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혼돈의 성
성 안으로 들어간 준은 쏟아지는 인파들 사이로 슬쩍 끼어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염병…’
성안에도 곳곳에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수배지가 붙어 있었다. 더욱 나쁜 것은, 제법 많은 사람들이 3격 염력 수련법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혹해 그 수배지를 보며 눈을 빛내고 있다는 것 이었다.
준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감추기 위해 망토에 달린 모자를 더욱 눌러쓰는 순간, 갑자기 약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한제국을 가능한 빨리 떠나는 게 좋겠다. 가한제국내에 있는 이상 어딜가도 운남종의 손아귀를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구나. ”
이준은 씁쓸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이번에 떠난다면 적어도 운산에 대적할만한 실력을 갖추기 전까지는 가한제국에 발을 들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투종이라…얼마나 걸릴지…하하…10년? 아니, 20년?’
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표정을 짓자, 약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낙담하지 말거라. 너는 지난 3년간 언제나 내 기대를 뛰어넘는 성장을 보여왔다. 게다가 내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지금에 이르렀어. 너라면 반드시 운남종을 꺾을 수 있을게다. 그렇게만 된다면 가한제국은 물론이고 투기대륙의 모든 이들이 네 이름을 알게 되겠지.”
스승의 진심어린 칭찬에 준은 뭔가 갑자기 자신감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약로의 말대로, 지금까지의 성장은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의 것 이었다.
그리고 스승과 함께 더 경험을 쌓는다면, 멀지 않은 시일내에 투기대륙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그럼 일단 천지의 불꽃을 모아야겠죠? ‘불개’ 도 진화시켜야 하고, ‘천계의 불꽃’을 통해 승급을 하려면 어찌됐든 천지의 불꽃이 더 필요하니까요.”
약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지금 준의 성장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천지의 불꽃’이었다.
“그리고 스승님이 부활하시기 위해서도…천지의 불꽃은 꼭 필요하니까요. 여러모로 천지의 불꽃을 모을 이유가 늘어나네요.”
‘부활’이라는 말에 순간 약로의 영혼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언제나 온화하고 침착하던 약로의 격렬한 반응에 준은 문득 약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난 3년간 약로는 오로지 자신의 실력을 키워주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건만, 자기는 나설아의 문제가 해결되고도 한참이나 스승의 문제를 등한시했던 것이다.
격렬하게 흔들리던 약로의 영혼의 파동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잦아들었고, 평정을 찾은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온화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허허…그렇지. 네가 ‘불개’를 완전히 진화시킨다면 천지의 불꽃을 융합해 내 영혼을 담을 수 있는 신체를 만들 수 있게 될게다.”
약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리자, 준은 더욱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육체가 없이 반지안에 갇힌 삶이라니…생각해보니 지금까지 그런 삶이 얼마나 괴로울지 상상해봤던 적 조차 없었다.
준은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에 끼워진 까만 반지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3년 내내 스승님에게 신세를 져놓고, 한 번도 진심으로 스승님이 얼마나 괴로울지를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것 같네요.”
“하하, 이 녀석, 어째 갑자기 이렇게 철이 든 게냐. 너답지 않구나.”
제자의 진지한 표정에 마음이 뭉클해졌는지 노인은 이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스승님이 지금까지 절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해주셨는데…너무 늦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 죄송합니다. 꼭…꼭 스승님을 부활시켜 드릴게요. 이제 제 여행의 목표는 투종이 되어서 스승님을 부활시키는 게 될 거예요.”
“하하하! 그런 마음을 가져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반지에 갇힌 채로도 이런 제자를 길러내다니, 내가 아주 운이 좋구나.”
약로가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그제서야 준의 얼굴에도 조금 안도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 맞아요, 스승님. 혹시 스승님의 육체를 만들기 위해서 몇 개의 천지의 불꽃이 필요한지 알 수 있을까요?”
“음, 아마 세 개일테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불개’는 워낙 신비로운 수련법이니, 나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단다.”
“세 개라…지금 제가 대지의 불꽃을 갖고 있고 스승님의 얼음불꽃의 정수를 조금 쓸 수 있으니, 앞으로 하나만 더 모으면 시도해볼 수가 있다는 의미네요?”
“아마도 그럴게다. 부활하게 된다면 처음에는 조금의 적응 기간이 필요하겠지만…새로운 신체에 완벽히 적응하게 된다면 아마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겠지.”
약로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어느 정도나 될까요?”
준은 그동안 언제나 궁금했던 약로의 진짜 실력에 대해 다시금 호기심이 이는 것을 느꼈다.
“허허, 운산 정도는 아주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을 정도지.”
약로의 목소리에는 수 많은 시련을 극복해낸 진정한 강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정말 대단하네요…그럼 하루라도 빨리 나머지 천지의 불꽃을 찾아야겠어요. 가람 아카데미에 있을지도 모른다던 그 불꽃의 이름이 뭐였죠?”
“구름의 불꽃.”
약로가 피식 웃으며 불꽃의 이름을 말하자, 준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목표가 확실해진 것이다.
“그럼 어서 구름의 불꽃을 찾으러 가죠. 더 이상 가한제국에서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약로는 손을 들어 준을 말렸다.
“일단 기다려보거라. 가람아카데미는 수 많은 세력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어서 아주 혼란한 곳이니, 그곳으로 가려면 나름대로 준비가 필요하다. 네 저장반지에 있던 물건들은 대부분 다 써버렸으니, 떠나기 전에 먼저 필요한 물건들을 좀 구하자꾸나.”
