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이준
다음날, 새빨간 태양이 지평선 위로 떠오르자 준은 자신의 얼굴을 덮고 있던 가면을 벗어 저장반지 안으로 넣은 뒤 연금술사의 망토를 벗어던지고 새까만 망토를 꺼내 걸쳤다.
준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찬물로 얼굴을 씻은 뒤 저장반지에서 시커먼 송곳을 꺼내들어 등에 멨다.
서늘한 송곳의 냉기가 닿자, 드디어 그 날이 왔다는 실감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운남종은 명실상부한 가한 제국 최강의 세력 중 하나로, 그 유구한 전통과 힘은 황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세간에는 황실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그들만의 불문율이 아니었다면 진작 가한제국이 운남종의 수중에 떨어졌을 것 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었으니, 황실 역시 운남종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황실은 운남종을 견제하기 위해 다양한 세력들과 손을 잡아 수 많은 강자들을 그들의 수호자로 삼고, 신비한 마수들을 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운남종의 본거지 바로 아래에 제국의 최정예군을 배치해 두는 실정이었다.
물론 황실의 이러한 노골적인 견제에 대해 운남종이 조용히 눈을 감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가한제국은 내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고 말았을 것 이다.
그렇게 운남종은 가한제국내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감히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작은 소년 하나가 그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운남종에 도전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 *
준은 한참을 걷고 또 걸어 태양이 중천에 걸렸을 때 즈음에서야 비로소 걸음을 멈췄다.
가파른 산의 꼭대기에는 운남종의 모습이 설핏 보였고, 산 아래의 초원에는 새하얀 천막이 그득했다.
“어이가 없군…정말로 황실의 병력이 운남종 아래를 막고 있네”
준은 새삼스레 운남종의 힘을 실감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군사들은 준을 발견하고도 전혀 제지하지 않았는데, 이는 오직 운남종을 찾아오는 손님을 건드렸다가 괜히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준은 운남종의 적이었지만, 감히 누구도 운남종에 시비를 걸러 오는 미친 놈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이다.
하늘까지 닿을 것 마냥 아득하게 펼쳐진 계단을 밟고 한참을 산을 오르자 멀찌기에서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 날이 온 것이다.
준은 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삭이며 한걸음 한걸음 차분히 발을 움직였고, 마침내 그의 시야에 익숙한 여인의 그림자가 들어왔다.
* * *
끝모르게 펼쳐진 계단의 끝에는 구름이 가득해 마치 이 세상의 그것이 아닌 듯 했다.
구름 뒤로는 온통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광장이 자리하고 있었고, 백색의 새하얀 공터에서는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아련하게 깃들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위엄이 느껴졌다.
광장 중앙에는 커다란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위로는 가한제국의 역사를 수 놓은 역대 종주들의 이름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면 광장의 주위로는 족히 천 명은 앉고도 남을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곳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새하얀 망토를 펄럭이며 반짝이는 장검을 차고 있었다.
광장의 가장 위쪽에는 대리석 의자가 높이 솟아올라 있었는데, 나이가 많을수록 더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곳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서는 감출 수 없는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하얀 망토를 입은 노인들 바로 아래…은은한 달빛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망토를 걸친 여자 하나가 차분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광장에 모인 천 명에 가까운 인원들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고, 구름 숲에 모여든 천 여명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적막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묘한 위압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광장 안에는 나원승을 비롯해 동해와 해길 등 가한제국 내에서 이름을 떨친 강자들과 각 세력의 유력 인사들이 오늘 이곳에서 벌어질 대결을 보기 위해 자리를 잡고 있었다.
* * *
하늘이 밝아지고 따스한 햇살이 산 정상 위에 부서져 내릴 때 즈음, 계단이 있는 방향에서부터 들려오는 희미한 발소리에 광장에 자리한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한 곳을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던 나설아의 눈이 뜨이는 순간, 맑은 목소리가 광장내에 울려퍼졌다.
“이씨 가문, 이준입니다.”
광장 안에 자리한 천 여명의 제자들은 검은 망토를 걸친 사내의 등장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운남종에서 이준이라는 이름은 나설아의 그것만큼이나 유명한 것 이었다. 작은 성의 보잘 것 없는 가문, 그 이상으로 보잘 것 없는 소년 하나가 감히 운남종의 차기 종주와 결혼을 하려 했다는 것, 그리고 파혼을 요구하는 나설아에게 면박을 주고 3년 뒤에 설욕을 위해 운남종에 찾아오기로 했다는 것은 이미 운남종 내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자리에 있는 이 중 과연 몇이나 진심으로 그 소문의 사내가 단신으로 운남종에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자리에 있던 운남종의 제자들 중 일부는 조금도 겁먹은 기색 없이 당당하게 운남종에 모습을 드러낸 이준의 모습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고, 일부는 조용히 그의 어리석음을 조롱했으며, 또 일부는 그의 용기에 조용히 감탄하고 있었다.
한편 나설아는 3년 만에 놀라울 정도로 변한 준의 모습에 조금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3년 사이 앳된 소년의 모습은 어느 새 의젓한 청년의 얼굴로 변해 있었고, 한층 날카로워진 턱 끝과 깊어진 눈매는 마치 다른 사람의 그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외양의 변화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소년의 몸 곳곳에서 느껴지는 끝 모를 투지와 힘 이었다.
“나씨 가문 나설아입니다.”
뒤이어 나설아가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광장 안에 서늘한 분위기가 내려 앉았다.
“호오…저 아이가 소문의 그 아이인가? 퇴물이라더니…이건 이야기가 다른데?”
