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6화. 칠색 이무기의 등장
동해의 참전으로 인해 광장 안은 그야말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제 아무리 운남종이라해도 투황급 강자의 개입은 예삿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 명의 투왕은 자신들이 합심해 만들어낸 방벽이 일격에 박살이 나자, 즉시 날개를 펴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런.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다 했더니 얼음왕이었군.”
잠시 후 세 사람의 장로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이 입을 열자, 나머지 둘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앞의 상대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이럴 수가! 동해가 아직 살아있을 줄이야.”
그들과 동해는 비슷한 세대의 강자로, 얼음왕이 그 위명을 떨치며 가한제국 10대 강자에 이름을 올렸을 당시 그들은 운남종의 집사에 불과했으니, 공포를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반면 동해는 세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다는 듯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고개를 돌려 준을 바라봤다.
“동생, 괜찮나?”
“덕분에요. 그런데 선배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괜찮을 것 같네요.”
“후…이봐 동생. 이 세 명이 마음먹고 달려든다면 나도 결과를 장담하기는 어려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알아요. 싸우는 것 말고, 달아나는 건 가능할까요?”
동해와 대화를 나누며 주위를 둘러보던 준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 사이 백 명에 가까운 운남종의 제자들이 갑자기 주위를 둘러쌌기 때문이었다.
현장에 나타난 새로운 운남종의 제자들은 복장으로 보나 풍겨져 나오는 기운으로 보나 진작부터 자리에 있던 젊은 제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실력을 가졌을 것이 분명했다.
“나 혼자 떠나는 건 별 문제 될 게 없지만 자네를 데려가는 건 조금 힘들 것 같긴 하군. 그래도 종주가 없으니 어떻게든 될지도 모르겠어.”
주위에 모여든 운남종의 제자들을 바라보던 동해는 진율희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능하단 소리군요.”
어렵지만 가능할 것 같다는 말에 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최선을 다 해 보지.”
반면 동해의 얼굴에서는 완전히 웃음기가 사라진 상태였다. 얼음처럼 싸늘해진 그의 얼굴은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대변하고 있는 듯 했다.
“동해,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 했었는데, 정말 뜻밖이군.”
운령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에 있는 동해를 바라봤다. 얼음왕이 돌아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조그마한 소년 하나를 위해 운남종과 맞설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하고 있었기에 당혹스러운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하! 운령, 몇 년 간 꽤 잘 나갔다고 들었다. 네가 수석 장로라니, 내가 없는 새에 제법 실력이 들었나보군.”
“허허. 그저 종주께서 나 같은 노인네를 믿어 준 덕분이지.”
운령은 어색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지난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그보다 이 일은 나 운남종의 명성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자네가 함부로 나서지 않았으면 하는데…자네의 행동이 유씨 가문과 운남종 사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하지만 운령의 정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동해는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어보였다.
“미안하군. 이쪽도 사정이 좀 있어서 말이야. 오늘은 내 얼굴을 봐서 그냥 넘어가주면 안되겠나?”
운령은 그 말을 듣자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동해, 문승은 우리 운남종 사람이었어. 게다가 운남종을 떠나고 나서도 우리와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지. 그런 인물이 영문도 모를 죽음을 당했고, 이제야 그 수수께끼가 풀리려고 하는데 어찌 저 소년을 그냥 놓아줄 수가 있겠는가?”
상대의 단호한 말에 동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운령의 성품으로 보아 절대로 그냥 보내줄 리가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그의 입으로 확답을 듣고나니 상황이 더욱 암담하게만 느껴졌다.
결국 타협이 어렵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동해가 먼저 몸을 움직였고, 그와 거의 동시에 운령의 호통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막아!”
대장로의 명이 떨어지는 순간, 하늘에 있던 세 노인은 즉시 동해의 앞을 막아섰다.
그와 동시에 광장 밖에 나타난 100여명의 운남종 제자들이 벽력같이 고함을 지르며 염력을 내뿜었고, 희뿌연 안개와도 같은 에너지가 한데 뭉쳐들며 광장을 뒤덮기 시작했다.
펑, 펑…!
백색의 거대한 염력 덩어리는 마치 솥뚜껑처럼 동해와 준을 억눌렀다. 동해는 이에 맞서 한 손으로 준을 보호하면서 세 노인을 향해 돌진했다.
곧이어 동해가 손을 흔들자 거대한 백색의 기둥이 바닥에서 치솟았지만, 운남종의 제자들이 만들어낸 보호막은 투황의 힘 앞에서도 요동치며 흔들릴 뿐 쉽사리 깨지지 않았다.
“제기랄, 생각보다 단단하군.”
동해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연달아 거대한 백색의 벽을 두들겨 댔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백색의 벽은 깨지기는커녕 더욱 더 단단하고 두터워지고 있었다.
“동생, 일단 물러서게. 몸 조심하고, 이건 시간이 좀 필요하겠어.”
말과 함께 얼음왕이 손을 흔들자 기묘한 힘이 준을 떠밀었고, 다음 순간 서늘한 냉기와 함께 동해의 몸 주위에 무수히 많은 얼음 덩어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동해의 손짓을 따라 하늘을 가득 메운 얼음덩이들이 세 명의 투왕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들었다.
쾅…!
동해는 자신의 별명이 왜 얼음왕인지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별처럼 많은 얼음을 조종하며 노도처럼 세 명의 투왕을 향해 공격을 퍼부어댔다.
세 장로는 폭풍처럼 몰아치는 동해의 공격 앞에 서로 힘을 모아 방어하기도 버거워보였다.
