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격돌
두 가지 색의 염력이 교차하며 드넓은 대리석 광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눈으로 쫓아가기가 어려울 정도의 속도로 광장 여기저기서 빛이 번쩍이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대장로님…뭔가 이상합니다. 저 이준이라는 녀석의 염력은 설아만 못 합니다. 사용하는 무투기 역시 하나 같이 설아의 것만 못하구요. 하지만 설아의 무투기가 들어갈 때 마다 뭔가 기이한 힘이 그것을 상쇄시키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대결이 길어지자, 운남종의 장로중 하나가 운령을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는 물론이고 대장로인 운령조차 준이 어떻게 염력에서도, 무투기에서도 밀리면서 나설아의 공격을 번번이 받아내는지 알아내지 못 하고 있었다.
“너무 당황하지 말게. 내가 자세히 살펴보겠네.”
……
그리고 둘의 대결이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던 그 때, 두 개의 그림자가 장로들이 있는 자리로 날아들었다.
“가 장로님, 해 장로님도 여기 계셨군요. 종주님이 안 계시니 인사드릴 분이 별로 안 계시네요.”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고하와 유슬이었다.
“그런데 저 분은…?”
고하는 귀빈석에 앉아있는 동해를 발견하고는 당황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얼핏 보기에도 투황급의 강자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은데, 한 번도 보지 못한 자였기 때문이다.
“동해라고 하네.”
그리고 동해의 짤막한 한마디에 고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즉시 고개를 숙였다.
“아아, 얼음왕이라고 불리우던 그 동해 선배님이시라니…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은거하신 이후로 꽤 오래 세상에 나오지를 않으셔서 후배가 선배를 몰라보는 우를 범했습니다.”
운남종의 대장로이자 가한제국 최고의 연금술사 중 하나로 꼽히는 고하가 즉시 예를 갖추자 동해는 자기도 모르게 멋쩍은 웃음을 짓고 말았다. 본래 연금술사란 상당히 거만한 인종인지라, 고하 정도 되는 인물이 이 정도로 깍듯하게 예를 갖춘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저 소년이 이씨 가문의 이준인가요?”
“하하, 그렇네. 다만…소문하고는 아주 많이 다르군. 그 소문이 이씨 가문의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을 정도야.”
고하의 질문에 답한 것은 나원승이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나원승의 표정을 보고 이를 의아하게 여긴 고하는 눈을 돌려 광장을 바라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 했다.
쾅!
그리고 고하가 나타난지 약 1분 뒤…또 다시 굉음이 울려 퍼지고, 두 사람이 멀찍이 떨어지며 흙먼지가 걷히자, 칼자국이 가득한 준의 염력갑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격이 제대로 들어간 곳은 제대로 방어가 되지 않았는지, 선명하게 피가 묻어나고 있었다.
이준과 마찬가지로 나설아도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본래 새하얀 색이었던 그녀의 달빛 망토는 어느 새 지저분하게 더럽혀져 있었고, 그녀의 복부에는 선명한 발자국이 찍혀 있었으며, 이마는 땀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
“후우우우…”
잠시 후, 나설아가 긴 한숨을 내쉬며 지그시 눈을 감자, 운령이 무언가를 눈치챈 듯 입을 열었다.
“그걸 꺼낼 생각인가? 이준이라는 아이도 정말 대단하군. 설아를 이 정도까지 몰아붙이다니 말이야.”
놀란 것은 고하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연신 입술을 매만지며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 하고 있었다.
“후우…안 되겠어. 끝을 내도록 하지.”
마침내 준비를 마친 나설아가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여는 순간, 그녀의 몸에서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수준의 염력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녀가 장검을 든 채 이동을 시작하자, 날카로운 날붙이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기운이 파도치듯 광장을 뒤덮었고, 섬뜩한 빛을 내뿜는 녹색 염력이 거대한 폭풍이 되어 허공을 수놓았다.
“폭풍검!”
바로 그 때, 가철의 눈에 준이 무언가를 우물거리다가 입에서 보라색 불꽃을 내뿜는 광경이 포착됐다.
“저건…!”
그 보라색 불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린 가철이 해길을 바라보자, 해길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철을 바라봤다.
“임현…!”
“저건……”
하늘 높이 날아오른 나설아 역시 준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보라색 불꽃을 발견한 순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차리고 사색이 되었다.
“임현…!”
순간 나설아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에 눈앞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
“임현, 이준…후, 끌끌끌…나이가 드니 노망이라도 난겐가…어째서 못알아봤을까…”
한편 귀빈석에 있던 해길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잇지 못 하고 있었다.
“끌끌끌…연금술사 경연대회의 우승자가 운남종의 차기 종주와 맞설 수 있을 정도의 전투 능력을 갖추고 있단 말인가.”
“허허허…나씨 가문과 운남종이 대단한 실수를 한 것 같군…”
가철은 이준과 임현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자마자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나원승은 임현과 이준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순간적으로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모두 기분 나쁜 악몽이기를 바랐다.
자신 역시 임현의 호감을 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심지어 지금 눈 앞의 임현, 그러니까 이준은 자신에게 보여준 것 이상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큭큭큭…아마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가문에서 저 아이를 끌어들이지 못 해 안달이 나겠지. 그리고 저 아이는 절대로 나씨 가문과는 연을 맺을 일이 없을 것 이고…아하하하! 손녀딸 덕분에 어쩌면 내 대에서 나씨 가문의 유구한 역사가 막을 내릴지도 모르겠군.’
……
“임현, 임현이라…그럼 그 때 연금술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는 젊은이가 저 아이란 말이냐?”
