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푸른 정령의 비약
동해는 잠시 곤란한 표정으로 서성이다 의자에 앉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동생, 오해하지 말게. 내가 약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야. 나는 자네와 약속한대로 운남종에 따라갈 거야. 하지만 말이야, 자네 실력이 회복되지 않으면 내가 목숨을 걸고 보호해줘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운남종이 괜히 운남종이 아니라고.”
“하하, 어떻게든 되겠죠.”
자신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자, 동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참 쉽게 생각하는 군… 내 자네의 그런 면을 좋아하긴 하네만…이번 일은 문제가 달라. 나이는 헛으로 먹는 게 아니니 한번 진지하게 내 충고를 들어보게.”
평소와 달리 사뭇 진지해진 동해의 얼굴에 준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그런 표정이었다.
“동생,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자네를 지킬 거야. 약속은 약속이니까. 하지만 동생도 알다시피 나는 유씨 가문과도 연이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와의 약속 못지않게 그 쪽 가문과의 관계도 중요하다고. 그리고 운남종과 전면전이라도 벌이는 날에는 유씨 가문이 아주 곤란해진단 말이야.
게다가 아무리 가한제국 3대 가문이라고 해도, 그건 재력과 무력, 다른 것들을 모두 합쳐서 말하는 거야. 순수하게 무력만 놓고 따지자면 3대 가문 중 그 어느 가문도 운남종의 상대가 되지 못 해. 만에 하나 유씨 가문이 자네와 내 편을 들어 운남종에 맞서준다고 해도 운남종에게는 상대가 안 될 정도라고.
더 나쁜 건, 운남종의 차기 종주가 나씨 가문의 여식이니 실제로는 운남종과 나씨 가문을 한 세력으로 봐야 한다는 거야. 이건 내가 목숨을 걸고 말고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닐세. 그래서 자네가 정말 이 상황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부터 확인하고 싶네. 내가 보기에는 동생이 이 문제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자네…운남종의 현 종주인 진율희 말고, 전종주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네? 전 종주요?”
자신의 날카로운 질문에 준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동해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나갔다.
“후… 몰랐군. 참고로 말해두자면, 진율희에게 종주 자리를 물려줄 때 이미 8성 투황이었어. 게다가 아직까지 죽었다는 이야기는 없어. 물론, 나이가 나이니만큼 살아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네만…살아있다면 투종일 것이 거의 확실하단 말일세.”
이야기를 들어보니, 확실히 천하의 얼음왕이라도 심각해질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준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동해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진심으로 하는 충고야. 가철이니 해길이니, 나원승이니 하는 것들도 결국 운남종과 자네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가버리고 나면 운남종에 붙을 거야. 무슨 소리인지 알겠나?”
그러나 이 대목에 이르자, 준은 조금 기분이 불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자신도 약속을 깨겠다는 말을 하기 위한 포석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선배님도 빠지실 겁니까?”
“후…이봐 동생,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지 않나. 까놓고 말해서, 자네와 나는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관계잖아. 유씨 가문과의 인연이 훨씬 깊다고, 내 입장도 생각을 좀 해줘. 사실 그 때 가서 말없이 돌아설 수도 있어. 하지만 자네와의 정을 생각해서 충고하는 거라고. 자네도 내 별명을 알지 않나. 그 얼음왕이라는 별명은 단순히 내 염력 때문에 붙은 별명이 아니야. 평소 같으면 이런 충고 같은 거 하지도 않는다고.
원래 나는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이야 죽든 말든 상관 안하는 성격이라고. 막말로, 운남종하고 완전히 갈라서느니 영혼의 정수를 포기하는 편이 훨씬 안전해. 그런데도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정말 걱정이 돼서야. 내가 자네하고 약속을 지켜서 운남종과 등을 돌린다 쳐도 말이야. 운남종과 갈 데까지 가는 순간 자네는 죽어. 내가 목숨을 걸어도 죽는다고. 그리고 자네를 도운 나와 유씨 가문도 끝장이겠지.
