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부활
한편 준열은 오랜 경험으로 인해 임현이 만들고 있는 연금비약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알아채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의 향이라면 자신이 만들려던 물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속으로 자신의 우승을 확신했다.
준 역시 지금 상태로는 우승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아직 그에게는 보여줄 것이 많이 남아 있었다.
‘후우! 그럼… 본격적으로 해볼까?’
* * *
잠시 후 준은 붉은 알약 하나를 꺼내든 뒤 그것을 천천히 씹어 보라색 불꽃을 토해냈다.
그와 거의 동시에 푸른 불꽃이 ‘칙’ 소리를 내며 작아지고, 약솥 안에는 어느 새 보라색 불꽃이 차오르고 있었다.
펑…!
“이런…”
귓가를 울리는 폭발음에 모두가 일제히 임현을 바라봤다. 약솥 안에는 향긋한 냄새를 풍기던 연금비약이 이미 새까만 재로 변해 있었다. 명백한 실패였다.
관객석의 이곳 저곳에서는 나지막하게 탄식 소리가 새어나왔다. 공주 역시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역시 우승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황실의 공주인 그녀 입장에서는 자신이 우승하는 것 보다 적국의 연금술사가 우승하는 것을 막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 가한제국의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가 실패했으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반면 유슬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기쁨과 안도감, 안타까움, 기대감이 버무려진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직 자신이 우승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 보였다.
‘임현 선생… 안타깝군. 하지만 걱정 마, 내가 가한제국의 명예를 지켜주지.’
그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서준열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 * *
“실패인가?”
준이 실패하자, 귀빈석에 있던 동해가 심각한 표정으로 해길을 바라봤다.
“괜찮네. 그래도 아직 기회가 있지 않은가…”
해길은 애써 괜찮은 척 담담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거의 기대를 버린 상태였다. 명실상부한 가한제국 최고의 연금술사인 그는 이번 실패로 준의 불꽃 통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꿰뚫어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승산이 없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 이다.
게다가 자신이 건넨 재료의 양으로 기회는 딱 세 번 뿐이니, 이번 실패로 임현의 부담감은 훨씬 커졌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평상시 같은 상황에서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은 연금비약 제조의 성공 여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니, 이런 부담감 아래에서 아직 경험이 적은 임현이 집중력을 발휘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이제 정말 기적을 바랄 수 밖에 없는건가…’
한 번의 실패 이후, 임현은 약솥의 검은 재를 비워내고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관객들은 처음에는 안타까움과 기대가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눈빛 속에서 기대가 사라져갔다.
“실패의 충격이 너무 큰가본데? 하긴, 그럴만도 해. 아직 어린 친구잖아.”
귀빈석에 서있던 나원승 역시 점점 더 임현이 대회를 포기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감정기복이 심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혹시 다른 계획이 있는 건 아닐까요?”
아직 기대를 저버리지 못한듯한 손녀의 말에 나원승은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그렇길 바란다만…”
* * *
한편, 경기장 안에 있는 준은 여전히 요지부동인 상태였다.
‘후…선생님이 계셨더라면…제조 도중에 불꽃을 바꾸는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렇게 멍하니 선 채로 대회 시간이 반 정도 지났을 무렵, 공주의 약솥에서 짙은 약 냄새가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4레벨 연금비약인 것 같아!”
주변의 뜨거운 반응에 공주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번져갔다. 약솥의 연금비약은 그녀가 유일하게 만들 수 있는 4레벨 연금비약이었다. 평상시라면 실패율이 꽤 높은 편이었지만, 이런 큰 무대에서 운 좋게도 한 번에 연금비약의 제조에 성공한터라 기분이 더욱 좋을 수 밖에 없었다.
곧이어 유슬의 약솥에서 더욱 강렬한 약향이 퍼져 나오자, 관객석이 다시 한번 술렁이기 시작했다.
‘쯧쯧, 젖비린내 나는 어린 녀석들 같으니라고. 저 정도로 이길 생각을 하면 안 되지.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단다, 얘들아.’
경기장 구석에 있던 준열은 공주와 유슬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그의 약솥에서 진한 약향이 퍼져나가며 보라색 연기가 피어 오르자, 귀빈석에 앉아 있던 연금술사들의 얼굴에 놀라운 기색이 떠올랐다.
“허…‘유색 약 향’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준비를 제대로 해왔군…”
“유색 약 향? 그게 무엇이란 말인가?”
해길의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진 것을 발견한 동해는 마른 침을 삼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말 그대로 약에서 풍기는 향 중 색깔이 있는 것을 의미하네. 약 향에서 색깔이 나타난다는 것은…5레벨 연금비약이거나, 최상급의 4레벨 연금비약이라는 의미야.”
경기장 내에 있던 공주와 유슬 역시 준열의 약솥에서 흘러나오는 보라색 약향을 발견하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린 상태였다.
“저건 분명…”
바로 그 때, 경기장에서 다시 한번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던 ‘임현’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두 볼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기 까지 했다.
“호오…”
해길은 자신감이 넘치는 준의 표정을 보고 갑자기 마음속에서 갑자기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이 상황에서 미소라니…무슨 수가 떠오른 게 틀림없군.’
자신의 유색약향을 보고도 준이 미소를 띠자, 준열은 순간 불쾌한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저 빌어먹을 어린 놈이…대체 뭐지? 허세는 아닌 것 같은데…’
잠시 후, 준이 손을 움직여 약재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다시 푸른색 불길이 피어오르자, 관객석의 사람들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다. 이번에 일어난 푸른 불꽃은 전과 달리 두 손에서 불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의복처럼 임현의 몸을 신비하게 감싸고 있었다.
