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폭사
한편, 운남종의 추격대는 어느 새 준이 머무르던 동굴 맞은편까지 도달해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요…둘째 사형, 정말 이곳에서 선대 종주님의 염력을 느끼신게 맞습니까?”
“흐음…워낙 희미해서…일단 이 앞의 동굴로 들어가보세. 어떤 마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만일에 대비해 바람 속성을 가진 사형들이 먼저 들어가보는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의 명대로, 이준이라는 꼬마를 만나더라도 절대로 섣불리 싸워서는 안되네. 시간을 벌고, 장로님들에게 최대한 빨리 연락을 취할 것. 그게 우선이야.”
“예!”
* * *
푸른 빛이 가득한 숲 속에서는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다람쥐 마냥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며 빠르게 천둥산의 중심부로 향하고 있었다.
“마수들이 운남종 놈들의 발목을 잡아 이동속도가 더디구나. 잘만하면 밤이 되기 전까지 놈들을 따돌릴 수 있겠어.”
약로의 말에 준은 더더욱 속도를 높였다. 곧 있으면 천둥산의 경계 지역이니, 일단 그곳만 벗어나면 한숨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빼곡하게 우거진 나뭇가지들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는 천둥산의 산역이 끝나간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준이 숲 밖으로 몸을 날리는 순간, 약로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조심해!”
숲 밖으로 몸을 날리던 준은 갑작스런 스승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방향을 틀어 옆에 있던 수풀로 기어 들어갔다.
수풀 속에서 고개를 들자, 허공 위에 거대한 마수가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젠장. 운남종 놈들이 저런 대형 비행 마수까지 데리고 있을 줄이야!’
준은 물론이고, 약로조차 상상하지 못 한 사태였다.
“이런…상상 이상이구나. 이놈들이 정말 마음을 단단히 먹은 모양이다. 이런 수단까지 동원하다니…미안하구나. 마수의 기운에 의해 놈들의 기척이 가려져 있었어. 이걸 감지하지 못 하다니…내 실수다.”
“괜찮아요 스승님. 그래도 명색이 운남종인데, 이렇게 호락호락하게 내보내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저 정도 인원으로는 절 붙잡을 수 없어요.”
하지만 준의 목소리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수의 등 뒤에 타고 있는 운남종의 제자들 중 가장 강한 자는 2성 대투사 정도였으니, 지금의 자신이라면 그들을 뿌리치고 달아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심하거라. 쓸데없는 전투는 최대한 피하고. 여기서 시간을 끌면 뒤에 있는 놈들도 가세할게다.”
스승의 충고에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 앞을 날아다니는 거대한 비행 마수들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마수들은 각각 두 명의 운남종 제자들을 등에 태운 채 끊임없이 상공을 배회하고 있었고, 그 위에 올라탄 열 명의 제자들은 모두 준이 있는 수풀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르신, 아래에 있는 저 사람…이준이 확실한 것 같은데, 어찌할까요?”
“우선 신호탄부터 쏘거라.”
“장로님들께서 오시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이준 저 녀석을 붙잡아 놔야 한다. 선대님께서 이준의 부상이 적지 않아 간신히 도망치더라도 큰 힘을 쓸 수는 없을 거라고 하셨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리고 선대님께서 저놈을 잡는 자에게는 상급 제자직과, 3격 무투기를 포상으로 내릴 것을 약속하셨다. 모두들 최선을 다하도록!”
열 명 중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을 통솔하는 것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말을 마치자, 그 즉시 아홉 중 하나가 공중으로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탕!
신호탄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하늘을 수놓았고, 그와 동시에 준이 몸을 움직였다.
“흥, 어딜 도망 가!”
중년의 사내는 풀숲이 흔들리는 것을 보자마자 고함 소리와 함께 손에 든 장검을 휘둘렀다
쉬이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푸른 염력이 바람을 가르는 순간, 준은 재빨리 발을 굴러 수풀 속으로 다시 몸을 감췄다.
사내는 상대가 자신의 공격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달아나자, 준의 상처가 심상치 않다고 확신하고는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조심해!”
“아악!”
영롱하게 빛나는 일곱 빛깔의 액체가 비행 마수 한 마리를 덮쳤고, 순식간에 거대한 마수의 몸체가 녹아내려 백골이 되었다.
갑작스레 펼쳐진 처참한 살육의 현장에 운남종의 제자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공포에 질린 제자들이 임무를 잊고 달아나는데는 1초의 시간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이성을 잃은 운남종의 젊은 제자들이 향한 곳은 어리석게도 지상이었다.
“이 멍청이들아! 아래쪽에는…!”
그리고 사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숲속에서 검보랏빛 날개를 펄럭이는 사신이 나타났다. 사신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품을 향해 뛰어드는 운남종의 제자들을 향해 검은 송곳을 휘둘렀고, 이내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세 마리의 비행 마수가 피를 흘리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으아아아악!”
거대한 마수가 살해당하자, 그 위에 올라있던 여섯 명의 입에서 일제히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사신은 그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즉시 날개를 펄럭여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곳에서 잔챙이를 잡느라 시간을 낭비했다가는 뒤에서 자신을 쫓는 추격대가 합류하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검보랏빛 날개의 사신은 이내 하나의 점이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명의 장로가 날개를 펄럭이며 처참한 살육의 현장으로 달려왔다.
“민석! 놈은 어디 있느냐! 제자들은!”
세 명의 장로들은 홀로남은 중년의 사내를 발견하자마자 다그치듯 적의 행방을 물었다.
그리고 중년 남성이 입을 떼려던 그 순간…
펑!