그야말로 대 참극이 벌어질 걸세. 그 결과를 모두 고려하고 있냐고 묻는 거야. 자네는 아직 젊어, 재능도 넘치지. 배짱도 두둑하고 머리 회전도 빨라. 내 평생 자네 같은 젊은이는 처음 보니까. 나답지 않게 제법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야. 그러니까 정말 진지하게 묻는 걸세. 나이가 들면 때로는 한 때의 굴욕을 견뎌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걸 배우게 되지. 나는 자네가 한 때의 오기로 창창한 미래를 날려버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하는 거야. 자네의 재능이라면 천천히 실력을 쌓아도 늦지 않아.”
동해의 진심어린 충고에 이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해가 말했 듯이 그는 아직 젊고 재능이라는 밑천과 약로라는 배경이 있었다.
“하하하!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내 평생 누구한테 이렇게 충고해준 적이 없다고! 그런데 자네가 내 말을 무시했더라면 정말 서운했을 거야. 명심하게, 절대로 운남종과 갈 데까지 가서는 안 돼.”
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동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리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럼 시간도 늦었으니 이제 좀 쉬게. 결전을 준비해야지.”
준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방에서 나가는 동해를 눈으로 배웅한 뒤 긴 한숨을 내 쉬었다.
확실히 동해의 말대로 였다. 해길과 가철 등과는 기껏해야 며칠 같이 다닌 것이 전부다. 닳고 닳은 투황들이 운남종과 자신과의 얄팍한 인연 중 무엇을 택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운남종이었다.
나원승은 자신의 손녀가 걸려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거기다 까맣게 몰랐던 운남종의 전 종주 문제까지…동해의 말은 무엇하나 틀린 것이 없었다.
하지만…나설아와의 대결까지 포기할 마음이 든 것은 아니었다.
‘흥…대결을 앞두고 그 계집애를 데리고 갔으니 대결을 취소할 마음은 없는 게 분명해. 문제는 나설아 그 계집을 꺾고 나서 어떻게 되느냐 하는 건데…설마 안면몰수하고 나를 죽이려 들려나? 후…아니야. 그래도 대결을 포기할 수는 없어. 일단은 이겨야해. 그리고 나서 뒷수습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자.’
* * *
이튿날 아침, 따스한 아침 햇살이 창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방 안을 촘촘히 수놓았다.
곧이어 따사로운 햇볕이 점점 자라나 침상 위에 있는 준의 뺨을 간지럽히자, 까만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에서 몇 번인가 구르다가 이내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준은 눈을 뜨자마자 힘차게 침대에서 뛰어내려 아무도 없는 거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도 동해는 뭔가 일이 있는지 일찌감치 숙소에서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후…!’
그는 긴 한숨을 들이쉰 뒤 잠을 깨기 위해 찬물로 세수를 하고 창문을 활짝 열어 기분 좋은 아침 햇살을 만끽했다.
따뜻한 햇볕이 방안을 가득 메우자, 왠지 모르게 모든 게 잘 될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준은 잠시 창가에 앉아 햇볕을 쬐다가 몸을 돌려 저장반지 안에서 신비한 빛을 뿜어내는 연화대를 꺼낸 뒤 그 위에 올라가 자세를 바로하고 숨을 골랐다.
잠시 후, 손가락을 흔들자 푸른 연금비약이 손가락 사이에 나타났다. 준은 세 개의 아름다운 줄이 아로새겨진 연금비약을 매만지며 불안과 기대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우…절대, 절대 실패해서는 안 돼…”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에서 은은한 파문이 일더니 이내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대량의 에너지가 이준을 향해 흡수되기 시작했고, 천지의 불꽃에서 퍼져 나오는 푸른빛은 끊임없이 흡수되는 에너지를 보다 순수한 염력으로 정화해 주인의 힘의 근원으로 흘려보냈다.
