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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157화 (157/818)

제157화. 상품

해길은 동해를 제지한 뒤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한 관객석을 향해 다시 한 번 심사 결과를 분명히 했다.

“심사 결과를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대회의 우승자는 최고급 푸른 정령의 비약을 제조해 낸 임현입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심사 결과를 알리자, 그제야 광장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 몇 사람들은 상기된 얼굴로 의자 위에 올라가 소리를 질러댔고, 박수갈채와 시끄러운 함성 소리에 광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옆 자리에 있는 사람의 말조차 알아들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8년에 한번 열리는 연금술사 대회에서 적국의 소년에게 우승을 빼앗길까봐 마음을 졸이던 사람들은 가한제국의 청년이 우승을 거머쥐자 뛸 듯이 기뻐하며 한참 동안이나 난리 법석을 피워댔다.

“하하, 내 진작부터 임현 후배가 우승할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니까!”

귀빈석에 있던 나원승은 주변 사람들의 열띤 반응을 살피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정말이지 대단한 사람이네요. 가한제국 전체가 그에게 빚을 졌어요. 어떻게 젊은 나이에 저렇게 대단한 실력을 가지게 됐을까요?”

곁에 있던 나설아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대단한 정도가 아니지, 저 정도라면 혼자서도 웬만한 가문보다 더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게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 나이에 푸른 정령의 비약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면 나중에는 얼마나 더 발전할까요. 고하 장로도 저 나이 때는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을 텐데… 저희 운남종으로 영입할 수는 없을까요?”

“벌써 그쪽으로 끌어들일 생각을 하는 게냐? 저 녀석이 널 대할 때의 태도가 어땠는지 생각해 보거라. 유씨 가문의 주희라는 아가씨와는 온도 차이가 심한 것 같던데…”

할아버지의 냉정한 지적에 나설아는 입을 삐죽이며 풀 죽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아니 그게…영문도 없이 저한테만 냉정한 걸 어떻게 해요. 제가 무례하게 군 것도 아니고, 뭔가 문제가 될 만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유독 저한테만 그렇게 싸늘하다니까요.”

나설아는 그간 임현의 태도를 떠올리자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다. 신분으로 논하자면 자신과 주희는 비교할 바가 못 되었고, 미모로 따져도 자신이 주희에게 밀린다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물론 주희야 황도 내에서도 유명한 미녀였지만, 자신 역시 결코 그녀에게 밀리는 외모는 아니었다.

뛰어난 투사, 가한제국 최고 가문의 후계자이자 운남종의 차기 종주, 거기다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미모까지…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을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말도 안돼, 내가 어때서? 지금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나한테 저렇게 냉담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대체 왜 이유도 없이 날 싫어하는 건데? 아니,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그렇게까지 싫어할 이유는 없잖아!’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억울하다 해도, 임현이 그녀를 싫어하는 것은 자명해보였다.

“그 친구가 왜 설아 네게만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밉보인만큼 더 조심하거라. 괜히 운남종 운운하며 문제 만들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고. 고하를 가까이서 보니 저런 연금술사와 척을 지면 얼마나 골치가 아파질지 너도 잘 알고 있겠지?”

“할아버지…제가 언제!”

그리고 시기적절한 나원승의 충고가 그녀를 더욱 분하게 만들었다.

“글쎄, 낸들 알겠니. 여튼 조심하거라. 어쩌면 저 친구가 네게 처음으로 상전일지도 모르겠구나. 너는 나씨 가문의 큰 어르신인 나조차 이겨먹으려 드는 아이니까.”

* * *

한편, 경기장에 있는 준은 한 손으로 대리석 탁자를 짚고 서서 귀가 먹먹하도록 울려 퍼지는 함성소리를 감상하고 있었다.

“임현 선생님, 축하 드려요.”

공주가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준은 예의상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천운이 따랐어요.”