아마 세 사람의 장로 중 한 사람이라도 집중력이 흐려진다면 순식간에 방어선이 뚫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새하얀 보호막으로 뒤덮인 공간 안에 매서운 칼바람이 불며 끊임없이 폭음이 터져 나오고 있는 사이,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운령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의 눈동자에는 방어선을 돌파하느라 정신이 팔린 동해와 멀리 떨어져 있는 준의 뒷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쉭-
곧이어 운령의 두 날개가 펄럭이더니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준의 발치에 노인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동해가 왜 너를 보호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너를 잡으면 그도 어쩔 수 없겠지.”
준은 갑작스레 나타난 운령의 모습에 급히 날개를 펼쳐 거리를 벌렸고, 이내 하늘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추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검보랏빛 날개를 가진 그림자가 갈색 날개를 가진 그림자에게 따라잡히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준이 상대의 공격을 감지했을 때는 이미 상대의 날카로운 손끝이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먼 곳에서 세 투왕을 상대하며 수시로 준을 살피던 동해는 이 광경을 보고 안색이 급변해 즉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세 장로는 잠시 얼음왕의 공격이 주춤해진 틈을 타 미친 불나방처럼 달려들었고, 동해는 그대로 손발이 묶여버릴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준과 운령을 향했다. 만일 준이 잡히기라도 한다면, 제 아무리 동해라도 어쩔 도리가 없어보였다.
“보아하니 곧 끝날 것 같군,”
가철이 짤막하게 탄식을 내뱉자 해길 역시 그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몇초 뒤,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일이 벌어졌다.
노인의 손이 소년의 목덜미에 막 닿으려는 순간, 갑자기 준의 소매에서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솟아나와 운령을 날려버렸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 했던 기막힌 상황에 격전을 벌이고 있던 동해를 비롯한 세 명의 투왕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멈추고 준과 운령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말도 안돼, 어떻게 대투사 따위가 운령님을?”
“방금 그건 대체 뭐지?”
나무 위에 있던 가철 역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는 운령을 밀어낸 것이 준이 아니라 그의 소매에 있던 정체불명의 ‘무언가’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아마 꼬리였던 것 같네.”
그 때, 해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도저히 정체를 모르겠군. 운령 대장로를 단번에 날려버릴 정도의 힘이라니! 이 정도면 정말로 저 아이가 문승을 죽였을 가능성이 있겠어.”
“이 자식, 소매 안에 대체 뭘 숨겨 놓은게냐!”
잠시 후, 운령이 손을 덜덜 떨며 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그의 손끝에 남은 힘으로 미루어보아, 준의 소매 안에 있던 ‘무언가’는 절대로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준 역시 칠색 이무기가 나설 것 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던 터라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했다.
바로 그 때, 준의 소매가 펄럭이며 그 안에서 아름다운 비늘을 가진 작은 아기 뱀이 나타났다.
칠색 이무기의 신비한 비늘은 햇볕을 받아 더욱 기이하고 아름다운 빛을 뽐내고 있었다.
상대의 팔목 위에서 기묘한 빛을 내뿜는 끈 같은 것을 발견한 운령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5레벨 마수라니… 갈수록 어이가 없군…”
준은 운령을 한번 훑어보고는 조용히 칠색 이무기의 차가운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 작고 귀여운 생물안에 들어있는 공포스러운 존재가 두렵기는 했지만, 칠색 이무기가 아니었다면 단박에 운령에게 잡히고 말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복잡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사이 뱀은 부단히 준의 손가락에 있는 저장반지를 핥아대며 탐욕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칠색 이무기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 챈 준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저장반지 안에서 하늘 사자의 정수가 담긴 약병을 꺼내들었다.
준이 손가락 끝에 보라색 액체를 묻혀 내밀자, 아기 뱀은 걸신들린 것처럼 연신 그것을 핥아댔다.
두 방울의 자수정원을 삼킨 칠색 이무기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이 녀석, 먹었으면 일을 해야지…”
준은 먹자마자 졸린 표정으로 눈을 꿈뻑이는 칠색 이무기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은 뒤 보라색 액체가 담긴 약병을 흔들며 운령을 가리켰다.
“나를 좀 도와줘. 그럼 이걸 배불리 먹게 해줄게.”
소년의 말에 아기 뱀은 눈을 깜빡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준이 약병을 두어번 정도 더 흔들자, 결국 녀석은 보라색 액체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칠색 이무기의 아름다운 비늘이 찬란한 빛을 내뿜더니 빛의 궤적을 따라 놈의 몸이 고무공마냥 팽창하기 시작했다. 아기 뱀의 작은 몸뚱이는 불과 몇 초 사이 10미터도 넘는 거대한 형상을 갖추었고, 부풀어오른 몸만큼이나 거대한 에너지가 사방으로 뻗쳐나갔다.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뱀이 내뿜는 아름다운 빛과 강대한 힘 앞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입을 벌리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동해 역시 칠색 이무기를 본 것은 처음이었으니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어…동생이 저런 마수를 데리고 다니고 있었다니, 여태 몰랐군. 하여간 정말 모를 친구야.”
* * *
한편, 이 광경을 바라보는 운령의 얼굴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자네들은 잠시 동해를 막고 있게, 저 녀석은 나에게 맡기고! 그리고 운남종의 모든 집사들은 명령에 따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준을 잡아!”
이미 한 번의 격돌로 인해 칠색 이무기의 힘을 실감한 터라 운령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5레벨 마수라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운남종이 자랑하는 고급 무투기가 있으니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는 운남종의 세 장로와 전투를 바라보고 있는 동해를 한번 바라본 뒤 다시 이무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그의 손에서 회백색의 무투기가 단단한 암석처럼 그의 팔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