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하산
운산은 자신을 향해 돌격하는 두 명의 투황과 준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양 손을 들어올렸다.
“바람벽!”
운산이 주문을 뱉어내자 하늘에서 광풍이 일어나며 푸른 바람이 단단한 벽을 만들어 냈다.
‘퍼-엉!’
곧이어 동해의 얼음 칼날과 세형의 검은 염력이 바람벽에 부딪히는 순간, 거대한 파문이 온 산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두 투황의 협공에도 바람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운산은 두 투황의 공격을 가뿐하게 막아내면서 여유롭게 바람을 날려 칠색 이무기와 준의 퇴로를 차단한 뒤,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람으로 만들어 진 거대한 밧줄로 소년과 마수를 포획했다.
“운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군. 고급 무투기도 아니고 저런 평범한 무투기로 두 명의 투황을 상대하다니.”
현재 광장에 있는 모든 이들 중 투종에 가장 가까운 이는 바로 가철이었지만, 그가 보기에도 운산과 자신 사이에는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을 정도의 격차가 존재했다.
쉬익-
가철이 운산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는 사이, 운산의 몸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칠색 이무기의 뒷 꽁무니에 새하얀 형상이 나타났다.
쾅!
그리고 칠색 이무기가 꼬리를 휘두르기도 전에 무지막지한 힘이 마수의 몸을 짓눌렀고, 처참한 비명 소리와 함께 거대한 마수의 몸뚱이가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컥…!”
운산의 일격에 상처를 입은 것은 이무기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준에게는 손도 대지 않았건만, 마수가 지면에 쳐박힐 때 생긴 충격의 여파로 대투사인 이준 역시 피를 토하고 말았던 것 이다.
“싱겁군.”
살랑거리는 바람과 함께 운산의 모습이 다시 한 번 흐릿해지는 순간, 준은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은 송곳을 붙잡았고, 이무기 역시 힘겹게 몸을 일으켜 눈앞의 괴물에게 맞서려 했다.
그러나 두 명의 투황이 달려들어도 눈 하나 꿈쩍 않는 상대에게 대투사 하나와 투왕급 마수가 대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운산이 가볍게 손을 한번 휘두르는 순간, 거대한 마수는 또 다시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맥없이 날아가 차디찬 대리석 바닥에 쳐박히고 말았다.
운산은 거대한 뱀의 방해를 가볍게 뿌리친 뒤 준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젊은이, 괜한 짓 하지 마. 운남종에서 반 년 정도만 조용히 잡혀있다 가면 돼.”
준은 난생처음 접하는 압도적인 공포 앞에 저도 모르게 검은 송곳을 든 손을 덜덜 떨었다.
그 동안 수많은 난관에서도 포기를 모르던 그였지만, 상상조차 해본적 없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상대 앞에 난생처음으로 진정한 절망이 무엇인지를 느끼고 있었다.
‘끝났어. 이런 괴물에게서 달아날 수는 없어…’
캉!
소년의 손에 들린 검은 송곳이 바닥에 떨어지며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리는 순간, 돌연 광장 바닥에 쳐박힌 이무기에게서 눈부신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이럴 수가…”
눈부신 빛이 잦아들고, 사람들의 눈을 아프게 찔러대던 섬광이 사라진 곳에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운령과 운산, 준은 물론이고 자리에 있던 천여 명의 운남종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이 놀라운 광경에 말을 잇지 못 했다.
그렇게 수 십 초 동안 지속된 적막을 깬 것은 바로 동해의 목소리였다.
“메두사?”
“메두사라고?”
얼음왕의 한마디에 자리에 있던 모두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물론, 누구보다 겁을 집어먹은 것은 동해 본인 이었다.
운산이 나타났을 때조차 태연했던 그였건만, 메두사를 보는 그의 표정은 그야말로 뱀을 만난 개구리나 다름이 없었다.
거대한 나무 위에 있던 단왕 고하도 입을 떡 벌리고 자리에 나타난 여인을 바라봤다.
