.
‘망했군.’
‘운남종’과 ‘이준’이라는 말에 용병들의 눈빛이 탐욕으로 빛났다.
“이준, 우리 죽음의 관문에는 3만의 병사가 있다! 어디…달아나려면…쿨럭! 달아나 보시지!”
그 새 병사들 틈으로 달아낸 모혁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준을 노려보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모혁, 죽음의 관문의 병력은 가한 제국의 황실의 소유인 걸로 알고 있는데, 언제부터 그들이 운남종의 개 노릇을 하게 된 거지? 이 얘기가 황실 귀에 흘러 들어간다면 너는 물론이고 네 부친도 무사하지 못 할텐데?”
준은 애써 태연한 척 여유로운 표정으로 모혁을 바라봤다.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죽음의 관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물론이고 3격 무투기와 운남종의 제자가 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용병들까지 굶주린 늑대마냥 자신을 습격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하, 간사한 혀를 가진 놈이군!”
그 때, 은색 갑옷으로 무장한 중년의 사내 하나가 성큼 앞으로 걸어 나오며 준의 말허리를 잘랐다.
“나는 죽음의 관문의 책임자, 가한제국 국경수비대 3여단의 부 여단장 모성원이다. 네 놈은 지금 우리 성에 무단으로 침입해 모혁에게 상해까지 입혔으니 우린 제국의 군법에 따라 네 놈을 수감할 권리가 있다.”
“모성원?”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수 만의 병사로도 모자라 투령급 강자라는 모성원까지.
‘2~3성 투령인가?’
준은 순간적으로 탐지 능력을 활용해 모성원의 힘을 가늠해본 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놈을 잡아!”
다음 순간, 모성원의 성난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성벽 통로를 가로 막고 있던 수 백 명의 무장한 병사들이 모두 달려와 이준을 에워쌌다.
‘정면 돌파 밖에 답이 없겠군…’
준은 바늘로 찌르는 듯 자신의 전신을 찔러대는 날카로운 살기에 즉시 저장반지에서 검은 송곳을 꺼내들었다.
“죽여!”
무기를 손에 든 이준을 보고 모성원은 음험한 웃음을 흘렸다. 운산의 말에 따르면, 며칠 전 운남종에서 큰 부상을 입었다고 했으니, 손쉽게 그를 잡을 수 있을거라 생각한 것이다.
“멈춰!”
하지만 병사들이 그의 명에 따라 막 이준을 공격을 개시하려던 찰나, 갑자기 성문 쪽에서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모성원! 나의 ‘은갑 부대’는 황실의 국경 수비대지, 운남종의 병사가 아니다. 운남종의 일에 감히 내 병사를 동원해?”
“문철 여단장님…”
여단장의 갑작스런 등장에 모성원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은갑 부대! 당장 철수하라!”
“네!”
문철의 한마디에 준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성문의 통로로 돌아갔다. 문철은 병사들이 자신의 명에 따라 퇴각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가 이준인가? 하하, 대담하군. 맘에 들어! 운남종을 이렇게 쩔쩔매게 만들다니 말이야! 자네에게 아주 좋은 차를 한잔 대접하고 싶은데, 어떤가?”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위기가 끝나자, 준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하, 감사합니다.”
“고마워 할 필요 없네. 나는 내 할 일을 할 뿐이니까. 황실에서 운남종의 수배령에 협조하게 된다면 당장 자네를 잡아야 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들에 협조할 이유가 없지.”
말을 하던 문철은 싱긋 웃으며 모성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녀석에게서만 벗어나면 자네 앞길을 막을 사람은 없을 걸세.”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준은 고개를 숙여 문철에게 감사를 표한 뒤 모성원을 바라봤다.
“부 여단장님, 절 운남종에 데려가고 싶으시다면 직접 손을 쓰시지요.”
“건방진 놈이…!”
병사들이 물러가자마자 준이 자신을 정면으로 도발하자, 모성원의 눈에 핏대가 섰다.
* * *
모성원이 살기를 풍기며 준에게로 성큼 다가서자, 성문 앞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못 박힌 듯 둘 사이에 머물렀다.
이준, 명성만 알려졌지, 실제로 그의 실력을 본 자는 많지 않았기에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무려 17살 짜리 대투사다.
게다가 이미 가한제국내에 제법 명성을 떨친 운남종의 대장로 운령을 살해한…투사라면 이준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준은 모성원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위압감에 온 몸의 털이 빳빳하게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아아, 부 여단장이 직접 나서겠다면 말릴 수 없지. 단, 국경 요새의 책임자로써 내가 두 사람의 대결에 대한 규칙을 정하겠다.”
문철은 눈에 핏대를 세우고 준을 노려보는 모성원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갑자기 그들 주위에 동그랗게 원을 그렸다.
“자자, 두 사람 모두 실력이 대단하니 괜히 주변에 피해를 줄 것 같아서 말이야. 이 원을 벗어나는 사람이 지는걸로 하지. 또, 생사를 건 싸움은 하지 말 것. 어찌됐든 부 여단장은 우리 국경 지대에서 나 다음으로 책임이 큰 자니까, 죽으면 아주 곤란해진다고.”
여단장의 말에 모성원의 눈에 더욱 핏발이 섰다. ‘생사를 건 싸움은 하지 말 것’이라고 말해놓고 부 여단장이 죽으면 곤란해진다니, 이것은 명백하게 자신에 대한 조롱이었다.
“흥.”
다음 순간, 모성원의 몸에서 염력이 흘러나오며 그의 몸을 빠르게 뒤덮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누가 위인지 보여주겠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문철은 부 여단장의 그런 반응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자네도 절대 만만하게 생각하지 말게. 우리 부 여단장은 3격 흙속성의 염력 수련법을 익힌 자니까. 뭐…정확한 실력은 나도 모르네만.”
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검은 송곳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바로 그 때, 약로의 목소리가 그의 머리 안에 울려퍼졌다.
“내게 맡기거라. 너무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최대한 빨리 가한제국을 뜨는 것이 급선무야.”
약로의 말에 준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기회에 ‘천계의 불꽃’을 연습해보고 싶었지만, 스승의 말이 옳았다.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는 것이다.
한편, 자신을 무시하고 멍하니 뭔가 생각하는 듯한 준의 행동에 모성원의 몸에서는 점점 더 격렬하게 노란 염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몸을 뒤덮었던 노란 빛이 사라지자,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색 염력 갑옷이 만들어졌고, 손에는 날카로운 붉은 검이 들려있었다.
쉬익-
바로 다음 순간, 모성원의 손에 들린 붉은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준의 귓등을 파고 들었다.
“대단하군…저 정도라면 4성 투령이라도 받아내기 쉽지 않겠어.”
하지만 문철이 무시무시한 붉은 검의 위력에 감탄하는 사이, 갑자기 준의 몸에서 폭발적인 염력이 쏟아져 나왔다.
‘이준?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어떻게 대투사가 이런 힘을…!’
공기가 갈라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준이 서서히 눈을 뜨자, 청색과 백색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챙!
다음 순간, 새빨갛게 불타오르는 장검과 검은 송곳이 맞부딪히며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투령 계급의 모성원이 전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투사에 불과한 준의 몸은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 장면을 바라보던 병사들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만일 모성원의 명대로 준을 덮쳤더라면…하는 상상을 하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