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비술
연화대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준의 얼굴에서 푸른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준은 그제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허허, 대단해. 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승급을 하다니. 하지만 조금 아쉽구나. 잘하면 더 승급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준은 약로의 말에 괜찮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몸을 풀었다.
“충분한 것 같아요. 억지로 3성 대투사가 되어봤자 장기적으로 봐서는 좋을 게 없으니까요. 1층이 튼튼해야 2층을 올리죠. 1층도 다 안 지어놓고 높이만 쌓는다고 좋은 게 아니니까요.”
한층 성장한 제자의 대답에 약로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돌아온 것 보다 그로 인해 제자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에 더 큰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약로는 연화대를 집어넣은 뒤 다시 그 의문의 까만 옥 조각을 꺼내들었다.
“스승님, 이게 무슨 물건인지 아시나요?”
“그럼. 예전에 이런 종류의 기이한 저장장치를 보았었지.”
“저장장치요? 그럼 이 안에 뭔가 저장할 수 있는 거예요?”
“허허, 그래. 내 예상이 맞다면 이 저장장치는 투기 대륙 ‘불의 협곡’에서 만들어낸 걸작일 게다. 그들만이 이런 옥으로 저장장치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지녔으니까. 오래 만지고 있으면 열감이 느껴지는데, 그게 불의 협곡에서 만들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지.”
“불의 협곡이 뭔가요?”
준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약로는 언제나 그에게 생전 처음 듣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투기대륙의 강력한 세력 중 하나란다. 실력만 놓고 봤을 때는 운남종에 밀리지 않아. 그들은 불 속성 공법을 사용하는 걸로 유명하지. 게다가 살인을 전문으로 하는 녀석들이만큼 위험도는 더 높다고도 볼 수 있다.”
“운남종에게 밀리지 않는다고요?”
소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리고 스승을 바라봤다.
“하하! 운남종을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할 거 없다. 세상은 넓고, 밖으로 나가면 운남종 같은 세력이 넘쳐나니까.”
약로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자구나. 이 안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지 않느냐?”
“물론이죠.”
준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운남종과 버금가는 불의 협곡에서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말을 듣자 자연히 호기심과 기대감이 샘솟았다.
“그럼 이걸 불태워보거라.”
약로는 준에게 반지와 옥 조각을 넘기며 웃음을 지었다.
“불의 협곡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은 특이해서, 반드시 불로 태워야만 안에 숨겨진 물건들을 얻을 수 있단다. 가열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귀중한 물건이 있다는 의미기도 하지.”
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까만 옥 조각을 샅샅이 뜯어봤다. 사실 이 작고 약해 보이는 옥 조각 안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스승님이 하는 말이니까, 절대 틀릴 리가 없지!’
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저장반지에서 보라색 알약을 하나 꺼내 물었다.
그렇게 하늘 사자의 불꽃으로 옥 조각을 가열한지 수 분…옥조각은 서운할 정도로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약로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깃들었다.
“별게 아닌 줄 알았더니 예상 외로 대어를 낚은 모양이구나! 대지의 불꽃을 써보거라!”
스승의 말에 준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약로가 ‘대어’라고 할 정도면 정말이지 대단한 물건일 것 이다.
이내 푸른 불꽃이 옥 조각을 감쌌지만, 옥 조각은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굴 내부 온도가 점점 상승하자, 조용하던 옥 조각에서 기묘한 문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괜찮으니 계속 가열하거라.”
약로의 입가에 띤 미소를 보고, 이준은 심박수가 더 빠르게 증가했다. 그는 열심히 체내의 염력을 끌어내 대지의 불꽃의 온도를 계속해서 높였다.
……
잠시 뒤, 새까만 옥이 녹아 초록색의 액체로 변하고, 그 액체는 불길 속에서 살아있는 듯 움직이다가 그 안에서 천천히 무언가를 뱉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찬란한 녹색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자, 무수히 많은 문자가 허공으로 쏟아져 나왔다.
