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복수의 의미
한편, 준처럼 하늘로 피신하지 못해 충격파를 온전히 피하지 못한 나설아는 이미 불어오는 바람에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였고, 백지장처럼 새하얀 얼굴로 가슴을 부여잡은 채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다 끝났어, 나설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나설아를 바라보던 준은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악을 쓰며 달려들 것이라는 준의 예상과는 달리, 나설아는 서글픈 표정으로 웃음을 지을 뿐 이었다.
“네가 말한 복수가 이런 거였니…내 앞에 모습을 바꾸고 나타나 마음을 흔들고 다시 되돌아와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 거…? 그럼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니? 고작 열 몇 살 먹은 어린 애가 단지 할아버지의 약속이라고 해서 얼굴도 모르는, 그것도 마을에서 쓰레기라고 불리는 남자랑 결혼을 해야 하는 거야? 넌 정말 그게 맞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잔인하게 복수를 하는 거니?”
나설아가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자, 준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더욱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파혼이 잘못 된 게 아니야. 네 방식이 잘못됐던 거지. 네가 조금만 더 나와 우리 집안의 체면을 생각해줬더라면 일이 이렇게 커지지는 않았을 거야. 어린 애의 철없는 행동이라고? 웃기는 소리 하지마. 임현이 되었을 때도, 다른 곳에서도 널 봤어. 넌 그 때와 똑같아.
운남종과 나씨 가문의 힘을 믿고 그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야.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입을 피해나 기분은 생각하지도 않지. 오늘의 결과가 이렇게 나오지 않았더라도 네가 그렇게 말했을까?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혹은 오늘 대결에서 네가 이겼더라도, 네가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아닐걸? 오늘 일이 너에게 교훈이 됐으면 좋겠다.”
준은 싸늘한 말과 함께 자신의 손을 나설아의 가슴팍에 갖다 대며 염력을 끌어 올렸다.
“뭐가 됐든 이제 3년 약속은 끝났고, 지난 이야기를 질질 끌어봤자 달라질건 없어. 그리고 임현 문제는…네가 생각한 그런 유치한 복수극이 아니야. 오해하게 했다면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그리고…아까 네가 날 죽이려고 한 것, 다 알고 있어. 내가 장차 걸림돌이 될 거라고 생각하자마자 죽이려 들었던 네가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해봤자, 조금도 와닿지 않아.”
이준의 서늘한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 매섭게 후벼팠지만, 그녀는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이준! 우리 운남종의 체면을 봐서 설아를 용서해주게…! 그렇게만 해준다면…!”
바로 그 때, 운령이 새파랗게 질려 둘을 향해 달려왔다.
그러나 준은 싸늘한 표정으로 나설아의 가슴팍에 놓인 손에서 염력을 내뿜을 뿐이었다.
펑!
“컥…!”
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염력이 가슴속을 파고드는 순간, 나설아의 입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 나왔다.
나설아는 운남종의 젊은 세대 중 가장 촉망받는 인재로, 20살도 되기 전에 대투사가 된 지금은 차기 종주 후보 중에서도 손에 꼽는 운남종의 보물이었다.
게다가 가문으로 따지자면 가한제국 3대 가문 중 하나인 나씨 가문의 영애였고, 미모 역시 천하절색이었으니 운남종의 제자들 중 그녀를 동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그녀가 ‘퇴물’, ‘쓰레기’로 불리우던 작은 도시의 손톱만한 가문의 아들에게 패배한 것 이다. 그것도 고하의 연금비약과 진율희의 비술을 전수받기까지 한 상태로…
천 명에 달하는 운남종의 제자들은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결과에 입조차 벙긋하지 못 하고 조용히 숨죽여 피를 토하는 나설아를 바라봤다.
게다가 3년 만에 운남종과 제국 최고의 연금술사의 지원을 받은 나설아를 추월한 준의 재능과 집념은 그 자체로 할 말을 잊게 만드는 공포스러운 것 이었다.
17세에 대투사의 경지에 오른 천재 투사…17살에 대투사가 될 정도의 재능을 가진 이는 기나긴 운남종의 역사 속에서도 투기 대륙 전체를 뒤흔든 천재였던 운남종의 창시자 뿐 이었다.
더욱 소름이 돋는 것은 준이 불과 3년만에 대투사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운남종의 모든 이들을 가장 두렵게 만든 것은 17살 밖에 되지 않는 소년이 당당하게 제국 최고의 세력을 자랑하는 운남종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차기 종주 후보로 거론되는 나설아와 맞설 정도의 ‘독종’이었다는 점 이었다.
“하…”
이 광경을 바라보던 나원승은 마치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한숨을 내쉴 뿐 이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군…”
고하의 실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해길은 다른 누구보다도 그 자리에서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나설아 정도의 재능에 고하의 지원이 더해진 것을 혼자만의 힘으로 3년 만에 추월한 투사로서의 재능, 거기에 연금비약의 부작용으로 그 실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 했다고는 하나 구름제국 연금술사 협회 부회장을 정면으로 찍어 누른 연금술까지…해길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 이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놈이군.”
칭찬에 박한 가철 역시 준의 재능에 대해서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해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승부의 행방보다 그 이후에 벌어질 운남종의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저 쳐죽일 자식!”
그리고 운남종의 반응은 그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격노한 운령이 살기 어린 표정으로 준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 이다.
“대장로님…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설아가…이미 졌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상태가 저래서야…”
운남종의 한 장로가 착잡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령은 더욱 더 노기어린 표정으로 준을 노려봤다.
바로 그 때, 그의 눈에 부들부들 떨며 공포에 질린 도담이 들어왔다. 나설아가 정당한 대결에서 패배한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어 분을 참지 못 하던 운령의 분노는 순식간에 애먼 도담을 향했다.
