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변고
“여기 남아있을 수 없어요. 빨리 은빛성으로 가봐야 해요.”
“일단 약재를 좀 찾아보자고. 여기 우리가 찾는 재료가 있을 수도 있잖…”
“지금 당장 은빛성으로 가야 한다니까!”
준이 갑자기 미친 놈 마냥 눈을 번뜩이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뱀여왕은 잠시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그녀의 눈이 살기로 물들었다.
“난 약재를 구해야 한다고 말했어.”
“빌어먹을! 어차피 당신도 영혼의 결정이 필요하잖아! 지금까지 비위를 맞춰준 건, 이무기 안에 갇힌 당신이 딱해서였고, 목숨을 구해준게 고마워서였어! 알아? 지금 나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맘대로 해! 난 당장 가야하니까!”
이성을 잃은 준은 감히 뱀 여왕을 향해 반말을 지껄인 뒤 바로 술 집 밖으로 몸을 날렸다.
“허…”
메두사는 생전 처음 당하는 대우에 허탈한 표정으로 준이 나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그 뒤를 쫓았다.
……
두 시간 뒤…두 사람의 시야에 은빛성이 들어왔다. 두 시간 동안 말 한마디 없이 미친 듯이 날기만 하던 준은 성에 도착하고 나서도 메두사 여왕을 내팽개치고는 즉시 성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성문을 지나 익숙한 거리로 들어서니, 2년 전 그 때와 똑같은 친근한 풍경이 준의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감상에 빠져있을 틈이 없었다. 준은 그리운 풍경을 뒤로하고 황급히 이씨 가문의 구역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 * *
익숙한 골목을 지나 달려나가니 드디어 이씨 가문의 건물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가문 사람들의 가택이 모여 있는 거리에 도착한 준을 반긴 것은 유령이라도 나올듯한 스산한 풍경뿐, 언제나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던 가문의 호위 무사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빌어먹을…메두사,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
말을 놓기로 작정한 듯 무례한 준의 태도에 메두사는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않고 고개부터 저었다.
“영혼의 결정 제조에 필요한 약재를 하나 줄게.”
“뭐?”
그러나 준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에 메두사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갖고 있어?”
“8급 악마의 꽃 하나.”
8급 악마의 꽃은 준이 천둥산에서 발견한 가장 귀중한 약재 중 하나로, 꽤 오랜 시간 그의 저장반지에 잠들어 있던 물건이었다.
그 꽃은 영혼의 결정의 조합표를 받자마자 메두사와 거래를 하기 위해 고이고이 모셔둔 보물과도 같은 것이었지만, 가문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이것저것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건은?”
“오늘 날 좀 도와줘야겠어.”
뱀여왕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하루만에 영혼의 결정의 재료를 구할 수 있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그 때,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네 놈은 또 누구야! 우리 이씨 가문이 만만해?”
목소리의 주인공은 불과 열두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여자 아이였다.
“너는…”
준은 또랑또랑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여자아이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기억에 있는 아이였다.
“기억났다. 이름이 이청 맞지? 이안의 사촌 여동생.”
낯선 사내의 입에서 언니의 이름이 나오자, 여자아이는 놀란 눈으로 준과 메두사 여왕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갑자기 팔짝 팔짝 뛰기 시작했다.
“이준 오빠! 이준 오빠구나!!”
준을 알아보자마자 그녀의 눈가에는 갑자기 눈물이 맺혔다.
“엉엉…! 오빠… 나쁜 사람들이 쳐들어왔어요! 엄마 말로는 우리 가문의 물건을 모두 빼앗아 가려고 하는 거라고… 흑흑…!”
“괜찮아, 괜찮아, 걱정하지 마. 오빠가 왔으니까…이제 괜찮을 거야. 일단 오빠 데리고 들어가서 상황 좀 보여줄래?”
“흑흑…!”
이청은 울음을 삼키며 준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손에 이끌려 골목을 지나니, 커다란 건물이 눈앞에 들어왔다.
“그 나쁜 놈들이 여기 안에 있어. 대장로님도 계시고. 그런데 부상을 입으셨어. 그것만 아니었어도 저 나쁜 놈들이 이렇게 제멋대로 굴지 않을 텐데.”
“부상? 정말 무슨 일이 나긴 했군.”
이준은 굳게 닫혀있는 대문 앞에 선 채 입술을 악물었다.
* * *
한편, 건물 안에서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우리 이씨 가문이 최근에 조금 곤란한 일을 겪게 된 건 사실이나,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은빛성의 시장은 저희가 피땀 흘려 키워내고 지켜낸 것입니다. 그런 곳을 이렇게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에 사들이려 하다니…”
이씨 가문의 둘째 장로가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반대편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입을 연 것은 박씨 가문의 수장인 박한이었다.
“하하, 둘째 장로님. 누가 들으면 저희가 도둑질이라도 하는 줄 알겠습니다. 지난 2년간 은빛성의 돈이란 돈은 모두 이씨 가문의 것이었는데, 그러게 있을 때 베풀지 그러셨습니까. 그랬더라면 저희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시지요. 이씨 가문이 먼저 저희를 말려 죽이려 했으니, 뿌린 대로 거두는 거라 생각합시다.”
“젠장! 8만 골드에 시장을 팔라니, 그게 도둑질이 아니란 말이야?”
바로 그 때, 불같은 성격의 셋째 장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셋째 장로!”
하지만 대장로가 호통을 치자, 셋째 장로는 분을 이기지 못해 부들부들 떨면서도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 성격하고는. 하지만 소리를 지른다고 될 문제가 아니지. 자, 어쩔거요?”
대장로를 겁박하는 박한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흥…과연 준이가 돌아와도 그렇게 막무가내로 굴 수 있을지 보겠소.”
