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달빛성
한편, 숲속에 있던 준은 자신의 몸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빛에 얼굴이 새파래져 하늘을 바라봤다.
“빌어먹을…”
준은 즉시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올랐다. 지금까지는 위치가 발각될 까봐 숲으로 숨어 다녔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숲으로 다니든, 하늘로 다니든, 온 몸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빛이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이놈! 오늘 밤 네놈의 사지를 찢어 운남종 제자들의 넋을 기려주마!”
별처럼 반짝거리는 소년이 날아오르자, 그 즉시 장로들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준아! 최대한 버텨보거라, 율희가 네 몸속에 있던 염력을 폭발 시킨 것 같구나, 시간을 조금만 벌어보거라! 그럼 내가 어떻게든 해보마!”
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뒤를 바짝 쫓아오는 세 갈래의 빛을 바라봤다.
‘우선 거리를 벌려야 해.’
이를 악물고 염력을 쥐어짜내 매의 날개에 주입하자, 검보랏빛 날개에서 선명한 보라색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놈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준의 뒤를 쫓던 장로들은 갑작스레 상승한 준의 비행속도에 깜짝 놀라 더욱 속도를 높였다.
“종주님이 발동시킨 빛이 점점 흐려지고 있다! 운혁, 운종! 어서 녀석을 쫓아라!”
세 장로 중 가장 연로해보이는 사내가 명을 내리자, 그들의 염력 날개가 더욱 커지며 속도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등 뒤에서 들려오는 고막을 찢을듯한 바람 소리에 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미 운남종의 세 장로와 그의 거리는 수십미터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 보아도 대책이 없었다.
“젠장…”
다음 순간, 준은 방향을 틀어 다시 숲으로 향했다.
촤악-
그리고 빽빽이 무성한 나뭇가지와 잎들이 이준의 얼굴을 스치는 순간, 갑자기 수풀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이, 이런! 함정인가!’
……
“이준! 진정해!”
수풀에서 튀어나온 그림자가 준의 입을 틀어막은 뒤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주희 누나…?”
주희라니, 순간적으로 죽음을 직감했던 준은 긴장이 풀린 나머지 자리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여…여긴 왜 온거야! 어서 도망가!”
“쉿, 조용히 해. 운남종의 장로들은 동해 선생님께서 붙잡고 계실거야. 자, 이거 받아. 천둥산의 지도야. 선생님이 주셨어. 이걸 가지고 어서 가한제국을 떠나. 자, 이쪽 방향이야. 이쪽 방향으로 나가서 그들의 영역권 밖으로 벗어나. 그럼 아무리 운남종이라도 널 쉽게 찾지는 못 할거야.”
주희는 저장반지에서 지도 하나를 꺼내 이준의 손에 쥐어 주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두 사람…”
준은 자신의 가슴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운남종의 영역까지 쫓아와 자신을 구하려 하다니, 두 사람이, 아니 그 누구라도 자신을 위해 이런 큰 위험을 감수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했었다.
“누, 누나…”
“어서 가!”
“고마워! 오늘 일, 절대로 잊지 않을게 언젠가 꼭…”
“됐으니까 어서 가! 계산은 나중에 하고!”
주희는 눈물을 그렁이며 인사를 하는 준의 등을 떠밀며 그를 재촉했다.
“빨리 가 이제!”
“동해 선배에게도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다고 전해줘!”
준은 그 말을 끝으로 어둠속으로 사라졌고, 주희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자식…기다리고 있을게. 다음번에 돌아올 때는 또 얼마나 나를 놀래켜줄지 기대하면서 말이야.”
“저쪽에 이준이 있다, 비행 부대는 빨리 내려가서 잡아!”
그 때, 상공에서 운남종 장로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고, 곧바로 주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그림자 부대, 놈들을 막아!”
……
준은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요란스러운 쇳소리에 주먹을 불끈쥐고는 저장반지 안으로 지도를 집어넣었다.
타악-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진율희…!”
