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투황, 세형
“허, 참. 일이 점점 커지는군.”
갈수록 격렬해지는 싸움을 바라보며 가철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깟 문씨 가문 장로놈 하나 때문에 얼음왕과 대적할 필요가 있나? 게다가 이준이라는 놈은 아무리 봐도 멀지 않은 미래에 투황이 될 것 같은데 말이야. 어쩌면 투종이 될지도 모를 재목인데…운남종도 제 정신이 아니군.”
“단지 문승 때문만은 아니겠지.”
가철과 함께 계속해서 상황을 방관하던 해길 역시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못 마땅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됐든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온 이상…화해 따위는 없겠군.”
동해가 운령을 막아서고, 준이 보호막으로 다가가자, 운남종의 제자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투황이라면 모를까, 대투사 따위가 그 보호막을 깰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펑!
하지만 다음 순간, 광장 안에 가득 찬 인파들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준이 검은 송곳을 휘두르자, 단 한 번만에 굉음이 울려 퍼지며 광장을 뒤덮은 백색의 보호막이 박살나 버렸던 것 이다.
“말도 안돼! 투황조차 깨지 못한 보호막을!”
그리고 이 광경을 바라보던 운령이 고함을 지르는 순간, 허공에 낯선 목소리 하나가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하하, 대 운남종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다니, 한심하군! 운남종 전체가 달려들어 머리에 피도 안마른 애송이 하나를 못 잡다니 말이야!”
운령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털끝하나 비추지 않고 있었다.
“누구냐! 감히 운남종을 모욕해!”
“하하, 내가 언제 운남종을 모욕했나, 있는 그대로 말한 건데.”
사내가 말을 마치는 순간, 광장을 뒤덮고 있던 염력 보호막이 산산조각 나며 까만 옷을 입은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그림자의 등장에 따라 광장에 있던 동해, 가철, 해길, 운령 등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또 투황 강자인가?”
“보아하니 이준의 지원군 같은데…”
가철과 해길은 서로를 마주보며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새로운 강자의 등장에 광장 안에는 또 다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젊은 제자들은 눈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사내가 어느 정도의 강자인지 알지 못 했지만, 운령을 비롯한 장로들의 표정으로 미루어보아 최하 투왕 이상급의 강자임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넌 누구지?”
잠시 후, 운령이 검은 망토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상대의 몸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강력한 염력은 운령을 긴장하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세형이라고 해두지.”
그리고 사내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주름이 가득한 까무잡잡한 얼굴이 드러났다.
“가한제국 사람이 아니군!”
운령은 상대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치켜 떴다.
“가한제국 사람이 아닌 자가 이 곳을 들어와선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스스로를 세형이라 칭한 자는 히죽 웃으며 담담하게 운령의 말을 맞받아쳤다.
“가한제국은 외부인 출입을 금지하는 법이 없는 게 사실이나, 이번 일은 우리 운남종 내부 사건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군. 나중에 귀빈실로 모셔 제대로 대접을 할 테니 조금 기다리는 게 어떻겠나? 우리 운남종은 오랜 시간 외부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지만, 외부에서 온 인사들에게는 언제든지 열려있으니까.”
“하하, 말은 잘 하는군.”
짐짓 점잖은 척 자신을 내쫓으려는 운령의 말에 사내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동해와 이준을 훑어봤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이 이준이라 불리는 친구를 사지 멀쩡한 상태로 데”려가야 하거든.‘
사내의 짤막한 한마디에 운령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동해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새로운 투황이라니, 운령 입장에서는 갈수록 상황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자네가 뭐하는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운남종을 이런식으로 도발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행동은 아닌 것 같군.”
“푸하하, 운남종이 뭐? 가한제국에서야 제법 떵떵거릴만한 세력이지만, 투기 대륙 전체를 놓고 보자면 잘 쳐줘야 이류지. 하긴, 이 조그마한 산에 틀어박혀 있으니 알 리가 있나. 오히려 내가 경고를 해주고 싶군. 우리를 이런 식으로 도발하는 것은 그다지 권할만한 행동이 아니야. 운남종 따위는 하룻밤이면 역사속의 문파로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
세형의 날선 폭언에 운령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투황, 혹은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자와 각을 세우는 것은 결코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기에 운령은 그저 이를 악물고 모욕을 참는 수 밖에 없었다.
“투기대륙에서 건너온 강자였나…거참, 황실에서도 대륙 쪽으로 꽤 많은 인원을 보냈었지만 세형이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은거한 강자인가? 그런데…대체 저 꼬맹이랑은 무슨 관계인거지?”
가철은 갈수록 해괴해지는 전개에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봐도 이준의 배후에 있는 세력은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언가임에 틀림이 없어보였다.
“허… 동해와 새로 나타난 저자까지 투황 둘에 5레벨 마수라… 이건 운남종이라 해도 별 수 없어 보이는 걸?”
그동안 쭉 가철의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해길 역시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흠, 일이 이렇게까지 됐으니 운령도 한발 물러나겠지. 겨우 문승 하나 때문에 투황 둘과 전면전을 벌일 만큼 머리가 안 돌아가는 작자는 아니니까.”
하지만 두 노인의 생각과 달리 운령의 두 주먹에는 힘이 단단히 들어가 있었다.