“도담! 장로라는 자가! 이 무슨…!”
그러나 대장로의 호통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 도담은 더욱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털썩 주저앉아 버리기 까지 했다.
“대장로님! 저 녀석입니다! 저 녀석이 바로 문씨 가문을 무너뜨린 그 자입니다!”
* * *
“드디어 끝났군…”
나설아가 쓰러지는 순간, 준의 머릿속에는 지난 3년간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있었다. 자신을 믿어준 아버지, 때로는 짓궂게 장난을 쳤지만 자신의 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스승, 가람아카데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이은…이제 그들을 웃는 낯으로 볼 수 있을 것 이다.
그 때, 나설아의 품에서 하얀 종이 한장이 떨어져 나왔다. 준은 그녀의 가슴에서 떨어진 종이를 낚아채 펼쳐보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품에서 떨어진 종이는 바로 자신이 써준 이혼장이었다.
“크윽…”
그렇게 준이 감상에 사로잡혀 있던 사이, 나설아가 나지막히 신음을 토하며 몸을 뒤척이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네가 이겼어. 이준…약속대로 대결에게 패배한 내가 네 시중을 들어야 하지…그리고, 네 말이 다 맞아…아마 네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오늘 이겼더라면…나는 여전히 내가 잘못한 게 없다고 여겼을지도 모르지…하지만 적어도…지금 이 순간, 내가 너한테 못 할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은 진심이야.”
그러나 이번에도 준은 아무 말없이 싸늘하게 그녀를 바라볼 뿐 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미안한 일을 해야겠어…시중을 들겠다던 약속…그건 못 지켜. 운남종 차기 종주의 체면이라는게 있으니까…대신 다른 것으로 사과할게.”
그리고 다음 순간…다 죽어가던 나설아가 갑자기 이를 악물고 상체를 일으켜 자신의 장검을 움켜쥐었다.
“이봐, 지금 뭐하자는 거지?”
준은 나설아의 몸에 한줌의 염력조차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 그녀가 검을 집어 든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아아! 안돼!”
하지만 나설아의 칼끝이 향한 것은 바로 준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목이었고, 그녀의 돌발행동에 광장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응…?’
자결할 생각으로 자신의 목을 향해 장검을 내질렀던 나설아는 누군가가 자신의 칼날을 막은 것을 느끼고는 질끈 감았던 눈을 서서히 치켜떴다.
놀랍게도 그녀의 칼날을 붙잡은 것은 바로 이준이었다.
“어이가 없군. 그런 약속 지키라고 한 적도 없어. 아니면 이건 나를 엿 먹이려는 계략 같은 건가? 그리고 널 죽이고 싶었으면 아까 네 가슴에 마지막 일격을 날릴 때 널 죽였겠지. 넌 이미 저항할 힘을 잃은 상태였으니까.”
“뭐…뭐라고? 그럼 대체…”
“됐어. 널 죽이는 순간 운남종과 나씨 가문이 날 가만둘 것 같아? 여기서 네가 자결하면 끝장나는 건 우리 집안일걸? 그러니 나에게 복수하고 싶은게 아니라면 그딴 짓은 집어치워. 너한테 화가 났던 것도 사실이고, 망신을 주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죽이고 싶을 정도는 아니라고.
하는 짓으로 보니 미안하다는 말도 거짓은 아닌 것 같고…후…게다가 너를 철천지원수처럼 생각했지만, 덕분에 성장한 것도 사실이야. 그리고…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임현 문제는…너한테 복수하고 싶어서 했던게 아니라 정말로 사정이 있었어. 그러니 오해는 말아줬으면 좋겠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던 나설아의 손끝에서 힘이 빠지자, 그제야 준은 검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후아…정말 막나가는 애구나. 하긴…진작부터 알아보긴 했지만…됐어. 이제 3년 전에 했던 말을 다시 해줄게. 이제 너와 우리 이씨 가문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 넌 이제 자유의 몸이야. 축하한다. 이게 내가 하고 싶었던 복수의 전부고, 내가 되찾고 싶었던 것은 나와 우리 가문의 명예뿐이야. 유치하게 그런 걸로 목숨까지 끊으려고 하지 말라고 꿈자리 사나워지니까.”
방금 전까지 죽일 듯이 달려들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멋쩍게 미소를 짓는 소년의 모습에 나설아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허해지는 것을 느꼈다.
“에이씨, 끝맛 안 좋게…처음부터 오지를 말았어야 돼. 빌어먹을 운남종, 내가 다시는 여기 오나봐라.”
준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설아를 향해 피식 웃으며 검은 송곳을 등에 들쳐맸다.
그리고 준이 막 몸을 돌리려던 찰나, 누군가가 그를 불러 세웠다.
“이, 이준! 잠깐만! 우리 운남종 측에서 얘기하고 싶은 게 있다네……”
준을 불러 세운 것은 바로 운령이었다. 그의 표정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대장로님, 오늘 대결은 제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저 사람은…”
나설아는 대장로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는 비틀거리며 일어서 대장로를 말리려 했다.
“설아야, 네 대결과 관련된 일이 아니란다. 잠깐 물러나 있거라.”
그러나 운령의 태도는 단호했다.
“무슨 일이지?”
해길과 다른 사람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어리둥절하며 서로를 쳐다봤다.
“뭐야 설마, 대 운남종이 쪼잔하게 저런 꼬맹이 하나를 잡아족치려는건가? 그것도 정식 대결에서 패배한 분풀이로?”
가철은 재미있다는 듯 실실 웃으며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동해는 말없이 염력을 끌어올렸다. 자신의 약속대로 준이 최악의 상황을 만들지는 않아 안심하고 있던 차에 운령의 행동은 완전히 그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