“천운이라니요. 진짜 실력이 이제서야 드러나신 것 같은데요? 호호.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저와 유슬 오라버니 모두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공주의 말에 고개를 돌리니 유슬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 대회는 제가 지고 말았지만 정말 좋은 공부가 됐습니다. 앞으로 돌아가 선생님 밑에서 더 열심히 수련할 예정입니다. 언젠가 또 한 번 겨루어볼 기회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네요.”

“그럴 기회가 또 있겠죠. 이곳은 너무 소란스러우니 이만 떠나보려 합니다.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뵙겠죠. 안녕히 계세요.”

준은 그 말을 끝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는 광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약로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휴, 나도 가야겠군.”

유슬은 멀어져 가는 이준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문득 귓가를 때리는 우렁찬 함성소리가 자신의 것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마음속에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망토를 뒤집어쓰고 숙소에 돌아온 준은 도착하자마자 눈을 감고 염력을 회복하기 위해 자세를 잡고 눈을 감았다.

눈을 뜨니 어느 새 해가 지평선 가까이 내려앉아 있었고, 창을 지나 들어온 서늘한 공기가 뺨을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염력이 돌아오고 정신이 들자, 준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 때,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연금술사 복장을 한 소녀 하나가 물이 한 가득 들어있는 양동이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임현 선생님, 오탁 부회장님께서 보내셨습니다. 피곤하실 테니 시중을 들고, 잔심부름을 맡아달라고 하셔서요.”

14살 가량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자, 준은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아직 연금술사가 되지 못한 그녀에게 연금술사 대회 우승자인 준은 신화에 나오는 영웅처럼 대단한 인물로 보이는 듯 했다.

“흠흠…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

“아, 네…”

소녀는 준이 헛기침을 하며 괜찮다는 의사를 표시하자 조심스레 양동이를 건넨 뒤 멀뚱멀뚱 서서 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준은 자신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소녀의 시선에 부담을 느껴 대충 얼굴을 닦아낸 뒤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이름이…”

“아, 제 이름은 유나예요.”

“그래, 유나 아가씨, 혹시 해길 회장님에게 좀 데려가 줄 수 있을까?”

“네, 따라오세요.”

임현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준 것만으로도 기쁜지, 소녀는 간단한 부탁에도 대단한 상을 받은 것처럼 연신 웃음을 짓고 있었다.

방을 나선 준은 소녀의 뒤를 따라가며 수많은 연금술사들과 마주쳤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친절한 미소를 띠며 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레벨에 따라 상하관계가 분명한 연금술사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3레벨, 4레벨의 연금술사들도 모두 준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 보아, 이번 우승으로 인해 그의 지위가 얼마나 올라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준이 좁은 곳을 지날 때는 나이가 지긋한 연금술사들이 먼저 길을 비켜주기까지 했다.

“와, 임현 선생님 정말 대단하세요. 저희는 마주쳐도 정말 눈 한 번 쳐다볼 수 없는 분들이신데…먼저 인사도 하시고, 길도 터주시고…”

연금술사들의 행동에 유나의 눈이 더욱 더 반짝거리기 시작하자, 준은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휴…왜 이런 아이를 보낸 거야 부담스럽게…’

소녀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끼며 한참을 걸어 방 앞에 도착하는 순간, 준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가 회장님의 서재예요. 지금 안에 계실 테니 들어가 보세요.”

“그래, 고마워.”

“아닙니다…”

소녀는 수줍게 미소를 지은 뒤 등을 돌렸다가, 얼마 가지 않아 걸음을 멈추고는 다시 준을 바라봤다.

“임현 선생님, 오늘 정말 너무너무 멋졌어요. 저도 언젠가는 선생님처럼 훌륭한 연금술사가 될 거예요!”

준은 너무나 순수한 표정으로 꿈을 말하는 소녀의 모습이 귀여워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해길의 목소리에 따라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서니 해길 뿐 아니라 동해와 가철까지 세 명의 투황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축하하네.”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역시 해길이었다.