준과 율희는 아무 말 없이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봤다.
“후…”
그리고 운남종의 종주가 착잡한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자, 이준의 손에 검은 송곳이 나타났다.
“미안해.”
그렇게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율희의 입에서 나온 것은 사과의 말이었다. 하지만 준은 아무런 말없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볼 뿐 이었다.
율희는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내쉰 뒤 준을 설득하려는 듯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후…일단은 나랑 가자. 스승님은 널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야.”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건 운남종의 전통인가보군.”
그러나 이번에 돌아온 것은 침묵이 아니라 적의가 가득한 시선과 가시돋힌 말 이었다.
“그게 아니야. 이준, 내 말을…”
“하하, 그래? 그럼 그냥 평생 가둬두려나? 목숨만 붙여놓고?”
“아니야, 내 말을 좀 들어봐. 네가 같이 돌아가주기만 한다면 내가 책임지고 네 안전을 보장해줄게. 난 운남종의 종주야 그러니…”
“호오…그래? 그럼 운남종 종주의 권한으로 그냥 날 놔주지 그랬어.”
그녀는 준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번 돌아오는 것은 혐오 섞인 표정과 비아냥 뿐이었다.
“정말 이럴 거야?”
“시끄러워. 내가 살아있는 한 운남종에 가는 일은 없으니까. 네 선택은 둘 중 하나야. 날 죽여서 시체를 끌고 가든지, 아니면 이대로 날 놔두든지.”
말을 하는 동시에 준의 몸에서 염력이 흘러나와 천천히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는 어떠한 말보다도 더 확실한 의사표현이었다. 이 자리에서 싸우다 죽을지언정, 결코 그녀를 따라 갈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정말 안되겠어?”
율희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지만, 이번에도 준의 대답은 같았다.
“같이 가려거든 내 시체를 데려가.”
준 역시 바보가 아니니 율희와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은 칠색 이무기를 꺼내 시간을 버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운남종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결국 준이 발걸음을 옮기며 소매에서 칠색 이무기를 꺼내들려는 순간, 놀랍게도 율희가 뒷걸음질을 시작했고, 심지어 준의 몸속에 있던 운산의 염력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게…무슨 뜻이지?”
“가. 가한제국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마. 그렇지 않으면 스승님이 널 가만두지 않으실 거야. 운남종도 그렇고…”
율희는 손을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갈등과 괴로움이 가득했다.
“왜…”
“시끄러워. 꺼져버려.”
순간 둘 사이에 깊은 정적이 흘렀다.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준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달아나는 것도 잊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꺼지라고. 마음 바뀌기 전에…빌어먹을 자식…대신 절대로 돌아오지 마. 우리 사이의 은원은 정말로 이걸로 끝이야. 난 지금 네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괴로운 결정을 내린 거니까. 목숨을 살려준 빚은…이걸로 다 청산된 거야. 만에 하나라도 네가 가한제국에 다시 돌아온다면, 그 때는 내가 앞장서서 널 잡으러 갈거야. 그게 운남종 종주로써의 내 책임이니까.”
다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준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준은 곧바로 떠나지 않고 또 다시 발걸음을 멈춰 섰다.
“고마워. 그런데, 언젠가는 꼭 돌아올거야.”
“뭐? 너!”
“하하,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언제가 될지는 나도 모르니까. 혹시 알아? 너무 오래 걸려서 그 사이 운남종의 장로들이랑 운산이 다 죽어버릴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해맑게 웃는 준을 보자, 율희의 얼굴에도 순간 웃음이 번졌다.
“이 자식이 정말…”
“아아, 됐어.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도망가야겠다. 운산에게 꼭 전해줘. 혹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살아있으면 그 때는 꼭 빚을 갚아주겠다고!”
