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이별
동해가 사라진 뒤, 이제 남은 것은 세형 뿐 이었다.
“그쪽은…”
하지만 동해 때와는 달리 준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결국 세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허허, 됐네. 나는 명령대로 한 것뿐이니까. 자네가 운남종을 무사히 빠져 나온 이상 내 임무도 무사히 끝났고. 그러니 신경 쓰지 말게. 그보다 자네, 아주 제법이던데?”
세형은 준을 칭찬하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운남종에서 시커먼 염력을 내뿜으며 싸우던 공포스러운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인 그의 모습에 준의 얼굴에는 웃음이 피어났다.
“감사합니다. 자세한 연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선배님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언젠가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지요.”
“하하하! 이거 이거, 실력하고 배짱만 물건인 줄 알았더니, 인성도 아주 훌륭한 친구군! 갈수록 마음에 들어! 뭐…어찌됐든 나도 할 일이 좀 남아 있어서 이쯤 해야할 것 같군. 나중에 연이 닿으면 또 보지.”
“정말 감사했습니다.”
세형은 피식 웃으며 날개를 펼쳤다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 가기 전에 노인네가 충고 한마디만 해도 되겠나?”
“얼마든지요.”
“음…더 강해지게. 그래야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있을거야. 투기대륙은 아주 냉정한 곳이니까 말이야. 힘이 없으면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어.”
그는 그 한마디만을 남긴 뒤 준의 대답조차 듣지 않고 아득한 하늘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휴, 모두 떠났군.”
“인사 끝났나?”
준이 두 투황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놓고 있을 때, 익숙하지만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그의 귓등을 때렸다. 아직 가장 큰 문제가 남아 있었던 것 이다.
소년은 딱딱하게 굳은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어색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저…여왕 폐하, 왜 아직도 그대로인지……”
“난 다시 변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이무기의 영혼에 동화된 거 아니었나요?”
메두사의 한마디에 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럴바에는 차라리 운남종에 잡혀있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번에 널 살린 대신, 3일간 내가 이 몸을 차지하기로 했거든!”
흡족한 표정을 짓는 여왕에 반해, 준의 표정은 거의 시체나 다름 없었다. 뱀 여왕과 3일이라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럼 3일 동안 그, 그 모습으로 지내실건가요?”
“알게 뭐람?”
준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을 열자, 메두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뜻 모를 대답을 던진 뒤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물건을 줘.”
“네?”
“영혼의 결정의 조합표. 내놔.”
“윽. 그건…”
아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메두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 하는 준이었다. 거절하기에는 눈앞에 있는 상대가 너무 무서웠던 것 이다.
결국 준은 울상이 되어 저장반지 속에서 조합표를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메두사는 준의 손에 들린 종이를 잽싸게 낚아챈 뒤 특유의 매혹적인 눈동자로 소년을 응시했다.
순간 준의 머릿속에 ‘무섭긴 하지만, 예쁘긴 정말 예쁘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무서운 쪽이 훨씬 컸다.
“이미 읽어 봤겠지?”
“네… 네?”
“만들 수 있나?”
뱀 여왕의 질문에 준은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4레벨도 안 되는 연금술사인걸요. 이 물건은 6레벨 짜리라구요.”
그러나 메두사는 준의 말을 추호도 믿지 않는 듯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하…지금 날 가지고 노는 거야? 애초에 동해의 봉인을 풀어준 그 연금비약은 6레벨 짜리 아니었어? 이게 아주 날 우습게 보는구나. 좋아. 어찌됐든 상관없어. 네가 날 속인 게 아니라 정말로 6레벨 연금비약을 만들 수 없는거라면 살려둘 이유가 없지.”
그녀가 피식 웃으며 눈같이 새하얀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준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하아…스승님…제발 살려주세요.’
소년은 당장이라도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 했다.
“좋습니다. 제가 영혼의 결정을 만들어볼게요. 그런데, 그럼 저는 뭘 얻을 수 있는데요?”