임현과 이준이 같은 사람이라는 말에 고하의 얼굴 역시 말이 아니었다.
“네…그런 것 같습니다. 후…스승님 외에 그토록 대단한 재능을 가진 자는 처음 봤다고 생각했는데…솔직히 말해 존경하는 마음마저 들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가 운남종과 철천지원수라니…”
“호오…그래? 보아하니 그 대회에서 얻은 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닌 모양이구나. 그보다 손에 있는 저 푸른 불꽃은 천지의 불꽃이고, 저 보라색 불꽃은…상급 마수의 몸에서 얻은 마수의 불꽃같은데… 확실히 두 가지 불꽃을 모두 능숙하게 다루는 것을 보니 보통 인물은 아니긴 한 것 같구나.”
정신없는 싸움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고하는 준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불꽃…왠지 모르게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 든단 말이야. 푸른색…푸른색…천지의 불꽃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머릿속에 타르 사막에서의 일이 떠오르는 순간, 고하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하…이것 보게? 천하의 고하를 엿먹인 놈이 바로 네 놈이었단 말이지?’
* * *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치자, 나설아는 잠에서 깨어난 듯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고하조차 가지지 못한 천지의 불꽃으로 할아버지의 각인 독을 제거하고, 연금술사 대회에서 눈부신 재능으로 고하의 제자와 그를 능가하는 이국의 천재마저 꺾어버리고 우승을 차지한 천재 연금술사…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선망과 동경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 남자.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천재를 향한 그녀의 감정은 어느 새 선망과 동경을 넘어 제 멋대로 치달아 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찾아든 그 감정은 지금 이 순간 상상조차 하지 못 했던 방식으로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종언을 고하고 있었다.
그녀는 신조차 상상하지 못 했을 법한 끔찍한 결말에 망연자실해 그만 손에 든 검을 떨구고 말았다.
바로 그 때, 그녀의 발아래 있던 준의 오른손에는 푸른색의 화염이, 왼손에는 보라색 화염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이준의 기이한 행동에 해길을 비롯해 수많은 강자들이 영문을 알지 못해 멍하니 넋을 놓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설마…아니야! 그건 미친 짓이야!”
그리고 몇 초 뒤, 준이 두 개의 화염을 가까이 맞붙이기 시작하자 고하가 비명을 질렀다.
제국 최고의 연금술사인 그가 서로 다른 두 개의 화염을 맞붙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는 동해는 투황의 체통마저 잊고 초조한 듯 다리를 떨고 있었다.
사실 준이 사라에게 이 기술을 실험하는 것을 보지 못 했더라면 그는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더 빨리, 더 멀리 도망쳤을 것 이다.
……
쿠르르르-쾅!
곧이어 두 개의 화염이 맞닿으며 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가 귓등을 때리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기묘한 빛깔의 청보라색 불꽃이 사방을 훤히 비추었다.
“뭐…뭐야 이게! 이…이런게 가능하다니…”
준의 손에 들린 불꽃은 6레벨 연금술사인 고하조차 놀라 자빠질만한 에너지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충격적인 것은 새파란 애송이가 두 개의 불꽃을 융합하는데 성공했다는 점 이었다.
이는 가한제국 최고의 연금술사인 고하라해도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미친 짓 이었다.
“저 녀석이 만들어 낸 게 무엇인가?”
고하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운령이 옆에 있던 운남종의 장로 하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준의 손에 들린 불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연금술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불꽃에서 뿜어져 나오는 끔찍한 파괴력을 느낄 수 있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광장안의 모든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불꽃의 등장에 두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 사이, 청보라색 화염이 준의 손을 떠났다.
쾅!
치이이이익-
곧이어 청보라빛 화염과 나설아가 사력을 다해 쏟아낸 ‘폭풍검’이 충돌하는 순간, 천둥소리와 함께 거대한 충격파가 광장을 휩쓸었다.
“커헉…커헉…”
충격파는 태풍처럼 온 광장을 휩쓸며 운남종 제자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두었던 방벽이 깨졌고, 이로 인해 순식간에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제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운령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즉시 주위에 있던 다른 장로들에게 명을 내렸다.
“방벽을 더 치게!”
운남종의 장로들은 대장로의 명에 따라 즉시 몸을 날려 제자들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량의 염력으로 만들어진 견고한 방벽이 생겨났다.
하지만 염력 방벽의 보호를 받지 못 하는 운남종의 광장은 두 힘이 맞부딪히며 만들어낸 충격파에 산산이 부서져 갈 뿐 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상황을 만들어낸 준은 태연한 얼굴로 자신의 보랏빛 날개를 펼쳐 조용히 하늘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결국 이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운령은 피해가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광장으로 몸을 날렸다.
“바위 벽!”
콰-앙!
광장으로 날아든 대장로가 거대한 바위벽으로 준의 충격파를 받아내자, 충격파는 거대한 바위에 모든 힘을 쏟아낸 뒤 서서히 사라져갔다.
“보아하니 상황이 점점 나빠지는 것 같군요. 설마 그 귀하다는 비행 무투기까지 갖추고 있을 줄은…설아도 비슷한 무투기가 있긴 하지만 공중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아 공중전은 불가능하니까요.”
“대장로님, 상황이 저희의 예상과 너무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잠시 후, 대장로의 명에 따라 상황을 수습하고 있던 장로들이 하나 둘 몰려들어와 조심스럽게 자신들의 의견을 말했지만, 운령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 이었다.
“우선 조금 더 지켜보게. 결코 설아가 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돼.”
“대장로님, 그 말씀은…?”
“됐네. 일단 가만히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