“아, 이준? 큭큭! 걱정 마시오. 우리도 그 소문의 대천재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니까.”
‘이준’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가후가 앞으로 나서며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박한과 가후는 말없이 눈짓을 교환하더니 이내 뒤에 서있던 그들의 수하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들의 등 뒤에는 수 백에 달하는 가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투사들이 살기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아…”
대장로는 자기도 모르게 절망스러운 탄식을 내뱉었다. 지난 2년간 은빛성의 모든 상권을 독점해온 이씨 가문이니만큼 재력 면에서는 박씨와 가씨 두 가문을 합쳐도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두 가문이 연합해 전면전을 벌인다면 지금의 이씨 가문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끼익.
그러나 대장로의 눈빛에서 희망이 사라지려는 순간…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 청년이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이 개자식들이…”
“이, 이준… 준아!”
대장로와 준의 관계는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부르는 대장로의 목소리에 준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대장로님, 정말 이준 도련님입니다!”
“이준 도련님이 오셨다! 우린 살았어!”
이준의 등장에 이씨 가문 사람들의 눈빛이 다시 생기를 찾았다. 운남종에서의 일은 이미 은빛성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가 되어 있었으니,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준의 실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장로와 셋째 장로 역시 서로를 쳐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미워했던 아이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과거사 따위는 눈꼽 만큼도 중요하지 않았다.
“장로님, 세 분 다 괜찮으시죠?”
“괜찮다.”
게다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타난 준이 다정한 말투로 자신들의 안위부터 챙기자, 세 장로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약간의 앙금마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예전에 우리 노인네들이 너에게 너무 했던 것 같구나…면목이 없다 준아…”
“대장로님, 그런 말 마십시오. 다 제가 부족해서 생긴 일입니다. 그런 것 보다는 지금 눈 앞에 있는 일부터 해결하지요. 밀린 얘기는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알겠다. 일단 저 자들의 실력을 일러주마. 가후와 박곤은 모두 5성 대투사이고…저 뒤에 있는 노인은 유석의 스승이라고 하더구나. 저 사람은 6성 대투사다. 하나 같이 만만치 않은 자들이야.”
그렇게 대장로가 준에게 상대에 대해 일러주고 있을 때, 가후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준, 정말 이준이군! 하하!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구나!”
“그러게요.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서둘러 돌아와 봤는데, 이런 일 인줄은 몰랐습니다.”
준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가후를 노려보며 검은 송곳을 뽑아들자, 소름 끼치는 금속성과 함께 새카만 송곳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문의 그 무기였다.
박한과 가후는 운남종의 차기 종주를 쓰러뜨리고 대장로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는 송곳을 직접 눈으로 보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하, 이거 왜 이러나. 뭔가 오해를 하고 있군. 오늘 우리가 온건 말일세…그, 음…자네 아버지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해서, 그래서 온 거야. 결코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고…”
당황한 박한은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그래요?”
그러나 준은 무기를 거두기는커녕 온 몸에서 새파란 불꽃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푸른 불꽃으로 주위의 공기가 삽시간에 달아오르자, 박한의 얼굴에서는 완전히 핏기가 가셔버렸다.
“이, 이봐! 이준! 오해 말게나. 왜, 왜이래! 아, 알겠네. 자네가 정 싫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사람들을 무르겠네.”
박한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즉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병사들에게 손짓을 해 무기를 내리게 하고는 황급히 밖으로 퇴장했다. 가후 역시 잠시 망설이더니, 자신의 부하를 데리고 등을 돌렸다.
“거기 멈춰! 이대로 그냥 가겠다니 무슨 말인가? 저런 어린 놈 하나 때문에 허둥지둥 도망가는 꼴이라니! 앞으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려고!”
바로 그 때, 3레벨 연금술사라고 불리던 자가 가후와 박한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내의 고함 소리에 가후와 박한이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말대로 였다.
고작 17살짜리 소년 때문에 대투사 둘과 휘하의 무투사, 무수한 투사들이 그대로 물러났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박씨 가문과 가씨 가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 분명했다.
“어쩌지?”
박한은 잠시 망설이며 가후를 바라봤다.
“아아아아악!”
그러나 두 가문의 수장이 발을 멈추는 것과 거의 동시에, 마당 안에서 처참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안쪽을 바라보니 기이한 무지개빛 염력이 3레벨 연금술사를 에워싸고 있었고, 그의 몸이 촛농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결국 몇 초 지나지 않아 연금술사의 몸은 모두 녹아 내렸고 이내 뼈만 남은 상태가 되었다.
“헉…”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한 순간에 시체가 되어버린 연금술사를 응시했다.
펑!
다음 순간, 무지개빛 염력이 사라지며 아름다운 여인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메두사 여왕? 제, 젠장 소문이 정말 이었어!”
“이준, 이만 가보겠네. 오늘 일은 정말 오해라는 거 알아주게!”
가후와 박한은 메두사의 출현과 동시에 손을 부들부들 떨며 앞 다투어 대문으로 달려 나갔다. 사실 전력으로 따지자면 본인들도 대투사였고, 장로급의 인물들 중에는 무투사도 제법 있었으니 사실 갓 대투사가 된 준을 그토록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운남종에서의 일은 이미 가한제국 곳곳에 소문이 난 상태였고, 그들이 사람을 시켜 자세한 내막을 알아본 결과, 운남종에서 두 명의 투황과 메두사가 나타나 준을 도왔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 이다.
물론 귀를 의심할만한 소식이었지만, 두 번, 세 번에 걸쳐 거듭 확인을 해보아도 준의 배후에 두 명의 투황과 메두사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셋 중 하나만 준을 편 들어준다 하더라도 가씨 가문과 박씨 가문은 지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나도 남기지 마. 모두 죽여버려.”
그리고 다음 순간, 준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