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서준열
몇 분간 주위를 샅샅이 둘러보던 준이 결국 흔적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다시 지붕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허허…생각보다 더 예민한 아이군.’
검은 망토를 두른 사내는 준의 방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난감한 듯 실소를 터뜨린 뒤 바람처럼 자취를 감췄다.
‘에휴…그나저나 아가씨는 대체 왜 저 녀석에게 푹 빠져 있는 건지…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 해도 한참 자격미달인데 말이야.’
* * *
방안에서 준이 다시 팔을 베고 침대 위에 몸을 눕히는 순간, 동해가 들어와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걸어왔다.
“동생! 아주 제법이던걸. 하하! 해길 그 노인네까지 놀라서 입을 못 다물던데 말이야.”
준은 동해가 나타나자마자 잘됐다 싶어 방금 전 일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선배님, 요즘 누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감시? 그럴 리가 있나? 가한제국에서 날 몰래 감시할 만한 실력자가 있을 리가 없어. 그건 가철 그 늙은이도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준이 방금 전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하자, 동해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갔다.
“흠…동생이 그렇게 얘기하니 하나 짚이는게 있군. 소금성에서 정체 모를 투황과 싸웠던 일…기억하지? 그 때 말이야. 내가 또 다른 강자의 기운을 느끼긴 했거든.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그냥 지나쳤지만…생각해보니 그 후로도 비슷한 감각을 몇 번 느낀 적이 있어. 그런데 너무 희미해서 말이야…”
동해의 말에 준은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선배님…왜 그런 얘기를 이제야 하시는 거에요! 선배님이 제대로 감지하지 못할 정도라면 최소한 투종급이란 소리잖아요!”
“이봐 동생…자네 가한 제국에 투종이 있단 소리 들어봤어? 그리고 투종이 있다 쳐도, 그 정도 강자면 천하에 두려울 게 없는데 원하는 것이 있으면 나타나서 빼앗아 갔겠지 뭐 하러 뒤를 밟아. 투종이라면 자네와 나 정도는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안녕이란 말이야. 그러니 당연히 내가 뭔가 미약한 다른 기운을 잘못 감지했나보다 하는 거지… 너무 약하게 느껴졌다고.”
동해의 설명에 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도저히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렇네요. 그럼 일단 지켜보죠. 만일 우리가 생각 못한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면 언젠가는 모습을 드러내야 할 테니까요.”
“하하. 그러지. 그보다 오늘 밤에 재밌는 일을 하나 벌일 예정인데, 같이 가는게 어떻겠나? 해길에 가철에 나까지, 투황이 셋이나 된다고.”
“네? 투황 셋이 모여서 할 일이 뭐가 있다고…”
투황 셋이라면 웬만한 가문을 하룻밤 만에 깨끗하게 지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 준은 그 셋이 모여 벌일만한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하…”
하지만 동해가 장난스런 미소를 짓는 순간, 준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설마…그 회색 망토?”
“끌끌, 그거야. 해길이 계속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해서 같이 정체를 좀 알아보기로 했지.”
“그렇다면 혹시……”
“뭐 상황을 봐서 손을 쓸 수도 있고 안 쓸 수도 있겠지. 하하. 쓸데없는 얘기는 관두고, 그 녀석의 실력을 알아보고 싶으면 따라 오라고.”
동해는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일으켜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겼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몸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도착했군…”
앞장 서던 동해가 발걸음을 멈추자, 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조용히 지붕 밑으로 몸을 날렸다. 아주 작은 소리가 났지만 그만하면 완벽한 착지였다.
고개를 드니 건너편의 거대한 지붕 위에서 해길과 가철이 흡족한 표정으로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네가 올 줄 알고 있었네.”
해길은 준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17살에 4레벨 연금술사라니…눈이 뒤집힐만한 일이니까요. 그 정도 재능이라면 7레벨 이상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7레벨 이상의 연금술사라면 그야말로 투기대륙 전체가 뒤집힐 일이니 안 오는게 이상하죠.”
그러나 해길은 조용히 고개를 저을 뿐 이었다.