근 한 달에 가까운 행군으로 인해 준의 몸은 물먹은 솜 마냥 무거웠다. 칠색 이무기 덕에 하급 마수들은 감히 그의 근처에도 다가오지 못했지만, 천둥산에는 그보다 훨씬 강력한 마수들도 많았기 때문에, 결국 준은 한달 내내 사냥개에게 쫓기는 토끼마냥 온 신경이 곤두선채로 지내야 했다.
하지만 칠색 이무기와 함께 투왕급 마수들과 싸워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실력이 올라갔고, 이제는 4성 대투사를 넘어 5성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약로의 영혼 에너지가 거의 완벽하게 회복될 것이니, 준의 마음은 갈수록 안정을 찾고 있었다. 어떤 위기가 찾아와도 약로의 상태만 정상이라면 어떻게든 해쳐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바로 비술인 ‘천계의 불꽃’을 얻은 것 이었다. 물론 비술을 익히기에는 시간도, 실력도 부족해 아직 익히지는 못 했지만, 일단 급한 상황을 벗어나고 비술을 익히는데 성공한다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운남종의 추격을 피해 도망 다니는 과정에서 얻은 소득들을 생각하자, 준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목숨이 위태로운 과정에서도 자신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으니, 아버지를 찾고 운남종에게 복수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물론, 이는 조금 더 먼 훗날의 일이 될 것이다. 지금 상태로는 약로의 도움이 있다해도 운남종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하지만 그는 어렸고, 아직 남은 시간은 많았다. 준은 3년 만에 나설아에게 자신이 받은 수모를 되돌려주었듯이, 운남종에게도 그리 할 날이 곧 올 것이라고 믿었다.
* * *
성문이 가까워지자, 준은 입구를 지나려는 대열에 슬쩍 합류해 주위를 살폈다.
‘이런…’
그는 성문 앞에 붙어있는 그림 두 장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림에 그려진 얼굴은 하나는 자신의 얼굴이었고, 하나는 ‘임현’의 얼굴이었다.
‘나 하나 잡자고 정말 갖은 애를 다 쓰는군.’
게다가 성문을 지키는 호위병들은 그 그림과 성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대조하며 신원을 확인하고 있었다.
‘황실도 운남종을 돕는건가? 운남종과는 관계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의외군. 지금 여기서 운남종에게 협조하면 나와는 완전히 틀어진다는 것을 잘 알텐데…아니면 나를 적으로 돌리고 운남종과의 관계를 회복하는걸 택했을지도 모르겠군…뭐, 그들 입장에서야 운남종과 나를 저울질하면 운남종이 더 중요할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가철도 의외로 머리가 안 돌아가는 사람이군. 겨우 이런 일로 운남종이 황실의 밑으로 들어갈리는 없을텐데 말이야. ’
그렇게 준이 황실의 속내를 가늠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앞에 서있던 사내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문성태, 이 망할 개자식. 아주 살판 났군. 달빛성이 완전히 자기 수중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쳇, 이준이란 놈이 와서 그 놈을 박살내줬으면 좋겠구만.”
그러자, 그의 곁에 서있던 사내가 누가 듣지는 않았을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며 그를 말렸다.
“쉿. 목소리 좀 낮춰. 문성태도 운남종 출신이라고.”
“퉤! 황실 놈이 황실 일이나 똑바로 할 것 이지, 왜 운남종 편을 드냐고.”
사내는 여전히 침을 뱉으며 짜증을 냈지만, 그의 목소리는 확연히 줄어들어 있었다. 보아하니 문성태란 사내가 두렵기는 두려운 모양이었다.
‘어쩐지. 운남종 사람이었군…’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이준은 그제서야 왜 황실이 운남종에 협조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러니 황실이 운남종을 경계하는거로군. 내부에도 황실의 입장보다 운남종의 입장을 우선시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경계할만 하겠어.’
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무사히 입구를 통과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준은 조용히 대열에서 빠져나와 성벽의 외진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성벽을 따라 조금 걷다보니 곯아떨어진 순찰병 하나가 눈에 들어왔고, 그는 즉시 날개를 펴 성벽을 훌쩍 뛰어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