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결단
준의 한마디에 삽시간에 마당 안에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이씨 가문의 세 장로는 두 주먹을 꼭 쥐고 그 광경을 바라보며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비명 소리는 일분 가량 지속되다 서서히 잦아들었고, 상황이 모두 정리되자 준을 바라보는 이씨 가문의 눈에는 존경의 빛이 가득했다.
“가주님…”
대장로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준을 향해 걸음을 옮기더니, 이내 자신의 손자뻘 밖에 되지 않는 소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미 준을 ‘가주’라고 부르고 있었고, 심지어 17살 난 소년에게 극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장로님, 그냥 지금까지처럼 준이라고 불러주십시오. 가주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준이 겸손한 태도를 보이자, 장로는 더욱 감격한 듯 눈 내린 듯 새하얀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차기 가주가 이토록 훌륭하니 이씨 가문의 미래가 참으로 밝은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보다, 어서 상황을 수습해야지요. 우선 이것을…치유에 효과적인 연금비약입니다.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사용해주세요.”
얘기를 나누며 주위를 둘러보던 준은 곳곳에 부상당한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저장반지에서 연금비약을 꺼내 대장로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던 준의 머리에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백 명도 넘는 사람이 죽었는데, 마당 안이 너무 깨끗했던 것 이다.
“어떻게 된 거지?”
“굳이 시체를 남겨둬야 할 필요가 있나?”
준의 질문에 뱀 여왕은 되려 왜 그런 것을 묻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무서운 여자야.’
수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마당 앞에 떨어진 낙엽을 치운듯한 표정을 짓는 메두사의 태연한 말투에 준은 저도 모르게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준은 뱀 여왕의 무자비한 성품을 실감하며 다시 대장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대장로님, 저희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요? 설마 이게 전부는 아니겠죠?”
“허허. 걱정 마십시오. 만일 이씨 가문에 남은 사람이 겨우 이 정도였다면 저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 하고 진작에 자결을 했을 것입니다. 이씨 가문의 사람들 중 대부분은 뒷산에 대피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 대체 이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알겠습니다. 일단 들어가시지요.”
대장로가 고개를 끄덕인 뒤 건물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나머지 두 장로도 침울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
“이제 말씀해주시죠.”
“도련님께서 은빛성을 떠날 때 남기신 대량의 연금비약 덕분에 저희 이씨 가문은 빠른 속도로 성의 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지요. 물론 나머지 두 가문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나…주희 아가씨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큰 문제 없이 계속해서 가세를 늘려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가씨 가문과 박씨 가문이 연합을 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일 대 일로는 저희 가문에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격차가 벌어지게 되었으니, 그들도 필사적이었던게지요. 결국 크고 작은 충돌이 반복되다가…3개월 전부터는 아예 무기를 들고 저희 이씨 가문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대장로는 분을 참지 못 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어느 날 세 명의 정체 모를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더니 우리 이씨 가문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너무도 강한 자들이었지요. 아마도 그들이 마음만 먹었더라면 성내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노린 것은 오로지 가주님 뿐 이었습니다.”
“뭐라구요?”
준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 정도 소동이 벌어졌음에도 가문의 지도자인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애써 별 일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거려왔다. 하지만 결국 불길한 예감이 적중하고 말았던 것 이다.
“가주께서는…그 정체 모를 녀석들이 자신을 노리는 것을 아시자마자 이씨 가문의 사람들에게 갈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놈들을 유인해 사라지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돌아오시지 못 하셨습니다…”
가주의 행방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가던 대장로는 결국 비통함을 이기지 못 하고 주름 가득한 얼굴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다행인 것은…아직 살아계신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품안에 가지고 있던 낡은 상자 하나를 준에게 내밀었다. 상자 속에는 초록색 보석이 들어있었고, 그 보석의 중심부에서는 기묘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씨 가문의 가주에게만 전승되는 보석입니다. 이 안에는 족장님의 영혼 에너지가 들어있지요. 만일 주인이 죽는다면 이 보석안에 있는 빛이 꺼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렇게 밝게 빛나고 있으니…무사하신 것만은 틀림이 없을겝니다.”
보석에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운 빛을 바라보자,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표정을 짓던 준의 마음이 조금은 안정을 되찾았다.
“이걸로 위치를 알 순 없나요?”
“그건 어렵습니다.”
바로 그 때, 낭랑한 목소리가 준의 뒷통수를 후려쳤다.
“그…운령이었나? 운남종의 대장로. 그 놈의 기운이 느껴지는군.”
고개를 돌리자, 메두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련님, 그렇다면 그 세 사람이 설마…”
준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살의를 억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메두사 여왕의 말이니 틀림없을 거예요. 운남종에서의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양이네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운남종이라는 말에 대장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정말로 그들이 손을 쓴 것이라면, 이씨 가문의 힘만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제가…해결하겠습니다.”
곧이어 준이 자신을 바라보며 담담한 말투로 입을 떼는 순간, 대장로의 마음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갔다.
“도련님 설마…”
“운령, 그 빌어먹을 늙은이를 죽여 버리겠습니다.”