* * *
깊은 산굴 속, 무수히 많은 글자들이 공중에서 빛을 발하며 떠 있었다. 글자 한켠에는 이 빛들이 뒤엉켜 이상한 모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준은 생전 처음 보는 놀라운 광경에 바보처럼 입을 벌린 채 약로를 바라봤다.
“스승님, 이게 뭔지 아시나요?”
“알고 있지.”
약로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준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네 앞에서 처음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 같구나. 정말 귀한 보물을 얻었다. 천운이 따랐어. 이 ‘천계의 불꽃’은 3격 상급의 비술이다.”
“비술이요?”
“허허, 그래. 일반적인 염력 수련법이나 무투기 말고도 이 대륙에는 아주 특별한 힘을 가진 비밀스러운 물건들이 가득하지. 너와 친한 이은이라는 여자 아이가 예전에 은빛성에서 갑자기 대투사 레벨로 훌쩍 뛰어올랐던 것 기억하느냐? 그것도 이런 비술의 일종이었을게다.”
이은이 가씨 가문의 연금술사를 살해했던 그 날 밤을 떠올리자, 준의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당시 5성 투사도 되지 못했던 은이가 갑자기 대투사급 강자가 되었던 그것과 같은 수준의 무투기라니…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찰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단기간에 실력을 올리는 것도 가능하겠네요?”
“물론이지. ’천계의 불꽃’이라 불리는 이 공법은 몸속에 있는 특별한 화염을 끌어내 염력을 폭발시키는 물건이다. 그 위력은 이 나조차도 감탄할 정도지.”
“그럼 은이가 사용했던 것 정도의 위력이라는 건가요?”
이 대목에서 약로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음…아마도 그만큼은 아닐게다. 그 때 그 아이 몸에서 흐르는 힘은 그 정도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이 무투기는 체내의 염력을 폭발시키는 종류의 것이라 몸에 걸리는 부담이 상당하거든. 그 아이는 비술을 사용하고도 몸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었으니, 아마도 그 꼬마가 사용한 것은 이 천계의 불꽃보다도 더 상급의 비술이 아닐까 싶구나.”
약로가 ‘보물’이라고 할 정도의 비술보다 더 대단한 비술이라니…준은 은이가 가진 비술의 위력을 상상하자 저도 모르게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허허, 아쉬워 할 것 없다. 이 ‘천계의 불꽃’ 역시 대단한 물건이니까.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모르지. 내가 알기로는 이 비술은 세 개의 불꽃을 가지도 있다면 연달아 세 번의 승급이 가능하다고 하더구나. 물론 실력이 얼마나 오를지는 네가 가진 불꽃의 수준에 달려있지만…이전에 ‘불의 협곡’의 협곡장은 천지의 불꽃 하나와 마수의 불꽃 하나를 써서 5성 투종에서 투존급으로 단숨에 뛰어 올랐다고 하더구나.”
하나, 둘, 셋, 넷…한 단계 승급할 때 마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는 투종에서 투존급이라니, 머릿속으로 몇 계단을 한 번에 건너 뛴 것인지 계산해보던 준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정도의 보물이라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수준이었다.
“허허…물론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게다가 너는 ‘불개’를 가지고 있으니 몸 안에서 불꽃끼리 충돌이 일어날 일도 없을게다. 만일 세 종류의 천지의 불꽃을 모아내기라도 한다면…”
약로는 말꼬리를 흐리며 흐뭇한 표정으로 허공에 떠 있는 글자들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굳이 글자를 볼 필요는 없다. 녹색 액체에 손을 넣어 보거라. 그럼 자연스럽게 비술을 익히게 될 수 있을게야.”
준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손가락을 뜨거운 액체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공중에 떠오른 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일그러지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한 줄기의 빛이 되어 준의 머릿속으로 빨려 들었다.
