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뜻밖의 수확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녹음으로 가득한 숲…산들바람이 불면 숲은 거대한 파도처럼 일렁이며 장관을 만들어냈다.
바다 같은 숲의 머리 위로는 바다보다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그 망망대해와도 같은 허공 위에는 몇 개의 그림자가 날아다니며 사냥감을 찾는 매처럼 온 숲을 훑고 있었다.
그러나 숲이 너무 넓었고, 바람에 초록 잎이 끊임없이 일렁이며 그들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어 사냥감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
“후우…”
준은 두꺼운 나뭇가지 위에 엉덩이를 걸친 채 온 몸에서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스승님?’
‘안심하거라.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정말 상황이 나쁘구나. 네가 준 정령의 꽃이 아니었더라면 다시 잠에 들었을 게다.’
‘죄송해요 스승님…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아버지를 얼마나 생각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약아빠진 네놈이 운남종에 쳐들어가 그 난리를 피우지는 않았겠지. 잘한 일이다. 아버지가 잡혀갔는데도 냉정하게 주판알이나 퉁기고 있었다면 그게 더 실망스러웠을 게다. 지키고 싶은 것이 없다면 강해질 수 없는 게야. 그러니 힘을 키우겠다고 지켜야 할 것을 버린다면 그것이 더 우스운 일이지.’
‘감사합니다. 스승님…’
‘됐다. 걱정 말거라. 그보다 지금은 운남종의 세력권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해. 네놈이 만들어 낸 지옥불을 두 번이나 맞았으니 운산도 온전치는 못 할게다.’
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주먹을 단단히 쥐고 고개를 들어 나뭇잎 사이를 통해 파란 하늘을 응시했다.
‘먼저 운남종의 순찰 부대를 피해야겠어요. 저도 꽤 큰 상처를 입어서 이걸 회복하지 않으면 달아나기 어려울 거예요.’
‘그래, 그것도 좋다. 이번에 좀 크게 다치긴 했지만 내가 깨어났으니 가장 빠른 회복 방법을 찾도록 하마.’
약로의 연금술이라면 생각보다 더 빨리 치료가 가능할 것이다. 준은 한 손으로 나뭇가지를 붙잡고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스승이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도 조금의 절망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동쪽, 남쪽, 북쪽에 모두 운남종 제자들이 포진 되어 순찰을 하고 있구나. 서쪽으로 가자. 게다가 하늘 위에도 여러 장로들이 있으니 주의하거라. 저 자들이 순찰부대보다 더 위험하다.’
‘네, 알겠습니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위험이 없다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그 때, 준의 시야에 무지갯빛 비늘이 스쳤다. 칠색이무기였다. 칠색이무기는 공기 중에 남아 있는 준의 아주 미약한 염력가지도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기에 지체 없이 이준을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네 차례가 된 거야?”
이준이 손을 뻗자 이무기는 재빨리 치익 소리를 뱉으며 이준의 손바닥 위로 올라왔다.
“그래그래, 잘됐다.”
비록 이무기의 힘은 메두사 여왕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녀보다 훨씬 믿음직했다. 얼마 전에도 목숨을 바쳐 자신을 구하지 않았던가.
“정말 다행이야. 너와 스승님이 없었으면 절대 탈출할 수 없었을 거야.”
이무기만 있다면 운남종 장로를 만나도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을 테니,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격 이었다.
‘빨리 이동하거라. 일단은 몸을 피해 치료부터 하자. 절대로 놈들에게 발각돼서는 안 돼. 아무리 칠색 이무기가 너를 돕더라도, 운남종 놈들이 모두 몰려오면 죽는 건 시간문제다.’
준은 스승의 말에 따라 점점 더 깊은 숲속으로 몸을 옮겼다.
* * *
높이 솟아오른 수풀들 사이로 교차 된 빽빽한 나뭇가지들이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빛을 가려주고 있었고, 이따금씩 교차 된 가지의 작은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와 조그마한 별처럼 바닥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조용했다. 간혹 저 멀리서 정체 모를 마수들의 울음소리가 숲 속에서 들리는 것 빼고는 아무런 소음도 느낄 수 없었다.
