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세 명의 투왕
한편, 운령은 상대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서서히 염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고, 대장로의 행동에 광장의 분위기가 더욱 살벌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준이 못 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운령을 바라보자, 대장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운령 장로님, 왜 그러시죠? 아까는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란다고 하시더니, 이 결과가 좋은 결과가 아닌가 보군요?”
운령 못지않게 살벌한 준의 목소리에 순간 광장에 침묵이 맴돌았다.
“자네, 혹시 몇 달 전에 문씨 가문에서 장로 하나가 살해당한 일에 대해 알고 있나?”
문승은 운남종에서 나간 뒤로도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고, 그런 그의 죽음은 운남종에 대한 정면 도발에 가까웠다. 하지만 사망 경위를 조사해봐도 두 명의 투황급 강자가 그를 살해했다는 것 외에는 딱히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뜻 밖에도 지금 운령이 그 문제를 거론하자, 장내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문승의 죽음과 이준과는 관계가 없어보였지만, 대장로의 태도는 명백하게 준에게 그 일에 대해 책임을 묻고 있었다.
게다가 관계가 있다고 해도, 투령급인 문승에게 1성 대투사에 불과한 이준 따위가 상대가 될 리가 없었으니 운남종 사람들조차 대장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 했다.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군요. 지금 그 문제가 왜 나오죠?”
운령의 질문에 준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자 사람들 역시 준의 생각에 동의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발뺌하는 겐가? 설아와 도담이 운남종을 대표해 그의 연회에 갔었지. 그리고…여기 있는 도담 장로가 그 때 문승을 죽인 자의 얼굴을 봤다는군.”
사람들은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정작 터무니없는 질문을 받은 당사자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운령을 노려볼 뿐 이었다.
준은 그렇게 한참동안이 운령을 노려보다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운령 장로님, 문승님께서 돌아가신 일은 안타깝습니다만…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 분은 투령급 강자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투사인 제가 그 분을 어떻게 죽일 수 있죠? 또, 도담 장로님이 그 때 제 얼굴을 봤다면, 왜 오늘 진작 알아보시지 못 하고 대결이 끝나고 나서야 제 얼굴이 기억났다면서 저를 붙잡으십니까? 게다가 공교롭게도 나설아와 제 대결이 끝나고, 문승님의 살해범으로 저를 지목한 유일한 목격자가 하필이면 운남종의 장로라니, 누가 들어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준의 논리 정연한 반박에 운령은 잠시 할 말을 잃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갑자기 나설아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설아야, 너도 그 현장에 있어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느냐. 그 사람의 모습이라든지, 특징이라든지 생각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다오.”
나설아는 잠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다가 준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대장로님, 그 때 신비로운 그 강자는 온 몸에 망토를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나설아의 답변에 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갑작스럽게 끼어든 도담의 한마디에 해길과 가철, 나원승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갔다.
“대장로님! 그 사내가 그 때 분명히 하얀 화염을 사용했었습니다!”
‘하얀 화염’이라는 말에 기철의 얼굴에도 살기가 감돌았다.
“하얀 화염이라고…?”
‘임현’과 ‘이준’이 동일인물이라면, ‘임현’이 대회에서 사용했던 하얀 화염 역시 ‘이준’의 것일 수 있었다.
물론 한 사람이 마수의 불꽃과 천지의 불꽃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수준을 넘어 두 개의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 밖의 일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 ‘임현’은 분명히 하얀 불꽃을 사용했었다.
동해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준의 반응을 살폈다.
이제 운남종과 싸울지 말지는 모두 준의 결정에 달려있었다.
하지만 준은 한참동안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어깨를 한번 으쓱일 뿐 이었다.
“죄송하지만, 여전히 도담 장로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하, 모른다는 게지? 이준, 연금술사공회에서 임현이란 이름으로 우승한 그자도 바로 당신이 아닌가. 이 점은 지금 당장이라도 수 십 명을 앞에 세워 증언 시킬 수 있네. 계속 변명할 것인가?”
이 대목에서는 준도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준의 침묵을 인정으로 받아들인 운령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대회 참가 당시 흰색 화염을 사용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위력이 대단했지. 이 또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증언할 텐데, 거짓말을 할 순 없겠지.”
“세상에 흰색 화염을 쓰는 사람이 저 뿐만이 아닐 텐데, 그럼 그자들도 함께 용의선상에 오르게 되는 건가요?”
“흰색 화염을 사용하는 다른 이들은 도담에게 용의자로 지목되지 않았네. 당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어찌 그들과 비교할 수 있겠나?”
운령의 날카로운 반박에 또 다시 광장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준에게로 쏠렸다.
“이준이라는 녀석, 정말 정체를 모르겠군.”
상황이 이쯤되자 고하는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령의 말이 사실이라면, 눈 앞의 소년이 문승을 죽인 자와 동일 인물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17살 짜리 대투사도 어이가 없는데, 17살짜리 투황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그것은 최고 수준의 연금술사인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부작용 없는 연금비약을 하루가 멀다 하고 먹는다 해도 17살에 투황이 될 수는 없었다.
“운령 장로님, 장로님과 의미 없는 설전을 펼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확증이 없으시다면 멋대로 절 의심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확실한 증거도 없이 추측만으로 밀어붙여 될 일이라면 가한제국 최강의 세력인 운남종이 범인으로 못 만들 사람이 어딨습니까?”
준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리려 했지만, 운령이 또 다시 그를 붙잡았다.
“미안하지만 문승을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제대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자네를 보낼 수 없네. 집행부!”
곧이어 대장로의 명이 떨어지자, 운남종의 집행관들이 준을 에워쌌다.
