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최후의 승리자
마침내 새까만 불꽃이 꺼지는 순간…매끈한 보라색 연금 비약 한 알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저건 뭔가?”
드디어 준열의 연금비약이 완성되자, 동해는 즉시 고개를 돌려 해길에게 질문을 던졌다.
“빛의 인도. 4레벨 최고급 연금비약일세. 푸른 정령의 비약과 동급이지. 복용한 사람의 실력을 바로 올려줄 수 있는 연금비약이네. 1성 정도 성장할 수 있고, 내성도 생기지 않아 복용하는만큼 계급을 올릴 수가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지…정말 힘든 싸움이 되겠어. 거의 승산이 없다고 보면 되네.”
“정말 방법이 없는 겐가?”
해길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동해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하나 있지. 바로 임현 저 친구가 세 개의 불을 이용하는 것이네.”
“그런데 한 사람이 세 개의 화염을 지니고 있을 수는 없으니…물 건너갔다고 봐야지. 정말 대단한 친구였는데…아깝군. 정말 아까워.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수가 있나…”
“세 개의 화염이라고…?”
세 개의 화염이라는 말에 동해의 머릿속에 순간 공포스러운 백색화염이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아직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네.”
그러나 해길은 동해의 말이 그저 근거 없는 기대에 불과하다고 치부하고는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하…꼭 성공해야 하는데…’
동해와 해길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준은 자신의 검은 반지를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잠시 후, 결심을 굳힌 준이 자신의 염력을 불어넣자, 갑자기 차가운 냉기와 함께 그의 손끝에서 새하얀 불꽃이 튀기 시작하고 그 냉기로 인해 약솥의 화염이 불규칙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완성된 준열의 연금비약을 본 연금술사들은 이미 승부를 포기한 듯 자리를 뜨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갑자기 멀쩡하던 불이 왜 이렇게 불안정하게…”
동시에 해길의 안색이 급격히 변화하며 준의 약솥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뭐지? 정말 냉기인가?”
곧이어 급격하게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하자, 해길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냉기의 출처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느낌이야. 냉기가 아주 짙은데…얼음 노인네, 자네가 한 짓인가?”
귀빈석까지 미친 냉기를 느낀 가철은 동해를 의심하듯 위 아래로 훑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들도 모르는 새에 이정도 냉기를 분출할 수 있을 정도였으면 내가 투종이게?”
동해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이 냉기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건 임현 녀석이 한 것일세.”
“무슨 소리야, 연금비약을 만드는데 한기를 만들어 내다니!”
까만 반지의 떨림이 격렬해질수록 준의 몸에서는 점점 더 많은 영혼 에너지가 방출 되었다.
‘선생님, 기도해주세요……’
준은 남몰래 긴장 섞인 숨을 한 차례 몰아쉬고는 반지를 약솥에 더 가까이 갖다 댔다.
이윽고 준이 하얀 불꽃을 약솥 안으로 방사하자 보라색 화염이 서서히 흩어지면서 주변의 기온이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온도를 올려야해…’
천지의 불꽃과 하늘 사자의 불꽃을 통제하느라 이미 많은 영혼의 힘을 사용한 준의 온 몸이 점점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망토 끝에는 비라도 맞은 듯 물방울이 맺혔다.
“지금 뭘 하는 거지?”
공주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서로를 쳐다봤다. 그들은 임현이 세 번째 불꽃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다.
‘이상하군…분명 한기가 나는 것 같던데…영혼 에너지는 왜 이렇게 뜨겁지?’
자신의 경쟁자가 무언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준열은 한기와 냉기가 동시에 느껴지는 기이한 느낌에 자꾸만 임현의 약솥을 힐끗 거렸다.
우웅…우웅…
바로 그 때, 약솥에서 기묘한 울림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준은 생전 처음 겪는 기묘한 현상에 무언가가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남은 시간으로 보나, 남은 영혼 에너지로 보나,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폭발하려고 하는데…?’
곧이어 약솥에 있는 자신의 연금비약에 가느다랗게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을 발견하자, 준은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약솥이 내 불꽃을 못 견딜줄이야…생각도 못 해봤어.’
상상조차 하지 못한 사태에 귀빈석에 있던 해길과 동해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하지만 준은 폭발하려는 약솥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펑!
결국 약솥이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터져버린 순간, 주변에 있던 연금술사들은 황급히 자리를 피했고, 광장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하하하하하!”
그리고 다음 순간, 승리를 확신한 준열이 광인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커다란 광장이 침묵으로 물들고, 한참이 지난 뒤 관중석에서 안타까움 섞인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공주는 옷에 붙은 먼지를 툴툴 털며 흰색 연기가 피어 오르는 이준 쪽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임현이 실패했다는 것은, 구름제국의 정체 모를 애송이가 우승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준열이 유색약향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이상, 유슬과 자신의 연금비약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어떻게 할까. 이미 결과는 나온 것 같은데.”
순간 이 광경을 바라보던 동해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준열을 노려보았다.
“뭘 어쩌겠나.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저놈을 칠 수는 없어.”
하지만 해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들어 동해를 제지했다. 이렇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준열을 죽이기라도 한다면 투기대륙에는 가한제국 연금술사 협회가 타국의 연금술사에게 우승을 빼앗기고 그를 죽여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려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날 밤 저 녀석을 바로 그냥…”
가철은 동해보다도 더 짙은 살기를 풍기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후, 죽였어도 문제가 됐을 게야.”
그러나 이번에도 해길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을 뿐 이었다.
