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방심의 대가 (2)
곧이어 검은 송곳의 칠흑 같은 몸뚱이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준의 온 몸에서 눈부신 불꽃이 솟아나오며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대장로님!”
시커먼 송곳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준을 쫓던 장로 중 하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운령을 불렀다.
“흥, 기고만장한 애송이 같으니!”
그러나 운령은 준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고 온 정신을 눈앞의 마수에게 집중한 채 그저 등 뒤에 2미터 정도 되는 두께의 암벽을 소환할 뿐 이었다.
웅…웅…
이윽고 기묘한 소리와 함께 소년의 손에 들린 검은 송곳 점점 더 붉게 달아오르고, 이내 주위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대기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이런!”
그리고 준의 염력이 정점에 달하는 순간, 눈앞의 이무기에게 집중하고 있던 운령이 새파랗게 질려 몸을 돌렸다. 소년의 무투기가 가진 위력이 그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태양검!”
쾅!
다음 순간, 온 광장안에 눈부신 섬광이 퍼져나가며 불타오르는 송곳이 단숨에 바위벽을 박살내고 운령을 향했다.
소년의 공격은 마치 태양을 휘두르는 듯 눈부셨으며, 그 열기는 마치 용광로의 쇳물을 뿌리기라도 하는 듯 아찔했다.
17살 소년이 발휘하는 믿을 수 없는 힘 앞에 광장의 모든 이들은 일순 숨을 쉬는 것 조차 잊고 그의 손끝을 바라봤다.
수 천개의 눈동자가 주목하는 가운에 눈부신 빛이 운령의 머리 위로 가차 없이 떨어지는 찰나, 범종을 때리는 듯한 묵직한 소리가 천지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다음 순간…
쾅!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붉은 빛이 폭발하고, 끔찍한 열기가 운령의 온 몸을 덮쳤다.
“아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백발의 노인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대장로의 몸뚱이가 대지와 충돌하기 직전, 갑자기 그의 회색빛의 염력이 폭발하며 붉은 빛을 박살냈다.
몇 초 뒤 붉은 빛과 회색 빛이 서서히 흩어지고, 그 안에서 운령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 * *
눈부신 두 빛을 가르고 걸어 나오는 백발노인의 이마에서는 검붉은 피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고, 그의 새하얀 머리와 수염은 온통 피로 물들어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마 왼쪽에서 오른쪽 귀까지 이어진 상처로, 기다랗게 이어진 상흔 아래로는 새하얀 뼈가 드러나 있었다. 아마도 운령의 반응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의 머리가 날아갔을 것이 분명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제 아무리 2격 무투기를 사용한다 해도 대투사인 준이 투왕인 운령에게 그런 상처를 입힐 수 있을 가능성은 눈꼽 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운령은 칠색 이무기와 대치하고 있었고, 등 뒤에서 덮쳐오는 준의 공격이 가진 위력을 너무나 얕봤다. 그리고 그 방심의 대가는 너무나도 참혹했다.
운령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표독스런 표정으로 눈앞의 소년을 노려봤다.
머리에서 전해져오는 격렬한 통증에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몸보다 더욱 상처를 받은 것은 그의 자존심이었다.
천 명 이상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17살 소년의 일격에 목숨을 잃을 뻔 했으니,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그의 인생에서 이보다 더 큰 치욕을 당한 적은 없었다.
그는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저장반지에서 상처회복약을 꺼내든 뒤 자신의 이마에 그대로 쏟아 부었다.
서늘한 느낌과 함께 열감이 잦아들고 조금씩 통증이 가라앉자,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격렬한 살의가 피어올랐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준은 조금 아쉬운 듯 입을 삐죽였다. 혼신의 힘을 담은 일격이었으니 더 큰 타격을 입힐 줄 알았건만, 과연 운남종의 대장로다운 실력이었다.
“아까 이준이 보여준 무투기는 아마 2격이겠지?”
한편, 이 장면을 바라보던 가철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겨우 대투사의 실력으로 운령에게 부상을 입혔으니…아마도 그렇겠지.”