“메두사 여왕이라고? 대지의 불꽃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과거 뱀인간들의 성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고하는 온 몸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설마 아까 그 뱀이 메두사 여왕이었나? 이런 미친…그럼 여태 메두사 여왕을 데리고 다녔다는 말이야?”
“메두사 여왕이라고?”
메두사의 등장에 운산의 얼굴에 처음으로 긴장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무리 투종이라 해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자신에게 온 시선이 집중되자, 마침내 뱀 여왕이 입을 열었다.
“어머…이렇게 많은 인간들이 가만히 날 바라보는 건 또 처음 있는 일이네. 보통은 내가 달려들거나 인간들이 달려드는데 말이야.”
메두사는 흥미롭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운산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흠…못 본 새 투종이 되어 있었네? 축하해.”
뱀 여왕의 여유로운 목소리에 운산의 입가에도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너도 진화에 성공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찌된 일이지? 천하의 메두사가 인간 꼬마를 싸고 돌다니 말이야.”
“뭐, 내 나름대로 사정이 좀 있어서 말이지. 네가 아까 날려버린 그 이무기 말이야. 그게 나한테 아주 중요한 거거든.”
“이런…내가 괜한 짓을 했군.”
“그래. 괜한 짓을 했지.”
메두사 여왕은 여유롭게 손톱을 매만지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좋아…그럼 그 이무기는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
놀랍게도 먼저 물러선 것은 운산이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침착했지만,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메두사의 참전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흠…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아까 말했잖아. 사정이 있다고.”
“하아.”
협상이 결렬되자, 운산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두 명의 투황에 더욱 강력해진 메두사까지…아무리 생각해봐도 꼬마 하나를 두고 싸움을 벌이기에는 판이 너무 커져 있었다.
……
그렇게 팽팽한 긴장감속에 대치하기를 수 분…마침내 운산이 입을 열었다.
“데리고 가.”
운산의 대답에 조용하던 광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참지 못한 운령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선대님! 지금 저 녀석을 보내면 운남종의 명예는…!”
“시끄럽군.”
운산의 호통소리에 메두사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그녀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막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벽력같은 호통 소리가 광장 안을 가득 메웠다.
“운령! 닥쳐라! 메두사 여왕, 운남종의 선대 종주인 내가 허락한다. 어서 저 녀석을 데리고 가! 대신 우리 운남종의 제자들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서…선대님!”
“운령 대장로! 한마디만 더 하면 내가 친히 네놈의 죄를 묻겠다!”
대장로가 끝까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운산의 새하얀 망토가 거칠게 펄럭이기 시작했다. 정말로 운령이 그의 명령을 거역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를 분위기였다.
“가게.”
결국 운령이 입을 다물자, 운산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준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메두사 여왕은 준에게 눈짓을 한번 하고는 말 없이 광장 밖에 위치한 돌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준 역시 검은 송곳을 들고 광장을 벗어났다.
메두사가 다가가자, 동해는 질겁한 표정으로 그와 거리를 벌린 뒤 날개를 펼쳤다. 아마도 예전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준과 동해, 메두사는 그렇게 천여 명에 달하는 운남종 제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돌계단을 내려갔다.
……
“휴…! 드디어 끝났군.”
준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무 위에서 마음 졸이며 지켜보던 이들의 입에서도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오늘의 일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게나. 아이들의 유치한 싸움에 휘말리게 해 미안하게 생각하네.”
운산은 주변을 쓱 둘러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하, 종주님 그러실 필요 업습니다. 아무튼 상황이 끝났다고 하니 소인들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구경을 온 사람들은 예의상 몇 마디를 남기고는 하나 둘 날개를 펼쳐 공중으로 유유히 운남산을 빠져 나갔다.
“선대님, 어떻게 저놈을 보내주실 수가 있습니까? 그자는 우리 운남종을 이 지경으로……”
마침내 대부분의 구경꾼들이 자리를 떠나자, 운령의 입에서 즉시 볼멘 소리가 튀어나왔다.
“자네가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지?”