준은 마음을 다잡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까짓거, 생각을 바꿔 운남종에서 죽었다고 생각하면 아까울 것도 없는 목숨이었다.
“뭐? 지금 나랑 거래를 하자는 거야?”
메두사는 준의 당돌한 태도에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이미 죽음을 각오한 소년에게 그런 위협이 먹힐 리가 없었다.
“싫으면 이 자리에서 죽이시든가요. 그리고 다른 연금술사를 찾아보세요. 3일 내에. 6레벨 연금비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
“하! 이 꼬맹이가 아주 겁대가리를 상실했군.”
뱀 여왕의 눈에서 일순 살기가 흘렀다. 허나, 준의 말대로 3일 내에 6레벨 연금비약이 제조 가능한 연금술사를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너 머리가 좋구나? 좋아. 그럼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말해봐.”
“3년. 3년만 저를 지켜주십시오.”
동해도, 세형도, 약로도 없는 상황에서 준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일단 목숨을 보전하는 것 이었으니, 준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요구조건을 말했다.
“하하하하하! 이런 미친! 3년?”
다음 순간, 메두사의 백옥 같은 팔이 준의 어깨에 걸쳐졌다.
“이봐, 꼬맹이. 차라리 널 죽이고 다른 연금술사를 찾는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야.”
“그럼 죽이세요. 죽죠 뭐. 에이, 아깝다.”
자신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소년이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더 바싹 다가오자, 뱀여왕은 자기도 모르게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풋…정말 어이없는 놈이군. 좋아. 1년의 시간을 주지. 1년 동안 조용히 잠들어 있겠어. 대신 네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는 반드시 도와주지. 뭐…기분이 내키면 다른 때도 도와줄 수도 있고. 3년은 어림없어. 네가 결정해. 3년 이면 이 자리에서 죽는다.”
“끙…”
여왕의 표정으로 보아 이번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심임이 틀림이 없어보였다. 결국 준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당장 죽는 것 보다야 1년 동안 뭐라도 대책을 세우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지?”
메두사 여왕은 손에 든 조합표를 다시 준에게 건네며 질문을 던졌다.
“은빛성에 한 번 들러야죠. 앞으로 꽤 오랫동안 가한제국을 떠나있어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가한제국을 떠난다라……”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가한제국을 떠난다는 말에 메두사의 기분이 조금 좋아진 듯 했다. 정말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여자였다.
“좋아. 어차피 뱀 인간들 중에는 내 공백을 메워줄 아이들이 제법 있으니까. 1년이면 그 아이들이 그럭저럭 해나가겠지.”
뱀여왕의 기분이 좋아진 듯 하자, 준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비록 1년 짜리 목숨이긴 했지만, 어쨌든 급한 불은 껐으니 다음 일은 차차 생각하면 될 일 이었다.
“그럼 출발하죠.”
“좋아. 대신 은빛성으로 가는 길에 큰 성 몇 군데 정도는 거쳐서 가지. 영혼의 결정을 만들 약재를 찾아야 하니까.”
“좋아요. 그런데 얼굴은 가려야 하지 않을까요?”
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확실히 맨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기에는 너무 미인이었으니, 분명히 큰 성에 간다면 모든 사내들이 넋을 잃고 그녀를 볼 것이 뻔했다.
물론, 사내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야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뱀여왕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그 중에 섞여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흠… 알았어.”
* * *
운남종을 떠난 준은 황도로 돌아가지 않고 메두사와 함께 은빛성으로 향했다.
황도와 은빛성은 거의 제국의 끝에서 끝이었으니, 두 사람의 비행속도로도 족히 3일은 필요했다.
게다가 메두사의 요구대로 몇 몇 성을 경유해야 했으니, 실제로는 배 이상 시간이 걸릴 것 이다.