“하하, 보아하니 근거 없는 센 척 같지는 않은데. 아니, 척이라고 해도 이곳까지 제 발로 찾아와서 센 척을 할 수 있는 놈이 가한제국 전체에 몇이나 될지 궁금하군. 재미있는 꼬마야.”
운남종의 초대장을 받고 일찍이 자리에 와있던 가철과 가형선은 ‘퇴물’이라 불리는 소년을 실제로 보고는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여자에게 파혼을 당할 정도의 얼치기라고 들었는데, 눈앞에 나타난 소년은 도무지 그런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선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위치한 해길은 준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흠…이상하네. 어딘가 익숙한 기운이야…”
“자네도 느꼈나?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
해길의 한마디에 가철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이 광경을 바라보는 사람 중 가장 표정이 안 좋은 이는 바로 나원승이었다.
그렇게 각자가 준에 대해 나름의 평가를 내리고 있는 사이, 흰색 망토를 걸친 노인 하나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네가 이씨 가문의 이준이란 말이지?”
노인은 준을 천천히 훑어보며 대답조차 듣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운남종의 대장로, 운령이네. 종주님께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으니 내가 이번 일의 진행을 맡도록 하겠네.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지…”
“감사합니다. 장로님의 바람대로 좋은 결과를 내도록 해보지요.”
준의 짤막하고 당돌한 말에 광장 전체에는 잠시 소란이 일었고, 나설아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불쾌함이 떠올랐다.
준은 그런 나설아를 보며 피식 웃으면서 검은 송곳을 꺼내들었다.
소년의 손을 따라 새카만 송곳이 허공을 가르자 바람이 일며 땅에서 흑먼지가 일고, 이내 푸른 염력이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 날이 왔군.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날 받은 치욕을 되갚아주지.”
준의 한마디에 기다렸다는 듯이 나설아의 손가락에 끼워진 비취색 반지가 빛을 내며 그 안에서 녹색 장검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녀의 손에 들린 신비한 녹색 장검은 햇살을 받아 더욱 기묘한 빛을 내뿜었다.
“하…정말 어이가 없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른들이 맺은 약속 때문에 내가 너와 결혼을 해야 하지? 물론 방법이 다소 예의가 없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 문제를 가지고 이렇게 까지 원한을 품어야겠어? 왜 운남종에 와서까지 이 난리를 쳐야하는지 모르겠어.”
“다소 예의가 바르지 못했다라…”
짤막한 몇 마디에 광장인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싸늘해지고, 준의 몸에서는 더욱 맹렬한 기세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큭큭…좋아.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 하든 상관없어. 약속은 약속이니까.”
실소를 터뜨리며 검은 송곳을 움켜쥐는 준을 바라보는 나설아는 자기도 모르게 등 뒤에서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지금 이 준의 몸에서 느껴지는 염력은, 3년 전 그 퇴물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흥…좋아.”
녹색 장검을 붙잡은 가녀린 손가락이 움직이자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새하얀 대리석 바닥에서 소용돌이가 일고, 이내 장내의 소란이 잦아들며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됐다.
……
“나설아!”
정적을 깬 것은 준의 목소리였다. 3년 동안 쌓아둔 감정을 일순간 폭발시키는 듯한 그의 고함 소리에 장내에 있던 모든 이들은 까닭 모를 공포심을 느꼈다.
하지만 나설아는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눈 앞의 상대를 바라보고 있을 뿐 이었다. 그녀의 염력은 바람 속성을 가지고 있었으니, 속도에서는 밀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리고 상대가 10미터 정도까지 다가왔을 때, 드디어 그녀가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곧이어 녹색의 장검과 시커먼 송곳이 교차하며 날카로운 쇳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지고, 쇳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녹색 섬광이 연달아 준을 덮쳤다. 확실히 속도면에서는 나설아의 우위가 명백해보였다.
그러나 준이 검은 송곳을 휘두르는 순간 흉폭한 힘이 나설아를 휩쓸며 일격에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이윽고 다시 한번 준의 송곳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들었고, 그의 송곳 끝에 깃든 무시무시한 힘 앞에 나설아의 녹색 장검이 상대의 그것과 맞부딪히기도 전부터 버드나무처럼 휘어졌다.
광장에 자리한 운남종의 수 많은 제자들을 그 무시무시한 위력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나설아는 침착하게 자신의 검 끝을 반대쪽 팔꿈치에 붙인 뒤 발을 구를 뿐 이었다.
그리고 나설아의 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돌연 푸른 빛이 폭발하며 준이 날아가고, 이에 맞춰 녹색 그림자가 공중 위로 솟구쳐 올랐다.
다음 순간, 기회를 잡은 나설아의 검 끝이 흔들리며 수 십개의 그림자가 생겨나 준을 덮치자, 광장 한구석에서 감탄이 터져나왔다.
“바람의 그림자!?”
“이럴 수가! 벌써 3격 중급의 무투기를 익히다니!”
3격 중급 무투기의 등장에 자리에 있던 제자들은 놀라운 기색을 감추지 못 했다.
그녀의 뛰어난 실력에 지위가 높은 각 세력의 장로들도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 있던 누구보다 놀란 것은 바로 준이었다.
조금의 준비 과정도 없이 대뜸 터져 나온 3격 무투기 앞에 적잖이 놀란 그는 검은 송곳의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잡으며 세차게 발을 굴러 더욱 염력을 끌어올렸다.
나설아는 기회를 잡은 듯 재차 ‘바람의 그림자’를 시전했고, 순식간에 다시 한번 녹색 장검의 그림자가 하늘을 뒤덮었다.
준은 순식간에 자신을 옥죄여 들어오는 칼날 앞에 마치 열 명도 넘는 상대가 자신을 동시에 덮쳐오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