소년의 눈에 깃든 무시무시한 살의를 확인한 대장로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음을 알겠지만 대장로를 죽인다면 이씨 가문은 운남종과 전쟁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그럼 지금 아버지를 버리라는 겁니까!”
대장로의 한마디에 준은 순간 냉정을 잃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도련님…다만, 지금 상황은 그렇게 감정적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운남종에 뛰쳐 들어가 가주님을 되찾고 그 세 놈을 찾아내 찢어죽이고 싶습니다. 그러나…도련님과 가주님이 모두 돌아가시면, 우리 이씨 가문의 앞날은 어찌하시려고 합니까? 가주님께서 그걸 바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정말로 전쟁이 벌어진다면 이씨 가문이 운남종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입니까? 운남종에서 이번에 가주님을 그냥 보내준 것은, 도련님을 도와준 강자들의 힘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말로 전쟁을 치를 정도로 큰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련님께서 정말로 대장로를 살해한다면, 운남종이 이번처럼 맥없이 물러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노인의 침착한 태도 앞에 준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였다.
문승의 죽음이든, 나설아의 패배든, 운남종이 자신과 사생결단을 내지 않은 것은 그 두 가지가 모두 전쟁을 벌일 만큼 중대한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장로 살해는 누가보아도 운남종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포기할 수는 없었으니 준은 도저히 냉정을 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아버지를 포기하라는 겁니까? 운남종은 우리보다 강하니까, 가주가 납치되어서 살해당해도 가만히 있어라! 이런 의미입니까?”
준은 또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장로의 차분한 태도가 더욱 그를 화나게 했다. 지금 소년의 눈에 대장로는 운남종에 굴복해 아버지를 희생시키고 가문을 지키려는 비겁자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련님, 저는 가주님을 포기하라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보시지요.”
“그게 무슨!”
“도련님, 가주님이 없는 이씨 가문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한데 똘똘 뭉쳐 싸워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인 판에 가주도 없이 전쟁을 치르면 이씨 가문은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버지를…”
“도련님! 흥분하지 말고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십시오!”
그간 온화한 태도를 유지하던 대장로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준은 자기도 모르게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지금 그 구심점이 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도련님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겁니다!”
이어지는 대장로의 호통에 준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상태에서 운남종과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백이면 백 이씨 가문은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도련님이 구심점이 되어 힘을 기르면, 백에 하나 둘 정도는 승산이 생길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도련님이 어떻게 하시느냐에 따라 그 하나나 둘이 열, 스물이 될 수도 있는 것 입니다! 그리고 우리 이씨 가문의 투사들이 그 하나나 둘을 열, 스물로 만들기 위해 전력으로 보필할 것이니 우선은 가문을 추스르고 힘을 기르셔야 합니다!”
말을 마친 백발이 노인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준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이었다.
소년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고민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대장로님, 제가 하는 말이 이씨 가문의 가주로서의 힘을 가질 수 있나요?”
“지금 상황에서는 가주나 다름없는 권한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우리 이씨 문중은 은빛성을 떠나도록 하지요.”
상상을 초월한 준의 답변에 순식간에 마당 안에 소란이 일었다.
박씨 가문과 가씨 가문마저 사라져 완전히 그들의 수중에 떨어진 은빛성을 떠나다니, 어떻게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준의 태도는 단호했다.
“운남종에게 가주를 납치당하는 수모를 당하고도 이 작은 성안에 숨어 꼬리를 만 개처럼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밖으로 나아가 힘을 기를지, 지금 결정하십시오.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운남종과 맞서고 가주를 되찾으려면 이곳에서는 안 됩니다. 저는 이씨 가문의 일원들을 데리고 타르 사막으로 가겠습니다. 정 형님과 찬 형님이 그곳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아두었으니 그곳에서 힘을 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국 동쪽? 그렇게 멀리 가야합니까?”
“제국 동쪽은 타르사막과 가깝기 때문에 운남종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다른 곳은 너무 쉽게 발각 될 거예요. 앞으로 운남종과의 관계가 어떻게 틀어질지 모르니 미리 준비해야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쯤 떠날 예정이십니까?”
대장로가 물었다.
“질질 끌어서 좋을 게 없으니, 오늘 밤에 부분적으로 이동을 시작하겠습니다. 집합 장소는 가한제국 동쪽의 모래바람성이입니다. 그곳에서 사막의 칼날이라는 용병단을 찾으시면 됩니다!”
“알겠네!”
세 장로가 동시에 답했다.
‘그리고 가씨 문중과 박씨 문중의 일도 처리해 둬야겠군.’
* * *
준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씨 가문 사람들을 일사 분란하게 짐을 꾸렸고, 하늘이 어두워졌을 때 즈음에는 이미 열 개의 무리가 드넓은 광장을 빠져 나갔다.
새벽녘, 준은 광장에서 백 명에 이르는 이씨 가문 청년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었다.
“가후와 박한의 가문을 모두 풍비박산 내자!”
사람들이 모이자, 준은 검은 송곳을 빼어들고 천천히 광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