“말도 안돼…저렇게 많은 양의 천지의 불꽃을 한 번에 다룰 수 있다고?”
이 광경을 바라보던 유슬과 공주는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넋을 잃고 말았다. 심지어 시종일관 자신감을 보이던 준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영혼 에너지가 훨씬 강해졌어. 아주 대단한 친구군. 이런 상황에서 더 강한 불꽃을 불러낼 수 있다니, 어쩌면 내가 저 젊은이를 너무 과소평가 했던 것 같군.”
해길이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동해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지금은 우승이 가능하다 보는가?”
“허허, 아니, 아까랑 똑같네. 모두 본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 하지만…왠지 모르게 기대가 되는 건 사실이야.”
잠시 후, 아름다운 불꽃이 춤을 추며 빠른 속도로 약재가 형형색색의 가루와 액체로 변화해가고, 관객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켰다.
“뭐야…아까보다 훨씬 빠르지 않아?”
“그러게…어떻게 저렇게 빨리 되지?”
“불꽃이 더 세진 것 같은데…”
‘이런…대체 누구 제자인데 저렇게 실력이 뛰어나지? 가한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놈은 단왕 고하의 제자인 유슬이란 놈 아니었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자기도 모르게 임현을 바라보던 준열은 실패 이후 집중력이 흐트러지기는커녕 더욱 빠른 속도로 작업을 이어나가는 경쟁자를 바라보고는 마음속 한 구석에서 불안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 * *
한편,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모두 무시한 채 눈을 감고 오로지 자신의 영혼 에너지를 조종하는데만 온 정신을 집중했다.
약솥 안에서 미친 듯이 타오르는 푸른 불길은 점점 더 맹렬한 기세로 춤을 추고 있었다.
곧이어 준이 천지의 불꽃을 거두어 들이고 보라색 불꽃을 뱉어내는 순간, 관중석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준은 자신의 세포 하나 하나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불꽃에 집중한 상태로 보라색 불꽃의 온도를 조절했다.
한 시간도 남지 않은 상태인만큼 이번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곧 실패를 의미했으니, 그는 비 오듯이 흐르는 땀을 닦지도 못하고, 눈 한 번 깜빡이지 못 한 상태로 영혼의 힘을 쥐어짜내고 있었다.
‘으으…젠장 안돼! 아직도 온도가 너무 높아!’
……
“지금 뭘 하는 거지?”
관객들은 강렬한 약향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음에도 여전히 약솥을 붙들고 보라색 불꽃을 내뿜으며 땀을 뻘뻘 흘리는 임현의 모습을 보고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사람 뭘 만들고 있는 거야? 불은 또 왜 바꾼거지? 저거 되게 힘든 거라고 들었는데 말이야. 다른 약을 만드는건가?”
……
한편,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도 못 하고 임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 하는 관객들과 달리, 해길의 얼굴에는 화색이 만연해 있었다.
‘정말 놀라운 친구군…! 고작 두 번만에 불꽃을 교체해야 할 순간을 정확히 잡아냈어! 게다가 저 뛰어난 온도 조절 능력…배짱과 차분함, 실패에 의해 흐트러지지 않는 정신력까지…대체 어떻게 이런 인재가 여태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꼬…!’
“허허허…동해 이 친구야. 대체 어디서 저런 천재와 연을 쌓았나? 내 장담하지. 저 친구는 몇 년 뒤면 가한제국 최고의 연금술사로 우뚝 설거야. 아니, 어쩌면 투기 대륙 전체에 이름을 날릴 인재가 될걸세.”
“난 이미 그리 생각하고 있었어.”
해길의 칭찬에 동해는 당연하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조용히 혼잣말을 읊조렸다.
‘그리고…저 변장한 얼굴 밑에 있는 진짜 얼굴을 보면 훨씬 더 놀랄걸세…’
“좌절 속에서도 침착하게 돌파구를 찾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군. 타고난 재능보다 더 대단한건 바로 저 정신력이야. 어떻게 하면 저 나이에 저런 강인한 정신력을 가질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구나.”
나원승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말 강한 사람이에요. 저라면 첫 번째 실패 이후에 저렇게 더 실력을 끌어내지 못 했을 거예요. 이렇게 중요한 상황에서…정말 대단하네요.”
나설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과 비슷한 또래에게 존경심을 느끼고 있었다.
‘애송이…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천지의 불꽃이나 연금술 지식이야 좋은 스승을 만나고 운이 좋다면 어떻게 되는 문제지만…저 강인한 정신력은 재능과 배경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야. 어떻게 저런 어린놈이…’
서준열은 실패 이후 더욱 강한 집중력으로 연금비약의 제조에 임하고 있는 임현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 역시 구름 제국의 협회장 자리를 노리고 이곳에 온 만큼 한 치도 물러설 수 없었다.
‘하지만 연금술사 협회 회장직이 걸린 문제인데,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저런 새파란 어린놈에게 질 수는 없지.’
곧이어 준열이 더욱 매서운 기세로 불을 내뿜자, 검정색 화염이 약솥을 뒤덮으며 짙은 보라색 향기가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엄청난 향이야…”
그가 만들어 낸 약향은 이미 경기장 안의 다른 모든 냄새를 지워버릴 정도로 강렬했지만, 신비로운 보라색 연기와 함께 갈수록 그 향을 더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