그렇게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기를 수 십분… 준은 더 이상 에너지가 흡수되지 않는 순간까지 가만히 기다리다가 때가 되자 망설임 없이 ‘푸른 정령의 비약’을 입 안에 넣었다.
영험한 힘을 가진 푸른 알약은 입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순수한 에너지로 변환되어 강물처럼 흐르기 시작했고, 준은 순식간에 자신의 몸을 따라 거대한 해일과도 같은 기운이 몰아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체내로 흡수된 에너지는 화염보다도 더 뜨거운 열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약안에 들어있는 흰색의 냉기가 얇은 서리 벽을 형성해 열기로부터 혈관을 지켜주었다.
너무나 기이한 몸속의 변화에 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다가 문득 이 신비한 변화가 자신이 사용한 세 가지 불꽃의 속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이 푸른 정령비약이 화염의 힘을 흡수해서 그것을 나에게 전달해주는 건가?’
그렇게 준이 4레벨 연금비약의 원리를 추측하고 있는 사이, 그의 몸속에 있던 푸른 불꽃이 혈관을 따라 이동하더니 가슴께에서 연금비약의 에너지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펑!
그리고 준이 가슴팍에서 기묘한 충돌음이 울려 퍼지는 것을 느끼는 찰나, 몸속의 염력과 연금비약이 품고 있던 에너지가 부드럽게 뒤섞이는 것이 느껴졌다.
곧이어 하나로 합쳐진 에너지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폭주를 시작했고, 준이 어찌해볼 도리도 없이 온 몸의 혈관을 따라 미친 듯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으윽…”
다음 순간, 격렬한 통증이 덮쳐오는 것을 느낀 준이 에너지를 갈무리 하려했지만, 이미 폭주를 시작한 에너지는 준의 노력을 비웃듯 이전까지 한 번도 염력이 흘러 들어간 적이 없던 미세한 혈관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엄청난 격통이 몸을 덮치는 동시에, 그는 전신의 혈관이 보다 놀라운 속도로 크고 두터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혈관은 투사가 에너지를 흡수하는 길이자 염력으로 전환된 에너지를 전신으로 운반해 운용하는 통로였다.
즉, 혈관이 튼튼하고 커진다는 것은 곧 더 거대한 힘을, 더 빠르게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했으니, 준은 격통 속에서도 웃음을 지었다.
……
첫 번째의 소리가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준의 몸은 갑자기 연이어 떨리기 시작했고, 몸의 표면에서는 에너지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몇 초 뒤, 몸의 떨림이 멈추고 온 몸의 모공에 핏방울이 맺혔다가 회복되기를 반복하고, 곧이어 혈관과 모공이 모두 미칠 듯이 팽창하며 탐욕스러운 짐승마냥 주위의 에너지를 모조리 먹어치웠다.
준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몰려드는 에너지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염력 회오리 안에서 천지의 불꽃을 불러냈다.
그리고 주인의 명에 따라 혈관을 타고 이동하던 푸른 불꽃이 세 가지 색의 에너지와 부딪히는 순간, 네 개의 에너지가 기름처럼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치익.
푸른 화염과 세 가지 에너지가 혈맥에서 부딪히는 순간, 미세한 충돌음이 몸 안에서 울려댔다.
곧이어 각기 다른 기운들이 요동치며 체내 곳곳으로 퍼져나가자 또 다시 끔찍한 고통이 온 몸을 덮쳐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지의 불꽃으로 둘러싸인 세 개의 에너지는 열기로 인해 팔팔 끓다가 갈색의 액체로 변화해 준의 혈관을 타고 흘렀고, 갈변된 기운은 이전보다 더욱 강한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그렇게 격통 속에서 푸른 불꽃을 이용해 연금비약속의 에너지를 순환시킨지 수 분… 마침내 갈색의 에너지가 다시 청색의 액체로 변하며 염력 회오리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