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방심의 대가 (1)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마수가 대장로와 맞서자, 운남종의 젊은 제자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17살 난 대투사 하나를 놓고 운남종의 대장로와 장로, 집사들이 몰려나오고, 5레벨 마수와 전설의 얼음왕이 대치하는 광경은 참으로 기묘하도고 놀라웠고, 동시에 공포스러웠다.
준은 칠색 이무기의 온 몸을 막힘없이 흐르는 유려한 염력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그의 머리에 대지의 불꽃을 얻을 때 이 작은 뱀을 거두지 않았더라면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났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후! 이제 됐어. 칠색 이무기가 저 늙은이를 상대하는 동안만 버티면 동해 선배가 장로들을 처리하고 도와주러 올 거야. 그 때까지만 운남종의 집사들을 피해 도망 다니면 돼. 설마 저들 중에 비행 무투기를 가진 사람이 있지는 않겠지?’
소년은 머릿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운령과 대치하고 있는 칠색 이무기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 때, 운령의 손 위에 단단한 회백색 검이 생성되었고, 일순 허공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 칠색 이무기 역시 고개를 들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운령을 향해 돌진했다.
쾅…!
형형색색의 비늘을 가진 마수와 성성한 백발을 휘날리며 염력으로 만들어진 회색검을 손에 든 노인이 부딪히는 순간, 우뢰와도 같은 폭음이 하늘에 울려 퍼졌다.
운령은 단단하기로 이름난 바위 속성 염력의 힘을 자랑이라도 하듯 망설임없이 접근접을 택했다.
그의 손에 들린 암석 같은 장검이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람을 갈랐고, 회색 검광이 이무기의 눈과 코를 향해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하지만 거대한 마수는 그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유연함과 민첩함으로 꼬리를 휘두르며 상대가 휘두르는 회백색 검을 가볍게 받아내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회백색의 검과 이무기의 비늘이 수십 차례 맞부딪히며 날카로운 소음이 울려 퍼지고, 운남종의 대장로는 끊임없이 등 뒤의 날개를 펄럭이며 어지러이 검을 날렸다.
그렇게 불과 1~2분 사이 백번도 넘게 검을 휘두른 백발의 노인은 무지개빛으로 빛나는 마수의 단단한 표피를 바라보며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선 거대한 뱀의 단단함과 민첩함은 그가 생각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이럴 수가…이건 웬만한 투왕급 강자 이상이지 않은가.’
그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눈앞의 미물이 상상 이상으로 영악하다는 점과 ‘독’이었다.
놈은 염력 검을 정면으로 받아내기 힘들 것 같을 때면 유연하게 몸을 놀려 교묘하게 상대의 공격이 가진 위력을 분산시켰고, 운령이 기회를 보아 염력을 집중시킨 뒤 강력한 무투기를 사용할 때 마다 무지개빛의 기묘한 독구름이 이를 막아내고 있었다.
치익.
운령은 또 다시 자신의 회백색 무투기를 막아낸 독 안개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사실 전투가 시작되기 전만해도 그는 칠색 이무기가 제 아무리 거대하고 강력하다고 해도 시간이 조금 걸릴지언정 결국에는 자신이 이길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온 힘을 다해 무투기를 사용할 때 마다 이무기는 독 안개를 내뿜었고, 독안개에 닿은 그의 염력 검이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힘없이 타들어갈 뿐 이었다.
그리고 이미 수 십 차례나 독안개에 당한 그의 회백색 염력 검은 더 이상 무기로써의 기능을 다할 수 없는 상태였다.
‘빌어먹을! 영악한 놈 같으니라고! 일반적인 공격은 모두 비늘로 막아내고, 무투기는 번번히 독으로 막아내다니…’
전황이 자신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자 조급해진 운령은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커다란 그림자가 흉흉한 기운을 내뿜으며 그를 향해 덮쳐왔다.
“거암 방패!”
운령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마수의 공격에 맞서 염력을 끌어올렸다. 쓸모가 없어진 염력검을 해제하고 팔을 앞으로 내밀자, 회백색의 에너지가 빠른 속도로 모여들어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나타나 거대한 방패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펑!
곧이어 거대한 꼬리가 방패 위에 거세게 떨어지자 거대한 암석 방패에 금이 갔고, 다시 한 번 시커먼 그림자가 춤을 추자 거대한 바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광장안이 먼지로 가득 찼다.
그리고 잠시 후, 뿌연 먼지를 가르며 회백색의 섬광이 이무기의 턱밑에 나타났다. 백발노인의 팔 전체에는 바위보다 더 단단한 회백색의 염력이 깃들어있었다.
콰직…!
마침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지개 빛의 비늘이 갈라지며 선혈이 뿜어져 나오자, 운령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대장로의 얼굴은 채 1초도 지나지 않아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제대로 된 일격을 당한 마수가 주춤하기는커녕 이전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속도로 꼬리를 휘둘렀기 때문이다.
쾅!
“크윽!”
너무나 빠른 공격 앞에 미처 몸을 빼지 못한 운령은 그대로 팔을 교차해 거대한 꼬리를 막아냈다.
쾅!
다시 한번 거대한 굉음과 함께 새하얀 먼지가 광장 안을 가득 메웠다. 이번에 일어난 먼지는 운령이 바닥에 쳐박히며 일어난 것 이었다.
운령이 떨어지자 광장 전체에는 거미줄처럼 금이 가기 시작했고, 이 광경을 바라보던 운남종의 젊은 제자들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들의 불안감을 불식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백발의 노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쿨럭…!”
……
운령은 자신이 칠색 이무기를 얕봤다는 것을 가슴 깊이 후회하고 있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듯 했다.
대장로의 새하얀 수염에는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던 것 이다.