“운남산 뒤쪽에 있는 산맥은 분명 천둥산과 이어져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아직까지 마수들을 한 마리도 보지 못했을까요?”
“아마 네 소매에 붙어 있는 이무기 때문인 것 같구나.…이무기는 상급 무사라 일반 괴수들은 냄새만 맡아도 질겁하지. 게다가 지금 이 이무기는 투왕 계급의 힘을 갖고 있으니 평범한 마수들은 주위 수백 미터 내로는 얼씬도 하지 않을게다.”
“이 녀석에게 감사해야겠네요.”
“하지만 운남종 놈들은 마수와 싸우며 와야 할 테니 우리로써는 더 없이 좋은 일이지.”
준은 피식 웃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상황이 좋았다. 하지만 몸을 숨길만한 곳이 보이지 않으니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나뭇가지 위로 올라가 몸을 숨길만한 장소를 찾으며 이동을 시작했다.
“여기가 좋을 것 같아요. 안개 때문에 가려져 공중에서 비행하는 사람들도 찾기 힘들 것 같은데요.”
확실히 운이 좋았다. 절벽 아래에 동굴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때 마침 산에 안개가 자욱했으니, 어지간해서는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준은 나뭇가지에서 내린 뒤 칠색 이무기를 앞세워 동굴 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 때, 동굴 속에서 새까만 그림자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 나오더니 곧장 하늘로 사라졌다. 이준은 순간 식은땀이 흐르는 것은 느꼈다.
“머리가 사자 형태인 마수라니, 적어도 3레벨은 되는 것 같은데……”
하늘로 솟아올라 도망치는 마수를 보며 이준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칠색 이무기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괴상한 마수가 사라지자, 준은 조금 더 과감하게 안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 있던 날개가 흐릿해지더니 아예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상처가 정말 깊은 모양이군. 날개를 몇 분 쓰지도 않았는데…’
이준은 입가로 새어 나오는 피를 닦으며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 * *
동굴의 내부는 꽤나 널찍했다. 비록 야생 동물들의 비릿한 체취가 남아있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손가락을 튕겨 저장반지에서 월광석을 꺼내자, 순식간에 빛이 발산 되며 주변을 밝게 비추었다.
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동굴 입구쪽에 있던 커다란 바위로 빛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고 동굴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까만 반지가 파르르 떨리더니 약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승님……”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약로를 보며 이준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스승이던가.
약로는 나타나자마자 손을 저어 약재를 꺼내며 즉시 제조를 시작했다.
“일단 염력을 회복하거라. 그 동안 내가 약을 제조하마.”
“네.”
약로의 말에 준은 즉시 두 손을 모은 뒤 눈을 천천히 감았다. 호흡이 한결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조용한 동굴 속, 약재가 불길에 타닥이는 소리만이 메아리치고, 준은 약 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눈을 떴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약로의 연금비약이 완성됐다. 오랜만에 세상에 나온 그의 손에서 완성된 연금비약은 신비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고, 여전히 완벽했다.
“체내외의 상처를 완전히 치료해줄 수 있을게다. 네가 복용했던 그 푸른 정령의 비약은 약효가 너무 강해 네가 온전히 흡수하지도 못하고 몸속으로 가라앉더구나. 몸에 맞는 약을 만들었으니 흡수가 더 잘 될 게야. 그리고…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몸에 여러 문제들이 생겼더구나. 각인 독 같은 것은 네 회복이 다 끝난 다음에 해결해주도록 하마.”
약로의 말에 마음이 한껏 든든해진 준은 즉시 고개를 끄덕인 뒤 스승이 만든 연금비약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준의 몸에 막 약효가 돌 때 즈음, 제자의 저장반지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약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약로가 꺼낸 것은 다름 아닌 까만색의 옥 조각이었다. 준이 연금술사공회에서 바꿨던 저렴한 바로 그 의문의 물건.