“이 자식들이…!”
준은 사방에서 덮쳐드는 그림자에 맞서 즉시 검은 송곳을 휘둘렀고,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집행관들이 뒤로 걸음을 물렀다.
“운령 장로님, 뭐 하시자는 거죠?”
“미안하군 이준군. 하지만 자네를 둘러싼 의혹들이 풀리기 전에 이곳을 떠나긴 힘들 것 같네. 일단 운남종에서 머물러주게. 절대로 위해를 가하는 일은 없을 걸세. 종주님께서 돌아오면 모든 일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자네의 처분을 결정하도록 하지.”
“하…”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는 운령의 태도에 준은 검은 송곳을 집어넣은 뒤 다시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운령이 상대가 저항을 포기했다고 판단하려는 순간,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잡아!”
운령에 외침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도담이었다. 그는 준을 향해 염력을 쏘는 동시에 잽싸게 몸을 날려 준의 퇴로를 차단했고, 그와 거의 동시에 세 명의 장로가 날아올라 완벽하게 길을 막아섰다.
‘투왕 셋이라…빌어먹을…역시 운남종이군.’
“이준, 네놈이 뭔가 캥기는게 있긴 있는 모양이구나!”
운령은 준이 도망을 치려하자 이 때다 싶어 주위를 설득하려 들었다.
“여러분, 이준이 지금 보인 태도는 그가 문승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니 종주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그를 보낼 수 없다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종주가 없는 동안에는 대장로가 종주나 다름없었으니, 자리에 있는 누구도 감히 운남종 대장로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하나마나한 질문이고, 구하나마한 양해였다. 그러나…대장로의 말에 반기를 든 유일한 사람은 아주 뜻 밖의 인물이었다.
“대장로님, 혹시 뭔가 오해하신 건 아닐까요? 정말 문승을 죽인 자라면 저를 상대로 애를 먹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설아였다.
“설아야, 지금 네가 끼어들 때가 아니란다.”
하지만 운령은 싸늘한 말투로 나설아를 나무란 뒤 세 장로를 향해 목소리를 높일 뿐 이었다.
“데리고 내려오게!”
준은 거대한 힘에 떠밀려 아래로 떨어지며 저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지었다. 고작 17살 짜리 소년 하나에 투왕 셋이라니, 정말이지 헛웃음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아래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는 자들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심지어 운남종의 제자들조차 이는 너무 과한 처사라고 느낄 정도였다.
“허허…투왕 셋이라니…나라해도 잡히겠는 걸? 어때 해길, 연금술사 협회의 명예 장로인데, 어떻게 안되나?”
가철의 한마디에 해길 역시 눈썹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 했다.
“저렇게 작정하고 잡아두는데 내가 나선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연금술사 협회라고 해도 운남종과 등을 돌리는 결정은 함부로 내릴 수 없네. 만일 내가 운남종과 척을 지면 협회에서 나를 쫓아낼걸? 뭐…기회를 봐서 얘기를 잘 해보는 것 정도가 최선이겠지.”
가철이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짓자,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동해는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준, 그만 저항을 멈추게나. 진상규명 전에 우리가 자네를 해칠 생각은 없어! 하지만 저항이 너무 거칠면 무력을 행사할 수 밖에 없네! 협조해주게”
운령의 말에 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투왕 셋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 뾰족한 수가 있을리 없었다.
조용히 상대의 반응을 살피던 운령은 준이 탈출구를 찾으려 하는 기미를 포착하자마자 곧장 다시 명령을 내렸다.
“녀석을 잡게나!”
다음 순간, 준이 갑자기 운남종의 제자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소란을 일으켜 틈을 만들려던 것 이다.
그러나 이 역시 운남종 장로들의 손바닥 안 이었다.
“허, 쥐새끼 같은 놈, 감히 머리를 써?”
운남종의 장로 하나가 손바닥을 휘둘러 돌풍을 일으키자 준의 몸이 허공에서 균형을 잃었고, 뒤이어 다른 장로가 번개같이 날아와 손에서 염력을 뿜어냈다.
“바람의 속박!”
그러자 천지를 덮을 듯한 강풍이 일며 바람으로 이루어진 밧줄이 나타나 준을 옭아맸다.
……
그렇게 세 사람의 투왕이 준을 사로잡았다고 확신한 순간, 푸른 화염이 일며 밧줄을 불태워 버렸다.
“이놈이!”
그러나 세 장로는 운남종의 실력을 과시하듯 재빠르게 진형을 갖춘 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염력을 쏟아냈다.
“염력 감옥!”
그리고 세 장로의 외침 소리와 거의 동시에 각기 다른 색의 염력이 벽을 형성하며 준을 옥죄어 왔다.
“이런 빌어먹을…!”
준은 순식간에 자신을 덮쳐오는 에너지 막 앞에 이를 악물고 대지의 불꽃을 내뿜어 보았지만, 이번만큼은 대지의 불꽃으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바로 그 때, 하늘 위에서 갑자기 무시무시한 냉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동해 저 늙은이가 왜…”
가철과 해길은 갑작스러운 전개에 자신들의 두 눈을 의심했다.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늙은이가 왜 운남종과…”
“보아하니 이준이란 녀석과 뭔가 있긴 있나보군. 천하의 얼음왕이 자기 일도 아니고 다른 사람 일 때문에 운남종과 마찰을 빚다니…”
평소 괴팍하고 냉정한 동해의 성격을 잘 아는 그들이었기에, 동해의 행동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흠…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동해가 운남종과 맞설 생각을 했을까…갈수록 신기한 꼬맹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