그가 잠시도 쉬지 않고 몸을 일으킨 것은 오로지 운남종이라는 거대한 세력 대장로의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세 장로와 동해가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의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본래 그의 계획대로라면 자신이 칠색 이무기를 단숨에 제압하고 동해를 협공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마수를 단숨에 제압하기는커녕 부상을 입고 말았고, 세 명의 장로마저 동해에게 밀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낭패군. 장로들은 동해를 막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고 있는데다가 제자들 중에는 비행이 가능한 자가 없으니…바람 속성을 가진 다른 장로들을 믿는 수밖에 없나?’
생각을 마친 운령을 고개를 돌려 광장에 남아 있는 장로들에게 손짓을 하고는 다시 날개를 퍼덕여 상공에 있는 이무기에게 다가갔다.
운령의 손동작을 본 열댓 명의 장로들은 잠시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고민하다가 상황을 파악하고는 염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하얀 망토를 걸친 네 명의 장로는 바람의 힘을 빌려 허공으로 올라간 뒤 각자 사방으로 흩어져 목표를 둘러쌌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준은 즉시 자신의 양날개를 펄럭여 네 명의 장로와 거리를 유지하려 시도했다.
네 명의 장로는 자신들과 거리를 두려는 준을 보고도 조금도 조급해하는 기색 없이 차분하게 준의 퇴로를 차단했다.
준은 네 명의 장로들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진영을 잡는 듯하자 어떻게든 그들이 진을 짜지 못하게 하려고 사방으로 정신없이 날아다녔다.
불과 몇 분 전 투왕급의 세 장로가 만든 염력 감옥에 갇혔었기 때문에, 분명히 그들이 진영을 잡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냥감이 정신없이 날뛰며 진을 짜지 못 하도록 하자, 그제서야 네 장로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준의 예상이 적중했던 것 이다.
물론 그들 중 누구하나 준보다 약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날개가 없었으니 비행속도라는 면에서만큼은 준을 따라잡을 수 없었고, 진을 짜서 염력 감옥을 만들지 못한다면 목표를 잡을 도리가 없었다. 준은 교활하게도 이점을 백분 활용해 진을 짜지 못하게 정신없이 날아다녔던 것 이다.
그렇게 의미 없는 추격전이 반복되며 수 분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인내심이 바닥난 장로 중 하나가 준을 향해 바람 칼날을 날렸다.
그러나 죽일 마음 없이 날린 바람칼날 정도로는 천지의 불꽃의 보호를 받고 있는 준의 염력갑옷을 뚫을 수가 없었다.
캉!
결국 바람 칼날은 준의 염력 갑옷에 살짝 흠집만 냈을 뿐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 했고, 준은 쉴 새 없이 날아다니며 동해를 바라보았다.
동해는 세 명의 투왕을 상대로 점차 승기를 잡고 있었다. 염력을 쥐어 짜내가며 도망을 다닌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
쾅!
잠시 뒤 다시 격렬한 폭음과 함께 세 사람의 그림자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얼음왕의 염력에 당한 세 장로는 동상이라도 걸린 듯 새파랗게 질려 온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내 충고하나 하지, 자네들 몸속에 있는 냉기는 아주 특별한 물건이야. 한 시간 정도 가만히 앉아 냉기를 몰아내면 괜찮지만, 무투기를 사용하는데 염력을 쓴다면 혈관과 내장을 다치게 될 걸세. 그리고 일단 냉기가 몸속에 깊이 파고들게 되면 운이 좋아도 2주, 최악의 경우 회복에 얼마나 걸릴지 나도 장담할 수 없네.”
동해는 하늘에서 천천히 숨을 내뱉으면서 담담하게 세 장로를 향해 경고를 남겼다.
세 투왕은 결국 움찔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자리에 주저앉아 냉기를 몰아내기 위해 전신에 염력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끌끌…얼음왕이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아. 역시 만만찮은 늙은이야.”
이 광경을 바라보던 가철은 혀를 차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말일세. 고작 2성 투왕 셋으로는 시간벌이가 한계겠지.”
해길은 이런 결과를 예상했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오히려 그의 관심사는 칠색 이무기에게 있는 듯,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운령과 마수가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을 향해 있었다.
“거 참… 처음 보는 마수인 것 같은데, 대체 무슨 마수이길래 운령과 맞설 수 있을꼬…”
동해는 세 장로를 격퇴하자마자 즉시 광장을 뒤덮고 있는 거대한 보호막 앞으로 날아갔다.
그가 양손을 흔들자 서늘한 냉기가 피어오르며 순식간에 두터운 방어막을 강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어막에 균열이 생겨나지 시작했다.
“동해, 도를 넘지 말게!”
칠색 이무기와 대치하고 있던 운령은 이 광경을 바라보자 사색이 되어 고함을 쳐댔지만, 아무리 소리를 질러대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운령이 한눈을 파는 순간, 즉시 칠색 이무기의 입에서 독액이 뿜어져 나왔다.
“제기랄!”
운령은 낮은 목소리로 욕을 내뱉으며 두꺼운 바위벽을 만들어내 독액을 막아냈다.
하지만 칠색 액체는 삽시간에 바위벽을 녹여버렸고, 운령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뒤로 몸을 날렸다.
* * *
한편, 네 장로를 피해 정신없이 날아다니던 준은 동해와 운령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저 늙은이만 물러서면 운남종에서 내가 떠나는 것을 막을 사람은 없다는 거군.’
그리고 다음 순간, 검보라빛 날개가 펄럭이며 소년의 몸이 운령의 등 뒤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연신 도망 다니는데 급급하던 준이 갑자기 운령을 향해 날아가자, 광장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투사인 준이 운령에게 날아간다는 것은 제 발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준은 양손으로 검은 송곳을 움켜잡은 채 조용히 염력을 끌어올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