하지만 준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오히려 그 여유를 즐겼다. 드디어 나설아를 이기고 오명을 씼었으니 기분이 좋은 탓도 있었지만, 지난 3년간 오로지 수련에 수련만을 거듭하는 일상을 보내온 그로써는 참으로 오랜만에 즐기는 여유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은빛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대도시의 경매장 몇 군데에 들렀다. 물론 예상대로 아무런 수확도 없을 수 없었다.
아무 경매장에서나 덥썩 덥썩 구할 수 있는 약재들이었다면 6레벨 연금비약이 그리 귀한 것일 리가 없었다.
메두사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약재를 발견하지 못 한다고 해서 짜증을 내거나 실망하는 일은 없었다. 준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다행인 일 이었다.
그러나 메두사와 함께 다닌 지 4일이 지나 5일이 되자, 준의 마음에 불안감이 싹 트기 시작했다.
3일만 바깥에 나와 있겠다고 했던 뱀 여왕이 도무지 이무기에게 몸을 양보하지 않고 있었던 탓이다.
조심스럽게 질문을 해보았지만, 이무기와 협상을 했다는 답변만이 돌아오자, 준의 평화로운 마음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미심쩍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뱀여왕의 면전에 대고 ‘당신이 나와 있으면 불편하니까 들어가 주시면 안될까요?’ 라고 말을 했다가는 1년 이고 뭐고 그 즉시 골로 갈지도 모르는 일이니 준은 울며 겨자 먹기로 메두사와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 * *
불꽃성은 가한제국 북부의 성 중 하나로, 은빛성과도 제법 가까워 메두사와 준의 속도라면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불꽃성은 세간에 ‘연금술사의 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약재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으니, 메두사가 그곳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준과 메두사는 성문을 지나쳐 제법 사람들로 붐비는 곳에 자리 잡은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준의 성품상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약재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야했다.
게다가 북쪽 지역 사람들은 평소 검소하고 소박하기로 유명했으니 약재에 관한 정보를 얻을만한 규모의 술집은 성내에 두 세 개에 불과했다.
술집에 들어간 준은 창가에 자리를 잡은 뒤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한참 뒤에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어때? 뭔가 물어봤나?”
메두사는 그 사이 술 한 병을 시켜놓고 혼자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음…여기에 약재를 재배하는 곳이 따로 있다고 하네요. 거기에서 약재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가격이 좀…”
“됐어. 일단 좀 쉬었다가 가보도록 하지.”
뱀 여왕은 준의 말을 자른 뒤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이봐, 운남종 그 일 들었지?”
그 때, 멀지 않은 테이블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준인가 뭔가 하는 녀석 말이지?”
“그래. 그 녀석 은빛성에 있는 이씨 가문 아니야?”
“맞을 거야. 이씨 가문이 아주 위세가 등등해졌겠어. 운남종 차기 종주를 꺾었으니까 말이야.”
“하하, 그건 아닐 수도 있어. 내가 마침 은빛성 쪽에 있다 왔었는데, 듣자 하니 이씨 가문에 문제가 생긴 것 같더라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한창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갑자기 느껴지는 압박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검은 망토를 걸친 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자의 기운이 느껴지는 사내였다.
“저… 무슨 일로…?”
“이씨 가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요?”
”잘은 모르겠지만 며칠 전에 이씨 가문 쪽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 뒤로 외부인들의 출입을 금지했고, 이씨 가문의 큰 어르신이 보이지 않으신다고.“
사내의 말을 듣던 준은 즉시 메두사에게로 달려갔다. 집안에 뭔가 큰 일이 난 것이 틀림이 없었다.
“등에 메고 있는 무기가 참 희한하군. 송곳 모양이네. 아니야, 무슨 몽둥이 같기도 하고…”
그리고 준이 등을 돌린 순간, 두 사내 중 하나가 등에 걸린 시커먼 송곳을 보고는 신기하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음? 뭐라고?”
그러자 두 사내 중 나머지 하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치켜떴다.
“설마 저 자가 이준인가! 저렇게 어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