하지만 운산은 그런 운령의 태도에 더욱 화가난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메두사 여왕은 이 나조차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일세. 게다가 그쪽에는 투황이 둘이나 붙어있지. 장로 셋이 달라붙어서 동해 하나 당하지 못 하는 판에, 대체 무슨 계산으로 그 아이를 붙잡았는지 묻고 싶군. 문승? 문승의 죽음 따위가 감히 대 운남종의 운명을 걸고 세 명의 강자와 사투를 벌여야 할 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건가?”
“흥, 문승의 일부터 오늘 일까지, 모두 그 녀석이 우리 운남종의 명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작정하고 일으킨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놈을 곱게 보내다니, 사람들이 앞으로 우리 운남종을 어찌 보겠습니까? 게다가 17살 짜리 꼬마에게 동해가 붙은 것만도 놀라운데 정체불명의 투황에 메두사 여왕까지, 분명히 그 녀석을 조종해 우리 운남종을 욕보이려는 다른 세력이 있는 것…”
“운령!”
그렇게 한창 말을 이어나가던 운령은 선대 종주의 살기등등한 호통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런 어리석은…배후가 있다고? 그렇다면 그 배후가 우리와 시비 거리를 만들기 위해 저 아이를 풀어놓았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하나보지? 그리고 17살 먹은 애송이 하나가 차기 종주 후보와 대결을 벌이고, 그 대결에서 승리했다고 그 아이를 잡아둔다? 푸하하! 내가 그 ‘배후’라면 기뻐서 춤이라도 추겠군. 운남종이 자기 얼굴에 침을 뱉은 꼴이니까 말이야! 내 엄중히 경고하지. 입 닥치게. 다시 한 번 내 결정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자네가 선임 종주의 말을 개 짖는 소리로 치부했다고 여기도록 하지. 그리고 그 뒷감당은…스스로 해야 할 것 이야.”
운산을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돌려 광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운산이 광장의 뒷수습을 시작할 무렵, 하늘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승님…”
여인이 나타나자 나설아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고, 광장에 앉아 비통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던 운남종의 제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종주님!”
“아니, 이게 무슨…?”
* * *
녹음이 우거진 오솔길.
사내 하나와 여인 하나가 앞뒤로 나란히 서서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고 있고, 둘의 머리 위로 두 개의 그림자가 떠 있다.
“거기 두 명, 날아다니면 힘들지 않아?”
여인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하늘에 있던 두 사람은 즉시 멈춰선 뒤 망설이다가 나무 위로 내려앉았다.
“선배님…죄송하게도 아직 비약의 재료가 다 모이지 않았는데… 앞으로 어떡하실 거죠?”
하지만 그토록 고대했던 연금비약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도 동해는 그다지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앞에 있는 메두사 여왕의 존재가 무척이나 신경 쓰이는 듯, 단 한순간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안절부절 했다.
“아아, 그래… 그렇군. 어찌됐든, 운남종을 무사히 나왔으니 당분간은 혼자 다녀도 괜찮은 거지? 연금비약은 나중에 천천히 만들어주게. 일단 나는 황도에 계속 머물 테니까, 천천히 완성해서 사람을 통해 보내주게.”
동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메두사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 했고, 준은 그런 동해가 어딘지 모르게 귀엽게만 보였다.
게다가 이유야 어찌됐든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준 데다가, 약속한 연금비약을 받을 수 없다는데도 개의치 않아하는 그의 태도에 준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선배님…감사합니다. 오늘 일은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언제라도 선배님이 제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준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감사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동해는 준의 그런 태도가 영 민망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헛기침을 할 뿐 이었다.
“흠흠! 무슨 또 그렇게까지… 일단 나는 황도로 가보겠네. 연락할 일이 있거든 유씨 가문으로 기별을 보내면 될 거야.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주로 그곳에 있을 테니까.”
말을 마친 동해는 또 다시 메두사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용히 준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그리고 말이야…저 여자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 정말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여자니까!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게!”
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동해는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한번 내쉰 뒤 날개를 펼쳤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