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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175화 (175/818)

제175화. 다시 운남종

이씨 문중의 투사 100여명이 살기를 피우며 거리를 가로지르자, 행인들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됐다.

“이씨 가문 사람들이 뭘 하고 싶은 거지?”

“선두에 있는 사람 말이야. 엄청 어리지 않아? 왠지 낯이 익은 것 같은데.”

“저건 이준?”

그 때, 행인들 중 하나가 준을 알아봤다.

“쯧쯧…오늘 송장 여럿 치우겠군.”

100여명의 청년들이 준의 지휘 아래 시장으로 몰려가 가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호위병들을 순식간에 시체로 만들어 버렸다.

아침부터 시작된 학살은 해질녘까지 이어졌고, 그렇게 꼬박 하루에 걸친 복수가 끝나자, 이씨 가문 사람들은 비로소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자신들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 * *

“가주님!”

어린 대리가주의 출현에 이씨 가문 청년들이 반가운 듯 소리를 질렀다. 준은 이에 화답하듯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씨 문중의 수련법이나, 무투기, 재물 등을 모두 챙겨뒀습니다. 가주님 덕분에 경매장에서 저장반지 8개를 빌려주어 일이 수월하더군요! 하하!”

대장로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주희는 일처리가 확실했다. 준은 역시 그녀와 좋은 관계를 쌓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잘됐네요. 모두들, 오늘 밤 은빛성을 떠나 약속한 장소에서 다시 만나자.”

“자네는 같이 가지 않을 계획인가?”

대장로의 질문에 모든 이의 시선이 이준에게로 집중 되었다.

“저요? 저는 운령 그 늙은이에게 본때를 보여주러 가야죠.”

“가주님, 몸조심 하십시오! 모래바람성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다시 어둠이 내려앉자, 이씨 가문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줄 지어 이동을 시작했다.

“운령. 이씨 가문을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지……”

* * *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른 하늘, 우뚝 선 검은 그림자 두 개가 하늘에 멈춰선 채 고개를 숙여 발아래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 안에는 아름다운 성채와, 끝을 모르고 이어진 천둥산맥이 가득했다.

보라색 날개를 펄럭이던 이준은 아래쪽의 은빛성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을지도 모를 일 이었다.

준은 아쉬움을 접지 못한 듯 다시 한 번 긴긴 숨을 토하며 고개를 돌려 메두사를 바라봤다.

“운령을 죽이고 아버지를 되찾는 것. 그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어. 그리고 넌…”

그녀는 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들어 싸늘한 눈초리로 소년을 노려봤다.

“걱정 마. 죽게 내버려 둘 일 없으니까.”

“고마워, 그 정도면 됐어.”

뱀 여왕의 날선 표정에도 불구하고 준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마 그녀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칠색 이무기가 자신의 편을 들어준 것 같았다.

“그럼 가보자고.”

소년은 다시금 고개 숙여 정든 고향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몇 년 만에 돌아온 고향과 이렇게 짧은 인사말로 헤어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준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고향을 등져야했다.

* * *

준은 그 길로 쉬지 않고 운남종을 향해 달렸다. 먹는 것도, 밥 먹는 것도, 모두 생략한 채 달린 덕에 3일은 걸려야 할 거리를 불과 하루 반나절 만에 이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준은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려 황제의 수도를 지났고, 그가 지나간 궤적을 따라 엄청난 염력이 그 흔적을 남겼다.

황궁 근처에 자리한 대나무 숲에서 수련을 하던 가철은 하늘 위에서 풍겨오는 익숙한 염력을 감지하고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이 기운은…이준? 저쪽은 운남종 방향인데…?”

* * *

한편, 유씨 가문의 총본부에서는 회의가 한창이었다.

“주희, 이렇게 단기간 내에 장로 자리를 꿰차다니, 정말 대단하군. 이렇게 젊은 장로는 유씨 가문 역사상 최초인 것 같은데 말이야.”

“호호, 전부 동해 선생님께서 가르침을 주신 덕이죠.”