준은 그제서야 자신의 저장반지가 텅 비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기력의 조각이나 상처 치유약 같은 필수적인 연금비약조차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일단 경매장에 가서 약재를 사야겠어요. 그 후에 제국을 벗어날 동선을 좀 알아보도록 하죠. 약재를 사는 김에 이쪽에 있는 관리자 중 몇 명이나 운남종 사람인지도 알아봐야겠어요.”
“그래. 조심하거라. 절대 신분이 노출 되어선 안 된다.”
약로와 대화를 마친 준은 곧바로 경매장을 향해 발을 돌렸다. 시장 한켠에는 유씨 가문의 경매장이 자리하고 있었고, 안으로 들어서자 ‘귀빈실’이 눈에 들어왔다.
준은 즉시 저장반지에서 유천이 선물해준 최고 등급의 귀빈 카드를 들고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유천의 말에 따르면, 이 카드만 있다면 유씨 가문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 어디에서든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
약 30분 후…
‘이야…이 카드 한 장만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겠군.’
준은 귀빈실 밖으로 나오며 자기도 모르게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불과 30분 만에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약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필요한 물건을 모두 손에 넣은 준은 달빛성을 벗어나 외진 숲으로 들어가 연금비약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 * *
사흘 후, 달빛성 외곽의 숲에서 까만 망토를 입은 사내 하나가 걸어나왔다. 그는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대로를 따라 걷고 있는 사람들을 흘끔흘끔 바라보며 남쪽으로 향했다.
‘흠…이 길을 통하면 국경으로 바로 갈 수는 있지만…가는 길에 경비 구역이 세 개나 있다고 했지? 게다가 마지막 하나의 부대는 운남종의 전임 장로가 통솔하고 있으니 피하는 편이 좋겠어.’
준은 유씨 가문의 경매장에서 제공받은 정보를 되뇌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경매장 관리자의 말에 따르면 국경에 가장 가까운 부대의 부 여단장인 ‘모성원’은 운남종의 장로 출신으로, 투령 계급의 강자라고 했으니 그쪽을 통과하는 것은 사실 그다지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운산도 바보가 아니니 이미 그쪽에도 다 손을 써놨겠지. 어쩌면 그 모성원이라는 자가 이미 조치를 취해뒀을지도 모르겠어…’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렇다고 날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한제국에서는 경비 구역 상공에서의 비행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허가 없이 경비지역 내에서 비행을 하게 되면 그 즉시 공격을 받게 된다.
‘후…결국 걸어가는 수 밖에 없군.’
* * *
준은 꼬박 3일에 걸쳐 두 개의 요새를 지났다. 다행히도 앞에 있는 두 곳의 경비구역은 운남종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지 그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알아보지 못한 것이든, 알아보았어도 딱히 운남종과 자신 사이에 벌어진 일에 대해 개입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든, 준의 입장에서는 순조롭게 요새를 통과할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니 큰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요새는 이야기가 달랐다.
준은 마른 침을 삼키며 마지막 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그리고 두 번째 요새를 지나 이틀, 마침내 마지막 관문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준은 높은 언덕에 멈춰서서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만큼 거대한 성벽을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바라봤다.
성의 안쪽에서는 훈련이 한창인지 병사들의 기합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오고 있었다.
* * *
흙먼지로 뒤덮인 길바닥에는 넉넉잡아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대열을 맞춰 달려가고 있었다.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의 복장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모두 같은 용병단 소속의 용병인 듯 했다.
요새의 동쪽에는 작은 성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곳은 투기 대륙의 특수 구역으로 불리우는 ‘흑각성’이었다.
‘흑각성’은 투기 대륙 전체에서 가장 혼란스럽기로 유명한 지역으로, 그 지형적 특수성으로 인해 각 나라의 무수히 많은 도망자들이 흘러들어오는, 그야말로 ‘도망자의 안식처’였다.
각국의 범죄자들이 몰려드는 곳이니만큼 강도, 약탈, 살인이 횡행하는 것이 당연했다. 범죄자들 사이에서는 매일 같이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이곳에서는 오로지 더 강한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한다는 것만이 유일한 법이 되어 있었다.
또 한 가지, 흑각성은 투기 대륙 전체의 ‘정보통’ 역할을 한다는 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매일 같이 각국에서 흘러나온 뜬소문부터 은밀한 비밀정보까지 온갖 종류의 정보가 가득한 것이 바로 이 ‘흑각성’이었다. 그리고 이 혼돈으로 가득한 성내에 떠도는 정보 중에는 고급 염력 수련법이나 무투기, 비술, 전설의 무기나 연금술 도구, 귀한 약재, 희귀한 연금비약의 조합표에 관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매일 같이 살인이 벌어지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투사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물론, 고급 정보나 좋은 물건들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 대가는 돈일 수도 있고, 또는 다른 물건일수도 있다. 힘에 자신이 있다면, 힘으로 뺏는 것도 가능했다. 다만…대륙 전체에서 흉악하기로 이름 높은 범죄자들이 가득한 도시이니만큼 힘으로 뺏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실력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도망자의 안식처’, ‘범죄의 성’, ‘약육강식의 성’, ‘혼돈의 성’, ‘죽음의 성’, ‘모험자의 성’…흑각성을 일컫는 별명만도 수 십개에 달했다.
그리고 이 무시무시한 ‘흑각성’을 지나면 그곳이 바로 준의 목적지인 ‘가람 아카데미’ 였다.
가람 아카데미는 흑각 성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특수 구역’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분위기 역시 완전히 딴판이었다.
물론 ‘혼돈의 성‘이라고 불리는 흑각 성과 인접해 있으면서도 그런 질서 정연한 분위기가 유지되는 것은, 오로지 가람 아카데미가 이 범죄의 성을 아득히 넘어서는 압도적인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