“말도 안 되네. 그 정도 천재라면 감추려 해도 감출 도리가 없는 천재야. 그런데 가한제국 연금술사 총회의 회장과, 황실의 투황은 물론이고 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그런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적이 없다고? 나는 믿을 수가 없군.”
“쓸데없는 소리 말고 직접 단서를 찾아보는 게 낫지 않겠나?”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가철은 웃으며 둘을 바라보자, 준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투황이 셋이나 모여 있으니…일이 잘못 되도 상관없다 이건가…너무 여유롭군.’
“허허, 가자고.”
가철의 말에 해길 역시 딱히 거절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명의 투황이 방향을 틀어 도시의 남쪽에 있는 여관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준 역시 그 뒤를 쫓았다.
넷은 몇 분간 조용히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달리다가, 해길의 신호에 의해 발걸음을 멈췄다.
“호오…이거 보게? 이거 의심이 많은 놈이구만.”
가철은 발 아래 놓인 까만 실 몇 가닥을 발견하고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검은 실의 끝에는 작은 방울이 하나씩 달려 있었다.
“흠…이놈 보통 조심스러운게 아니군. 하지만 이런 건 생각하지 못 했을걸?”
잠시 후 동해가 웃으며 손을 뻗자, 옅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얇은 얼음층이 거울처럼 여관 위를 덮었다.
곧이어 그가 염력을 흘려보내자 얼음층이 거울처럼 깨끗해지며 방안의 풍경을 비추기 시작했다.
네 사람은 조용히 동해가 만들어 낸 얇은 얼음 거울에 맺힌 형상을 바라봤다. 아직 방 안에 아무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 회색 망토를 입은 소년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기다려보자고.”
해길의 말에 나머지 셋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게 약 한 시간이 흐른 뒤 삐그덕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서서히 열렸다.
순간 모든 사람의 이목이 얼음 위에 비친 영상으로 집중됐다.
방 안에 들어온 것은 틀림없이 낮의 그 소년이었다. 그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긴장이 풀린 듯 한숨을 푹 쉬었다.
“젠장…외모만 바뀌면 뭐하나…내용이 그대로니 피곤하구만…게다가 염력 소모가 너무 크단 말이지.”
사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연금비약 한 알을 삼키자, 얼마 지나지 않아 17살의 소년이 사라지고 중년의 사내하나가 나타났다.
“허…저 녀석이었군.”
“누군지 아시나요?”
눈앞에 나타난 중년의 사내가 누군지를 아는 듯한 해길의 말에 준의 동공이 확장됐다.
“알지…구름 제국 연금술사공회의 부회장일세. 이름은 서준열. 예전에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지.”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러나 소년의 정체를 확인한 가철과 동해의 말투에는 이미 살기가 가득했지만, 정작 상대를 알아본 해길은 상당히 침착한 상태였다.
“일단 보자고…”
* * *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 서준열의 몸에서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가볍게 몸을 풀었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사내는 자신이 이곳저곳에 뿌려놓은 함정 중 하나가 망가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굳은 표정으로 버럭 고함을 질렀다.
“누구냐!”
쾅!
그리고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창문이 산산조각 나며 무시무시한 염력 폭풍과 함께 시커먼 그림자가 방안으로 날아들었다.
서준열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방안으로 날아든 희미한 형상을 바라보다가 손바닥으로 진한 노란색의 불꽃을 만들어 낸 뒤 상대를 향해 전력으로 휘둘렀다.
그러나 투령의 눈으로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무언가가 날아들었고, 서준열은 그대로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우욱…해길이군! 날 죽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텐데!”
그러나 준열의 한마디에 그를 덮친 형체에서는 더욱 더 오싹한 살기가 뿜어져 나올 뿐 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곧이어 준열을 덮친 그림자가 막 몸을 날리려는 순간, 해길의 목소리가 그를 멈춰 세웠다.
한편 이 광경을 바라보던 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을 쳐 죽이는 가철의 행동에 전신에서 식은땀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정말 사람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군…실력도 실력이지만 저 냉혹함이 더 무서워.’