“정말 목숨 걸고 했습니다. 우승 못하면 회장님이 절 죽여 버리실 것 같아서요.”

눈이 마주치자마자 준이 농을 건네자 자리에 있던 세 투황은 너나 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이 사람, 이제 보니 입담도 아주 제법이군. 자,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지. 6레벨 연금비약인 ‘영혼의 결정’의 조합표일세. 다만, 지금 읽는 것은 자제하게, 6레벨 연금비약의 조합표는 나도 읽을 때 마다 정신이 아득해질 수준이니까 말이야. 피로를 충분히 회복하고 몸과 염력이 충만할 때 읽을 것을 추천하지.”

“하하, 네, 알겠습니다.”

준은 자신의 스승을 부활시킬 귀중한 조합표를 조심스레 저장반지 안에 넣은 뒤 해길이 건넨 검정색 상패를 받아들었다.

“그건 협회의 명예장로 상패라네. 우승자를 위한 일종의 상이라고나 할까. 이 상패를 보여주면 가한제국 내 어떤 협회 지부를 방문하더라도 장로와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네. 물론, 필요한 도움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고.”

“네. 감사합니다. 잘 보관해놓겠습니다.”

검정색 상패까지 건네받은 준은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실감하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제 상패까지 다 전달했으니, 이제는 길거리 구경이라도 좀 해보는 게 어떻겠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알아봐 귀찮을 수는 있겠지만 말이네.”

“하하…나는 하루라도 빨리 그 준열이라는 친구에게 대회 규칙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알려주고 싶은데 말이야.”

우승자를 위한 상품 증정이 끝나자마자 동해가 살기로 눈을 빛내자, 준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휴…그 사람…집에 무사히 돌아가지는 못하겠군.”

필요한 것을 모두 건네받은 준은 협회 건물 밖으로 걸어 나와 어두워진 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후…’

모든 일이 대충 일단락되고 나니 메두사 문제가 다시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막상 ‘영혼의 결정’의 조합표를 얻게 되니 정말로 그것을 써서 메두사를 부활시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졌던 것 이다.

메두사 여왕을 떠올린 준은 습관적으로 자신의 팔목을 감은 채 잠들어 있는 칠색 이무기를 어루만졌다.

요즘 들어 메두사 여왕의 에너지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 탓에 녀석이 잠에 빠지는 시간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휴, 온통 귀찮은 일 뿐이네.’

영혼 탐지력이 발전함에 따라 이제는 칠색 이무기를 뚫고 나오려는 메두사의 힘을 종종 느낄 수 있었지만, 안다고 해도 딱히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준은 메두사 문제로 한참을 골머리를 앓다가 나씨 가문의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이 마지막 해독이니, 이번만 무사히 넘기면 정령의 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정령의 꽃만 손에 넣는다면, 약로의 부활도 꿈이 아니었다.

며칠 후면 운남종으로 향해야 하는 그에게 있어 약로의 존재 여부는 그야말로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게다가 나설아의 실력을 정확히 알지 못 하는 상태에서 약로까지 없으니 선뜻 운남종으로 향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후…그 때 무천이 나설아에게 꼼짝도 못 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대투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인데…3년 사이에 어떻게 대투사가 될 수 있지? 아무리 돈이 많고 고하가 있다고 해도 그렇지…빌어먹을…역시 운남종 차기 종주는 다르다 이건가?’

물론 그에게도 약로가 있었고, 약로의 실력이 고하보다 낫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약로라도 약재가 없이는 연금비약을 만들 수 없으니 운남종의 지원은 약로의 그것보다 더 대단했을 것이 분명했다.

‘휴. 복잡한 건 나중에 다시 생각하자. 선생님께서 깨어나시면 내가 굳이 이 푸른 정령의 비약을 먹을 필요도 없으니까. 하지만 혹시라도 못 일어나신다면…하늘의 뜻이다 하고 푸른 정령의 비약을 먹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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