해길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철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에게 있어 오늘 일은 최근 몇 년, 아니 십여 년 사이 가장 재미있는 구경이었다.
“놀랍군. 아직 보여주지 않은 기술이 있다니. 나설아와의 시합에서는 제 실력을 다 보여준 게 아닌 것 같은데?”
“어이가 없군. 천지의 불꽃에 비행 무투기, 투왕급 마수, 거기에 2격 무투기까지…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강대한 세력이 그를 지원하고 있는 것 같네. 그렇지 않고서야 17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 저런 물건들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어. 대투사가 된 것이야 타고난 재능이라 치더라도, 나머지 물건들은 재능으로 해결되는게 아니지 않은가.”
해길의 추측은 매우 타당해보였다. 그리고 준의 배후에 어떤 세력이 붙어있는 것이라면…그 세력은 결코 운남종보다 약할 것 같지 않았다.
‘이준 이 녀석, 꽤나 센 수를 뒀군.’
에너지막의 가장 자리 부분에 있던 동해도 급변한 상황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준의 공격에 당해 처참하게 피를 흘리는 운령을 보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선배님, 얼마나 더 걸리죠? 빨리 달아나야 할 것 같은데요?”
바로 그 때, 준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재촉하자 동해가 손을 들어 손 가락 세 개를 펼쳐보였다. 3분이라는 의미인 듯 했다.
“알겠습니다.”
대화를 마치자마자 동해는 미친 듯이 염력을 쏟아내며 새하얀 보호막을 거세게 두드려댔다.
이미 운남종과의 관계는 끝장이 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준을 탈출시키고, 실력을 회복하는 것 뿐 이었다.
‘흥, 상황이 이렇게 되니 오히려 마음이 가볍기까지 한걸. 고민할 필요 없어 좋군.’
동해가 망설이는 마음을 완전히 접고 벽을 부수는 사이, 운령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운남종 제자들은 명령을 따르라!”
운령이 고함을 지르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고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구름 결합!”
잠시 후…대장로의 명령에 따라 운남종의 제자들이 하나 둘 고함을 질러 염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천 명이 넘는 제자들이 눈을 감자 이내 그들의 상체에서 구름 같은 백색의 염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제자들의 몸에서 나온 염력이 한군데 응집하기 시작하자 이내 광장 전체에 희뿌연 안개가 가득 찼다.
멀리서보면 산 정상에 자욱하게 안개가 내려앉은 듯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 안개의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운령 자신이었다.
“장로님들, 제게 힘을 보태 주십시오!”
다시 한번 대장로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십 여명의 장로들이 일사분란하게 몸을 날려 광장 주위에 있는 나무로 제각각 흩어졌다.
곧이어 장로들이 자리를 잡고 손을 휘두르니 산정상에 자욱하게 낀 구름이 요동치며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백색의 안개는 이내 단단하게 뭉쳐 거대한 백색의 나선형 구체로 변화했다.
“합!”
운령은 완성된 구체를 보고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의 표정에는 이번만큼은 제 아무리 대단한 재주가 있어도 별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얼굴의 절반이 피로 뒤덮인 백발의 노인이 악마같은 기세로 오른손을 휘두르자, 천 여 명의 염력이 담긴 거대한 구체가 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동생! 조심하게!”
동해는 백색 구체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힘을 느끼고는 다급하게 준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늦었어! 그의 속도로는 피하지 못해. 하하!”
운령은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계속해서 구체를 조종했고, 공포스러운 백색 구체는 어느 새 준의 코앞까지 날아가 있었다.
그리고 준이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순간, 갑자기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쾅!
“끼이이이!”
하지만 운령의 기대와는 달리 운남종의 광장을 가득 채운 비명 소리는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백색 구체가 천천히 흩어지고, 천 명의 염력이 만들어 낸 거대한 충격파가 흩어지자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거대한 마수의 형상이 드러났다.