주희는 활짝 웃으며 동해를 향해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얼마 가지 않았고, 금세 어두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준이는 정말 괜찮은 거죠?”

“하하, 이 질문을 하루에도 수십 번은 받는 것 같군. 걱정 말거라. 그 녀석 실력도 실력이지만, 메두사 여왕이 붙어있는 한 가한 제국의 그 어떤 강자라도 함부로 손을 쓰지 못 할 테니.”

“그렇겠죠…”

동해의 말을 들은 주희는 살짝 안도한 듯 다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동해를 바라봤다.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동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동해 선생님, 무슨 일이시죠?”

동해의 변화를 포착한 주희는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그 옆에 있던 유천 역시 동해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아니…이 기운은…동생이 왜 다시 운남종에 가는 거지?”

“네?”

주희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고, 곁에 있던 유천 역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상황을 좀 보러 가야겠네. 유천, ‘그림자 부대’를 집결시켜 주게. 뭔가 심상치 않아.”

“그림자 부대를 말씀이십니까?”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던 동해는 등을 돌리더니 굳은 표정으로 유천을 바라봤다.

“유천, 나는 이준이라는 아이가 운남종보다 더 위협적이라고 생각하네. 자네도 시간이 지나면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될거야. 그러니 지금은 잠자코 그림자 부대를 집결시키게.”

말을 마친 동해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즉시 등을 돌려 대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 * *

“운령, 며칠 전에 운비, 운성과 함께 운남종에서 벗어난 이유가 뭐지?”

한편, 운남산 안의 회의실에서는 한 여자의 서늘한 목소리가 정적을 꿰뚫고 날카롭게 운령을 질책하고 있었다.

“선대님…그저 사적인 일 때문에 잠시 외출을 한 것 입니다.”

여인의 싸늘한 눈빛에 장로석에 앉아 있던 운령은 손을 파르르 떨었다.

“은빛성에 갔겠지!”

여인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살기로 눈을 빛내며 다시 한번 운령을 질책했고, 대장로의 안색은 보기 딱할 정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선대님, 이준은 저희 대 운남종의 이름에 먹칠을 한 놈입니다. 정말 그대로 놓아주신다면 앞으로 다른 사람들이 저희 운남종을 어떻게 바라볼지…게, 게다가 문승의 죽음도…”

“선대님, 대장로님은 저희 종파를 생각해서 한 일입니다. 게다가 이번에 은빛성에 간 것은 사실이지만 이씨 가문에 큰 손실을 입히지는 않았습니다. 겨우 건물 몇 개가 무너졌을 뿐이니…고정하세요. 허허허…그리고 어찌 되었든 저희 운남종의 대장로가 그런 촌구석 가문에 가서 고개를 숙일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게다가 아무도 대장로님의 신분을 모르고 있으니 이씨 가문은 그 소란이 누구 소행인지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이를 바라보던 장로 중 하나가 중재를 위해 끼어들었다.

“하하하! 그놈이 바보도 아니고, 바로 며칠 전에 운남종에서 있었던 일을 그새 까먹었을까? 아니면 자네들이 그 일을 까먹었나보군. 대체 눈을 어디다 두고 있는 거야! 그 날 이준이 어떤 놈인지는 모두가 느꼈을 텐데? 그놈이 우릴 의심하고 이 곳으로 오면, 미안하다는 말 정도로 끝날 수 있을 것 같나? 그 날 스승님께서 나오셨는데도 불구하고 한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던 모습을 보고 느낀바가 없나보지?”

전임 종주의 날카로운 지적에 장로들은 감히 입조차 벙긋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럼 선대님께선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저를 다시 이준에게로 보내 사과라도 시키실 예정입니까?”

하지만 운령은 순간 화를 억누르지 못한 듯 종주를 향해 따지듯 질문을 던졌다.

“후…자넬 내쫓는다고 상황이 바뀌는 건 없겠지. 하지만 그 아이의 반응이 어찌됐든, 자네는 처벌을 면할 수 없을 거야. 다만, 이건 알아두게. 은빛성에 메두사가 나타났다더군. 이준과 함께 말이야.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삼척동자라도 알 테지. 아주 고마운 일을 해줬어.”