“어억…”
방대한 양의 정보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가자, 준은 순간 눈 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준은 한참 동안이나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정말 신기하네요. 대체 이런 것은 어떻게 만드는 걸까요?”
“어때, 마음에 드느냐?”
약로의 입가에는 시종일관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네. 엄청요.”
소년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이 ‘천계의 불꽃’으로 3번 승급을 할 수 있는 건 맞는 것 같은데…이 조각에 있는 것으로는 한 번 밖에 승급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준의 질문을 듣던 약로는 무언가 짚히는게 있다는 듯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으음…아마도 불의 협곡 사람들이 일부러 이렇게 해놓은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외부인의 손에 넘어갔을 때를 대비해서 말이다.”
“괜찮아요. 나머지 두 번은 어떻게든 되겠죠 뭐. 지금은 한번으로도 충분해요. 어차피 가지고 있는 천지의 불꽃도 하나뿐이구요.”
제자가 전혀 실망하지 않은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약로의 입가에 또 다시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허허, 녀석. 실력만 는 줄 알았더니, 이제 제법 ‘여유’라는 것을 갖게 되었구나. 좋은 변화다. 진정한 강자는 언제나 그런 ‘여유’를 가질 줄 알아야 하지.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되니까.”
스승의 칭찬에 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느끼기에도 나설아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이후 무언가가 변한 것 같았다.
“허허, 좋아. 조급해 할 것 없지. 비술의 나머지 부분은 새로운 천지의 불꽃을 손에 넣은 뒤 익히면 되니까 말이다. 우선 그 문제는 뒤로 하고,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를 고민해보자꾸나. 뭔가 계획이 있느냐?”
“아버지를 찾아야죠. 그런데…운령의 말이 사실일까요? 아버지는 대투사인데 어떻게 투왕급 강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감쪽 같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요?”
“흠…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외부인의 개입이 있었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운령이 눈치채지 못 하게 아버지를 빼돌렸을까요? 투왕인 운령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투황급 이상이라는 소리인데…저희 이씨 가문이 그런 수준의 강자와 끈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걸요.”
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약로가 담담한 표정으로 한 가지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은이라는 꼬마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은이가요?”
“아니, 정확히는 그 아이가 아니라 그 아이의 배후에 있는 세력이라고 하는게 맞을 것 같구나. 확실히 명석한 아이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까지 내다보기에는 경험이 너무 부족하니까. 정확한 것은 그 아이를 만났을 때 직접 물어봐야 알 수 있겠지.”
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약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음…그럼 바로 가람아카데미로 가봐야겠네요.”
“그게 좋겠구나.”
시간이 흘러 어둠이 물러가고, 찬란한 햇살이 대지를 비추자, 정적만이 가득했던 천둥산에도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스승님, 근처에 운남종 놈들의 흔적이 있나요?”
준은 그새 파랗게 갠 하늘을 보며 약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반지 안으로 돌아간 약로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맞은편에 있는 산 동굴과 몇 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구나. 운산이 네 몸 안에 자신의 염력을 남겨두었으니 그것을 쫓아 온 것 이겠지. 내 힘으로 최대한 억누르고는 있지만, 완전히 감출 수는 없다.”
약로의 말에 준의 얼굴이 점점 싸늘하게 굳어져 갔다.
“역시, 운남종 놈들이 저를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것 같네요.”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일단 내 영혼의 힘이 회복되는데 보름 정도는 필요하니, 그 사이에는 최대한 놈들을 피해 다니거라.”
소년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이 없는 동안에도 자신은 수 없이 많은 위기를 스스로 헤쳐 나갔었다. 이번에는 2주만 버티면 스승이 어떻게든 해줄 것이니, 전보다 상황이 나았다.
“세 방향에 적들이 모두 포진 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천둥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그쪽으로 가면서 뒤따라오는 놈들만 따돌릴 수 있다면 가한제국도 금방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일단 그렇게 해보자꾸나.”
약로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준은 적의 추격을 피해 조심스럽게 수풀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