“윽…해길, 역시…당신이군!”
“바로 죽이면 되지, 뭘 듣고 자빠졌어.”
가철은 해길의 대응이 못 마땅했는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하하, 역시 해길 회장이군. 아마 날 죽인다면 내일 투기대륙 전체에 가한제국 연금술사 총회에서 대회 우승자를 조작하기 위해 참가자를 죽였다는 소식이 퍼져나가겠지.”
준열의 말투는 이런 사태에 대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상당히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서준열 부회장…신분을 위장하고 대회에 참여하는 건 규정위반이라는 것을 자네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리고 규칙에 따르면 이런 경우 우리 협회는 당신을 처리할 권리가 있네.”
“위장? 하하, 그걸 어떻게 증명하지?”
서준열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펴 불꽃을 피워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연금비약을 모두 태워버렸다.
“하아…”
그러나 너무나 뻔뻔한 서준열의 태도에 해길이 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찌푸리자, 서준열은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세 명의 투황이 찾아온 이상, 죽이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오늘밤이 그의 인생에서 맞는 마지막 밤일 것이 자명했으니 서준열 역시 그야말로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는 중 이었다.
그리고 그 도박의 결과는 ‘일단’ 성공이었다.
“좋아. 지금은 자넬 죽이지 않겠네. 그렇지만 너무 쉽게 자신이 우승할 것이라고 확신하는군. 이번 일을 계기로 구름제국 협회 회장자리라도 노리는 모양인데, 너무 일찍 축배를 드는 것 같구만. 게다가, 정말로 자네가 우승을 한다고 해도 말이야…그 다음 일도 생각을 해야지.”
그렇게 살기등등한 가철과 달리 해길은 끝까지 냉정한 태도로 경고를 남긴 뒤 자리를 떠났고, 해길이 떠나자 나머지 셋도 잠시 준열을 바라보다 부서진 창을 통해 밖으로 날아갔다.
“빌어먹을 노친네…조만간 내 앞에 무릎을 꿇게 해주지…”
“이봐 해길, 이 빌어먹을 노친네가, 투황 세 명이 모여서 한다는 게 고작 이거였어?”
해길의 뒤를 따라 이동하던 동해가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자, 옆에 있던 가철도 찜찜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빈손이라니. 우린 그 녀석의 실체와 신분을 모두 파악 하지 않았나.”
해길 역시 그들의 더러운 기분을 이해한다는 듯 말투에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그게 무슨 소용인가. 내일 또 대회에 참가할 텐데. 그 실력에 경력까지 합해지면 우승을 따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말이야.”
“하하, 우리에게는 임현이란 친구가 있지 않은가? 유슬과 월아도 있고 말이야. 이 중 누가 실력이 부족한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다 생각하네.”
해길은 그렇게 말하며 흐뭇한 표정으로 준을 바라봤다.
“얼렁뚱땅 넘길 일이 아니네. 아이들의 재능이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상대는 구름제국 연금술사 협회의 부회장이 아닌가.”
가철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놈이 우승을 하면 가한제국 협회 입장에서야 망신도 그런 개망신이 따로 없겠지. 게다가 과정이야 어찌됐든 일단 그 놈이 정말 구름 제국 연금술사 협회 회장이라도 되는 날에는 문제가 더 커진다고. 무슨 생각으로 회장이 되면 죽여 버린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월아의 실력은 내가 잘 알아. 3등 안에 드는 건 어렵지 않을 수 있지만 녀석이 아니었어도 임현 후배를 이기지 못 해. 임현 후배가 아니었어도 유슬과 비슷한 수준이니 우승을 장담 못한다고. 나야 연금술사가 아니니 잘은 모르겠지만, 임현이라는 친구도 서준열이라는 놈만 못한 것 같은데?”
동해 역시 가철과 비슷한 생각인 듯 했다.
“맞아 이 노친네야. 규칙을 어긴 건 그놈인데 뭘 이래저래 짱구를 굴리고 있나.”
해길은 그들의 푸념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이준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