화로가 몸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약로가 건넨 연금비약을 뱃속으로 집어넣고 나니 뜨거운 기운이 뱃속에서 폭발하기 시작했고, 그 열기는 자신의 혈관을 통해 몸 곳곳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곧이어 준의 몸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염력의 흐름을 추적하던 그는 몸 어딘가에 거대한 힘이 저장 되어 있다는 사실을 선명히 느꼈다.
그 힘은 뜨거운 열기와 함께 증발해 기체가 된 후 천천히 혈관을 타고 움직이며 그곳에 단단히 부착 되었고, 다시 서서히 그 속으로 녹아들었다가 마침내 순수한 에너지의 형태로 변화해 몸 속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불규칙한 형태였던 그의 염력 수정이 다시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약로가 만든 연금비약은 준의 몸에 남아있는 약효를 활성화 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고하를 능가하는 해길 조차도 쉽게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사실 준은 약통이라 불려도 무방할 정도로 수 없이 많은 연금비약을 복용해왔지만, 단 한 번도 약이 완전히 흡수된 적은 없었으며, 항상 침전물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뼈대, 근육, 내장 같은 경우 과도하게 많은 에너지를 한꺼번에 흡수할 경우 기관이 팽창하거나 구멍이 생겨 한 순간에 터지거나 망가질 위험이 있었으니, 준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다행이었다.
피부가 벌겋게 부어오르는 이준을 보며 약로도 새삼 놀란 눈치였다. 이는 어지간히 많은 연금비약의 에너지가 몸에 남아있지 않다면 생기지 않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약로는 깨어진 옥조각을 저장반지 안으로 다시 집어넣은 뒤 연화대를 꺼내들었다.
준은 푸른 빛 속에 둘러 싸여 안정을 취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긋불긋 했던 피부가 다시 정상 상태로 돌아왔다.
“젠장…체내의 상처는 거의 다 회복된 것 같은데, 에너지가 왜 이렇게 많이 남은 거야?”
이준은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침착하게 수련을 시작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 힘을 이용해보자.”
단단히 마음을 먹은 준은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순간 엄청난 에너지가 안개가 되어 요동치며 준의 염력 회오리로 모여들었다.
연기는 곧 기체화되어 액체로 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고체로 변화했다.
‘승급이 가능할지는 여기에 걸어봐야겠어.’
곧이어 파도와도 같은 염력이 요동치며 그의 염력 회오리 중심부에 있던 수정과 맞부딪히기 시작했다.
* * *
‘으윽……’
조용한 동굴 속, 고통에 찬 신음이 계속 되었다. 몸 안에서 넘쳐나는 염력은 준이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거칠었다.
‘흠…이 녀석…잘만 하면 2레벨 대투사까지 승급할 수 있겠어. 몸에 남아있던 약효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가보군…‘
사실 지금 준의 실력에서 한 단계 승급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 2~3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거듭되는 격렬한 전투와 염력의 사용이 그의 체내에 남아 떠돌고 있던 에너지를 온 몸으로 퍼져나가게 해주었고, 이번 승급은 그 대단한 약로조차 예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허허,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란 말이지…허허허…’
“호오…이 녀석, 정말 많이 컸구나. 이런 거대한 힘 앞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다니.”
약로는 차분한 태도로 끊임없이 자신의 몸 안에 넘쳐나는 기운을 갈무리해나가는 준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지금 준의 몸에 있는 약효를 최대한 긁어모으면 2급 대투사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이었다. 그러나, 수련은 언제나 한걸음씩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물론 한 번에 두 세 계단을 오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은, 그런 방식의 성장은 큰 위험을 동반할 뿐 아니라 이후 수련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예전의 준이라면 어떻게든 거대한 염력을 이용해 조금이라도 더 승급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준은 투사나 연금술사로써의 실력뿐 아니라 그런 정신적인 면까지 완전히 한꺼풀 벗은 상태였다. 그러니 그런 제자를 보는 약로의 마음이 흐뭇해지는 것도 당연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