“허…설마 끝까지 가볼 생각인가? 아무리 봐도 현명한 행동은 아닌데…”
* * *
한편, 나설아는 연신 눈동자를 굴리며 단아한 붉은 입술을 질끈 물고 있었다.
자신과 이준의 개인적인 문제가 동해와 운남종의 싸움으로 번지고, 그걸로도 모자라 가한제국 외부의 투황까지 개입하는 사태로까지 커지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던 그녀였다.
게다가 자신이 쓰레기라고 불렀던 전 약혼자의 실력은 운남종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자신보다도 월등히 뛰어났다.
어디 그뿐인가, 정체 모를 투황을 포함해 두 명의 투황이 그를 보호하고, 연금술사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심지어 운령 대장로와 맞붙어도 크게 밀리지 않는 수준의 5레벨 마수까지…
“만일 예전에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나설아는 저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에게 그 말만큼은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는 나원승의 표정은 완전히 쓸개를 씹은 듯 일그러져 있었다. 손녀의 철없는 행동 때문에 장래 투종이 될지도 모르는 천재 연금술사를 놓쳤다는 사실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손해였다. 심지어 두 명의 투황이 그를 감싸고도는 광경을 눈으로 보고 나니 눈 앞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큭큭…”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나원승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빌어먹을! 이럴 거면 운령이 저 아이를 붙잡으려 들 때 중재하는 척이라도 할걸 그랬군. 푸하하! 나원승, 이 멍청한 놈. 그 때가 유일한 기회였어.’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허탈감과 비참함, 패배감이 그를 옥죄어 왔다. 한 시간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원승이 실성한 사람처럼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을 때, 동해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군.”
“선배님이 아시는 분인가요?”
상대를 아는 듯한 언행에 준은 즉시 고개를 돌려 동해를 바라봤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자신의 머릿속에는 ‘세형’이라는 사내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황도에 있을 때 누군가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했던 것 기억나나? 감각이 너무 희미해서 확신할 수 없었는데, 지금 가까이서 보니 확실해졌네. 저 자가 우리 주위를 맴돌던 그 자야.”
하지만 준은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릴 왜 감시했던걸까요?”
“오히려 내가 묻고 싶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걸 보니 동생을 도우려는 것 같은데 말이야. 운남종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할 정도면 실력도 실력이지만 지금까지 자네를 감시한 게 적의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소린데…그럼 자네가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동해의 말대로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준의 머릿속에는 도통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으음… 아니에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혀 접점이 없는걸요.”
“허!”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준의 표정에 동해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도 황당해요 선배님, 하지만…일단 이 곳을 벗어나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보죠.”
그 말대로였다. 일단 지금은 운남종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준은 말을 마치자마자 날개를 펼쳤다. 동해도 운령을 똑바로 노려보려 날개를 펼쳤다.
“이준!”
두 사람이 광장을 벗어나려 하자, 화가 끝까지 치밀어 오른 운령은 즉시 손을 휘둘러 백색의 활을 만들어냈다. 그가 만들어 낸 활은 족히 3미터는 되어보이는 거대한 것 이었다.
‘죽여버리겠어.’
죽일 듯이 준을 노려보는 운령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구름 활을 만들어내는 데는 막대한 염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제 아무리 투왕 레벨의 강자인 운령이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죽어!”
다음 순간, 고함소리와 함께 거대한 백색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조심해!”
그와 동시에 세형이 번개같이 준의 앞을 막아섰다.
세형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칠흑 같은 그림자가 태양빛을 가리자, 순간 광장안에 시커먼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늘과 땅 사이에 빛이라고는 오로지 투사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염력이 만들어 낸 것 뿐 이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염력이 만들어 낸 희미한 광채에 의지해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곧이어 세형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인을 맺자, 하늘을 뒤덮은 검은 장벽에서 칠흑과도 같은 밧줄이 솟아나와 거대한 구름 활에서 쏘아져 나간 백색의 화살을 옭아맸다.
흰색과 검은색의 두 빛깔이 서로 다른 에너지를 품은 채 하늘에서 맞부딪히고, 뒤이어 우레와도 같은 소리가 광장 안에 울려퍼졌다.
천지를 뒤흔들 것 같은 충돌 뒤, 검은 장벽에 구멍이 뚫리며 그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내리자 가철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소한 7성 투황인가? 어처구니가 없군.”
“게다가 암흑 속성의 염력을 다루는 것 같군…정말이지 대단해.”
암흑 속성의 염력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암흑속성을 다루는 7성급 이상의 투황이라니, 견문이 넓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해길조차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후…문제가 복잡해졌군, 운남종과 이준의 일이라면 관여할 이유가 없지만, 이국의 강자가 가한제국의 일에 끼어들게 된다면 얘기가 달라지는데 말이야.”
가철은 고민스러운 듯 눈썹을 찌푸리며 긴 한숨을 토했다. 황실이 운남종을 껄끄럽게 여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국의 강자가 가한제국 내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 더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해길 역시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가철보다는 더 냉정하게 상황을 보고 있었다.
“일단 지켜봅세. 저 투황의 행세로 보아하니 운남종과 전면전을 벌이려는 것 같지는 않아. 아마도 이준을 빼내면 그걸로 상황이 종료되겠지. 지금 섣불리 나서면 오히려 문제가 커질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