“결국 녀석에게 우승자 상품을 넘겨주는 수 밖에 없어…끌끌…제대로 당했군.”
해길은 착잡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광장에 서 있는 연금술사들을 응시하다가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이번 연금술사 경연대회의 최종 승자는…”
“잠시만요!”
바로 그 때, 갑자기 누군가의 외침이 해길의 말을 끊었다.
무수한 눈빛들이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는 곳으로 집중 되자, 자욱했던 연기가 서서히 흩어지며 청년의 형상이 드러났다.
임현이었다.
“하하, 이보게 임현 선생! 약솥이 이미 터져버렸는데 뭘 어쩌자는거야! 이제와서 다시 만든다고 해봤자 지금 만들려던 연금비약은커녕 1레벨 연금비약도 제대로 만들 수 없다고!”
그 동안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연신 임현의 작업을 살펴보던 준열은 드디어 자신의 승리를 완벽하게 확신한 듯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상대를 비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제한시간이 남았으니 난 실패한게 아니야. 당신이 뭐라고 하든, 그게 대회 규정이야! 그리고…난 새로운 연금비약을 만들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
“뭐라고…?”
하지만 너무나도 당당한 준의 태도에 준열의 가슴에는 다시금 서늘한 냉기가 스쳐갔다.
“그게 무슨…”
그리고 다음 순간, 준은 그의 물음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조용히 오른손을 펼쳐보였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약솥의 폭발을 피해 건져낸 연금비약이 있었고 그 연금비약의 표면에는 세 줄의 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저건…?”
“하하! 그것보게, 내가 뭐라고 했나?”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해길과 가철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동해가 자신은 끝까지 임현을 믿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대단하군. 내가 너무 과소평가했어. 그런데, 대체 언제 보통 연금비약에서 무늬를 세 줄까지 만들어낸 거지?”
“허허…정말 믿기지가 않는군. 어떻게 약솥이 터지는 순간까지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을 수 있지?”
가철과 해길은 여전히 이 기적 같은 광경을 믿을 수가 없는 듯 했다.
그러나 준의 손에서 영롱한 빛을 발하는 연금비약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해길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4레벨 연금비약, 최고급 푸른 정령의 비약입니다.”
“뭐라고?!”
‘최고급 푸른 정령의 비약’이라는 말에 준열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푸른 정령의 비약이라고? 말도 안 돼. 무늬가 세 줄이면 불을 몇 번이나 바꾼거야……”
최고급 푸른 정령의 비약의 등장에 공주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녀 또한 연금술사이니, 그 물건이 얼마나 만들기 어려운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세 가지 불꽃을 숨겨두고 있었다는 거야?”
항상 냉정을 잃지 않았던 유슬도 이번만큼은 큰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돼! 저 녀석이 최고급 푸른 정령의 비약을 만들어내다니, 난 절대 못 믿어! 내가 직접 확인해보겠어!”
그 때, 준열이 격앙된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안하지만 당신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어요.”
해길이 자신을 제지하자, 준열은 더욱 더 이성을 잃고 날뛰기 시작했다.
“모양만 비슷하게 생긴 연금비약을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잖아!”
“어이가 없군요…언제 저희가 검증도 없이 우승자를 정하겠다고 했던가요? 우리는 당신이 확인할 권리가 없다고 했지, 확인을 안 하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최종 결과물은 가한제국 연금술사 협회뿐 아니라 협회 소속이 아닌 다른 유명 연금술사 분들과 함께 심사하게 될 것이니, 그런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 * *
푸른 눈의 소년의 지적에 잠시 술렁이던 관객석은 해길의 해명에 의해 순식간에 잠잠해졌지만, 준열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폭발한 약솥에서 만들어진 연금비약이 조금의 손상도 없다고? 절대 그럴 리 없어.’
잠시 후, 심사관들이 몰려들어 준열의 손에 들린 연금 비약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약 5분의 시간이 흐르고, 오대호는 연금비약을 다시 준열에게 돌려주며 관객석을 향해 심사 결과를 알렸다.
“제조 성공입니다. 이 연금비약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당연하지! 빨리 가서 저 자식이 만든 푸른 정령의 비약을 확인하라고!”
준열의 무례한 태도에 심사를 맡은 연금술사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는 이어서 공주와 유슬의 연금비약을 확인했다.
그리고 마침내 임현의 연금비약의 순서가 되자, 관객석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 앉았다.
심사위원들은 푸른 정령의 비약을 이리저리 살피고 영혼 탐지 능력을 통해 몇 번이나 점검해 본 뒤 서서히 입을 열었다.
“이번 발표는 해길 회장님께서 해주시죠.”
이번에는 심사위원이 직접 결과를 말하지 않고 해길에게 발표를 미루자, 관객들의 기대가 점점 커져갔다.
“흠…흠…아주 부끄러운 얘기지만, 제가 시도해도 만들 수가 없는 수준의 아주 훌륭한 연금비약이 탄생했군요.”
해길의 극찬에 관객석은 더욱 쥐죽은 듯 고요해졌고, 주먹을 꾹 쥐고 부들부들 떨던 준열은 말없이 몸을 홱 돌려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서야 도망칠 생각을 하다니. 어리석은 녀석.”
이 광경을 바라보던 해길은 혀를 끌끌 차며 웃자, 동해가 다가가 귓속말을 건넸다.
“내가 쫓아갈까?”
“그럴 필요 없네. 심사위원 중 하나가 실험을 하며 그의 연금비약에 장난을 좀 쳐뒀거든. 놈이 어디로 가든 추적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