그리고 운산이 말을 마치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갑자기 그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왜 그러십니까?”

“여기서 끝을 내려고 했는데, 이준 쪽은 아니었나보군.”

운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벼락같은 고함이 떨어져다.

“운령 이 개 자식! 당장 튀어나와!”

운남종의 회의실 안까지 음산한 살기가 뻗쳐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회의실 앞에는 검은 망토를 입은 소년 하나가 서있었다.

“이준?”

“이준! 네 이 녀석! 이렇게 무례하게 운남종에 또 다시 발을 들이다니. 정말 죽음을 자초하는 군!”

준을 보자마자 운령의 몸에서는 회백색의 불꽃이 일었다.

“개 같은 노친네…죽여 버리겠어.”

소년 역시 주위에 가득한 운남종의 장로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운령을 발견하자마자 검은 송곳을 빼들며 몸에서 푸른 불꽃을 피워냈다.

“하하! 제 발로 찾아들어왔군. 그렇지 않아도…”

“운령! 닥치지 못할까!”

바로 그 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대장로의 말허리를 잘랐다.

“은지?”

……

“큭큭큭…! 아니, 이제 운남종의 종주. 진율희라고 불러야 하나?”

장로들 틈을 가르고 나타난 여인을 바라본 준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검은 송곳을 움켜 쥔 그의 손이 분노와 배신감으로 가늘게 떨렸다.

한 눈에 율희를 알아본 듯한 준의 반응에 운령을 비롯한 모든 장로들이 영문을 알지 못 해 종주와 소년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율희야, 저 아이를 아는 것이냐?”

“그…우연히…”

싸늘한 운산의 말투에 율희는 차마 스승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 하고 눈을 피했다.

“하하, 대운남종의 종주가 저 같은 잡것과 알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 때, 준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는 소년의 말이 거짓임을 말하고 있었다.

“애송이, 지난번에 그 소동을 벌이고도 겁도 없이 다시 운남종에 발을 들이다니…게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대장로를 모욕해? 지금 네 뒤에 서있는 메두사를 믿고 이리 방자하게 구는 것이냐? 아무래도 네가 운남종을 너무 쉬이 보고 있는 것 같구나.”

“내가 왜 여기까지 왔냐고?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그러나 소년의 눈이 대장로를 향하자, 운산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이번 일은 명백하게 대장로의 잘못이었다. 아무리 투종이라 해도 그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후…지난 번 일로 인해 대장로가 너무 흥분해 실수를 저지른 것 같군. 그것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씨 가문에 큰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고…망가진 물건이나 이번에 손해를 본 내용에 대해서는…우리 운남종에서 섭섭지 않게 보상을 해주지.”

“하하…하하하하하!”

‘보상’이라는 말에 갑자기 준의 입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웃음소리에는 광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회의실 안을 가득 울리던 웃음소리가 멈추는 순간, 소년이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운산님, 사람 목숨도 보상이 됩니까? 그럼 한번 물어나 보지요. 사람의 목숨이 하나 당 얼마나 합니까?”

도저히 17살 난 아이의 그 것 같지 않은 살기에 주위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다시 운산이 입을 열었다.

“후! 그러니 내가 운령의 잘못을 인정하고 충분히 보상을…”

“큭큭큭, 운령 저 늙은 개새끼가 우리 가문에 쳐들어와 아버지의 생사도 모르는데 보상 타령이라니… 좋아. 그럼 내가 저 노망난 늙은이를 죽이고 운남종에 얼마를 보상해주면 섭섭하지 않겠나?”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준의 말에 갑자기 율희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아버지?”

“그래.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 같나? 운남종의 대장로께서 친히 은빛성에 행차하셔서 우리 가문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우리 아버지께서는 저 늙은 개자식과 다른 놈들을 유인하겠다고 성을 빠져나가신 뒤 아직까지 생사가 불명이야.”

소년은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시종일관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온 몸에서 살기를 내뿜으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는 그 모습에 운남종의 장로들은 오히려 더욱 깊은 공포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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