준을 감싸고 천여 명의 제자들의 염력이 담긴 공격을 받아낸 칠색 이무기의 몸은 이미 예전의 아름다운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의 몸을 뒤덮고 있던 아름다운 비늘은 절반 이상이 무너지고 갈라져 있었고, 검붉은 피가 곳곳에서 솟아나오며 피비린내를 풍겼다.
하지만 이무기는 자신의 부상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천천히 꿈틀거리며 또아리를 풀고 품안에 있던 준이 무사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안도한 듯한 이무기의 신비한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준은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받았다. 소년은 재빨리 저장반지에서 연금비약을 꺼내 이무기의 상처를 지혈 하는 동시에 싸늘한 눈으로 운령을 노려봤다.
“흥, 운 좋은 녀석! 첫 번째는 그 짐승이 구해준다치더라도, 어디 두 번째도 받아내나 보자!”
운령은 준과 눈이 마주치자 더욱 살기 등등한 표정으로 손을 휘둘렀고, 이내 두 번째 구체가 나타났다.
“지옥으로 가버려!”
노인의 손놀림에 따라 다시 한번 나선형의 구체가 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고통으로 꿈틀대는 칠색 이무기를 바라보던 준은 이를 악물고 검은 송곳을 움켜잡았다. 그의 몸 속에서는 대지의 불꽃보다도 더 뜨거운 분노가 솟구치고 있었다.
“이봐, 운령. 명색이 운남종의 대장로인데, 정말이지 부끄러운 줄 모르는군!”
하지만 백색의 구체가 준에게 날아드는 순간, 동해가 그 앞을 막아섰다.
“얼음 거울!”
고함 소리와 함께 십 미터도 넘는 거대한 얼음 거울이 솟아나고, 백색의 거대한 구체는 준이 아니라 얼음왕이 만들어낸 거울에 부딪혀 산산히 박살나고 말았다.
“동생, 괜찮나?”
구체가 사라지자마자 동해는 번개처럼 몸을 날려 준의 앞을 막아섰다. 냉기를 뿜어내는 투황의 뒷모습에 준은 순간 자신을 지켜주던 스승의 등이 떠올라 마음이 울컥했다.
“덕분에요.”
“이거 참 골치 아프게 됐군. 아무리 그래도 운남종의 대장로가 17살짜리 꼬마 하나 잡자고 운남종의 비전을 꺼내들다니…”
동해는 아래에 있는 운령을 보며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운남종 제자들의 몸속에 염력이 남아있는 한 이 공격은 끝나지 않아. 한마디로 수천 명과 싸우는 것이나 다름없지. 아니, 그보다 더 나빠. 잔가지 천개 부러뜨리는 거야 일도 아니지만, 그 천개가 한데 뭉쳐있는거나 다름 없으니까.”
“후…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준이 긴 한숨을 내쉬며 질문을 던지자, 동해가 손을 들어 광장을 덮은 백색의 결계를 가리켰다.
“저것만 깨지면 자네를 데리고 떠날 수 있어. 그런데 지금 자네를 버리고 저걸 깨고 있을 수가 없군. 그렇다고 이 마수에게 맡기자면 저 보호막을 깨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거야. 투왕급의 힘으로 단시간에 깰 수 있을만한 물건이 아니니까.”
동해의 설명을 듣던 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그럼 저랑 이 녀석이 힘을 합쳐볼게요. 일단은 저 공격을 막는게 더 급해보이니까요. 선배님이 저 공격을 막아주세요.”
“흠… 알겠네. 일단 자네가 살아야 탈출이고 뭐고 의미가 없으니까. 그 사이 진율희가 도착하지 않길 바랄 수 밖에.”
준과 이무기의 힘으로는 광장을 뒤덮은 보호막을 깨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자명했지만,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동해! 정말 끝까지 운남종에 맞서겠단 말이지! 그렇다면 네놈도 운남종의 적이다!”
운령은 동해가 끝까지 준을 지키려들자 더욱 분노한 표정으로 고함을 질러댔다.
동해를 죽여서라도 준을 잡을 생각인 것이 분명했다. 그의 살의를 반영하듯, 이번에 만들어진 것은 이전의 그 염력 덩어리보다 두 배는 더 커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