끔찍한 폭음과 함께 마수 위에 서있던 민석의 몸이 산산조각나며 역한 냄새를 풍기는 살덩이와 핏방울이 허공을 수놓았다.
곧이어 만석을 싣고 있던 마수의 몸에서도 똑같은 폭음이 울렸고, 눈앞에서 벌어진 끔찍한 참상에 세 장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네 이놈! 이준! 오늘 하늘이 두쪽이 나더라도 네놈을 잡아 사지를 잘라내고 말겠다!”
빽빽하게 들어 찬 나무들 사이로 드문드문 햇빛이 드리우고, 이따금씩 거대한 비행 마수의 그림자가 태양을 가리면서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던 작은 햇볕마저 사라져 숲에는 온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빌어먹을…완전 작정했군.”
준은 하늘에서 살기 등등한 표정으로 자신을 찾고 있는 세 명의 투왕을 발견하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아무래도 저자들은 네 몸속에 남아있는 운산의 염력을 아주 잘 느낄 수 있는 모양이다. 투왕 정도되니 탐지 능력이 제법이구나. 정확한 위치까지는 몰라도, 대략적인 위치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 그리고 저 세 놈을 중심으로 큰 원을 만들어서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으니…이건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겠구나.”
“그럼 어쩌죠? 포위망이 점점 작아지면 언젠간 독 안에 든 쥐가 될 텐데.”
상황이 좋지 않다는 약로의 말에 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연신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흐음…안되겠구나. 운산이 남긴 표식을 없애지 않는 한 아무리 달아나도 소용이 없겠어. 우선 널 뒤쫓는 저 투왕 세 놈만 잘 피해보거라. 운산이 남긴 표식을 없애려면 우선 네 염력을 한번 폭발시켜야 하지만, 거리가 충분히 벌어지지 않으면 그야말로 적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꼴이니, 일단 거리를 벌리는게 급선무다.”
“으음…알겠습니다. 일단 시간을 끌어볼게요. 그래도 밤이 되면 조금 더 도망가기가 수월해질테니까요.”
“그래, 그게 좋겠구나.”
일단 계획이 세워지자, 준은 즉시 나뭇가지를 잡고는 반동을 이용해 반대방향으로 쏜살같이 몸을 날렸다.
……
준이 반대 방향으로 이동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운남종의 장로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런…놈이 도망치는 것 같습니다. 선대님이 남겨놓은 표식이 점점 멀어지고 있어요.”
“흥, 그렇게 쉽게 도망가게 둘 수는 없지.”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보이는 노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이내 나무로 가려져 있는 남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눈을 떴다.
“독수리 부대는 명령에 따라 대형을 유지하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수색을 진행하거라.”
노인의 손가락은 정확히 준이 달아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네!”
공중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명에 따라 재빨리 비행 마수를 몰았다.
“제길…저 교활한 자식이…그새 또 위치를 바꿨군.”
하지만 자리에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고, 운산이 남긴 염력의 흔적은 어느 새 북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흥…다친 몸을 이끌고 어디까지 달아날 수 있는지 보자.”
양 측의 술래잡기는 그렇게 해가 떨어질 무렵까지 계속 됐다. 결국 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지날 때 즈음에는 양측 모두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
“후우……”
무성한 나무 숲 사이, 준은 나무 기둥 하나에 몸을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땀방울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가슴이 쉴 새 없이 오르내렸다.
“후우…드디어 밤이군.”
고개를 들어 지평선을 바라보니 이미 해가 자취를 감추고 가느다란 초승달이 산등성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소년은 기력의 조각 한알을 입에 넣은 후 멀리 보이는 운남종의 비행 마수들을 바라봤다.
온종일 계속된 추격전 탓에 진이 빠진 탓인지 운남종의 추격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멈춰서 있었다.
연금비약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기운을 찾은 준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나무 사이를 지나 비교적 포위망이 허술한 방향으로 몸을 달리자, 하늘에 떠 있던 비행 마수들도 즉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상공에 있는 비행 마수와 투왕들은 준이 움직이는 방향을 뻔히 바라볼 뿐,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하늘을 바라보며 숲속을 달리던 준은 적들이 이 기묘한 행동에 의문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계속해서 발을 놀릴 뿐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새까만 하늘이 환히 밝아지고, 별똥별 같은 빛줄기 하나가 상공을 가로지르는 순간, 소년의 입에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자식들, 지원병을 기다리고 있던 거였어!”
칠흑 같은 밤하늘을 찢고 날아든 형상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히 투황의 그것이었다.
준은 투황의 기운을 감지하자마자 자신의 기척을 최대한으로 감춘 뒤 납작 엎드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
“종주님!”
자리에 나타난 것은 바로 운남종의 종주, 진율희였다. 종주의 출현에 장로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율희는 말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발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수림을 바라봤다.
“종주님, 이준 그 놈이 저희 운남종의 제자를 죽였습니다. 당장이라도 놈을 찢어죽이고 싶지만…저희의 능력으로는 선대님의 염력을 완벽하게 감지할 수 없어 놈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부디 종주님께서 억울하게 죽어간 저희 운남종 제자들의 한을 풀어주십시오!”
분노에 찬 장로의 목소리에 듣던 율희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준의 생사는 온전히 그녀의 손에 달려 있었다.
율희는 한참동안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서서히 팔을 들었다. 그녀의 손끝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고, 손 끝에서 나온 하얀 빛이 어둠을 가르고 숲의 한 지점을 정확히 가리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손끝이 향한 곳에서 무언가가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기 시작했다.
세 장로는 새카만 밤 하늘을 가르고 피어난 불빛을 응시하며 즉시 제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쫓아가!”
“하아…”
번개같이 숲으로 향하는 장로들과 제자를 바라보는 율희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