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첫 번째 관문
해길의 시선이 이준에게로 이동했다.
“이 친구, 이번 내부 시험에서 성적이 가장 좋았다는 그 친구이지? 이름이…임…현이었나?”
“회장님, 임현 맞습니다.”
이준은 신분이 가장 높은 해길 조차 자신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에 내심 놀라워하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지. 이토록 어린 나이에 검은 영혼의 잎을 8번이나 제련하다니, 고하 그 녀석도 이정도 실력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노인의 칭찬에 이준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었다.
바로 그 때…동해가 여봐란 듯이 다시 한번 빈정거리는 말을 내뱉었다.
“저 영감탱이, 죽지 않고 나이만 먹더니 말이 더 많아졌군.”
갑자기 들려온 비웃음 소리에 모든 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불청객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에도 해길은 조금의 불쾌한 기색도 없이 도리어 놀라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만…이 얼음의 기운은…얼음 노인네?”
“하하, 영감, 아직 머리가 맛이 가진 않았군.”
“자네 분명 메두사여왕에게…”
“운 좋게 목숨을 건졌어.”
자신에게 빈정거린 이가 동해임이 확실해지자, 해길의 얼굴에는 금새 미소가 번졌다.
“명줄도 길지…허허허! 아무튼 자네가 살아있다니 다행이군! 알고 지내던 이들이 거의 다 먼저 가버려서 말이지, 참으로 반갑네 반가워.”
뜻밖의 상황에 오탁과 만석을 비롯해 설매와 세연까지 동해를 몇 번이나 다시 훑어봤다.
‘이 녀석이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같이 엄청난 인물들인 거지?’
곧이어 그들의 시선은 자연히 이준에게로 옮겨갔다.
“동해…동해…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오탁은 해길의 반응을 보고 동해라는 이름에 대해 곰곰이 기억을 되짚고 있었다.
“얼음왕…!”
잠시 후, 오탁보다 먼저 만석의 입에서 동해의 별명이 튀어나오자, 모두가 입을 쩍 벌린채 동해와 준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자신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괴팍한 노인이 전설의 인물이라니…그리고 행방이 묘연한 전설의 강자와 함께 나타난 인물이 다름 아닌 준이라는 사실에 그들은 경악을 금치 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동해가 검은 바위성 연금술사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끼고 있을 때, 해길의 입에서 섬뜩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그나저나…이유는 모르겠지만…저 임현이란 친구에게서 뭔가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말이야…”
“아는…사람이요?”
“흠…누구지…”
‘이런 젠장…설마 이 노인네…메두사의 기운을 느끼는건가? 아니면…스승님? 어느 쪽이지?’
그렇게 준이 속으로 식은 땀을 흘리고 있을 때, 갑자기 뜻 밖의 인물이 나타나 그를 구해줬다.
“오오! 해길, 동해, 젊은이까지. 다들 일찍 도착해 있었구만.”
자리에 나타난 것은 황실의 수호자 가철로, 가철과 두 공주가 나타나자 해길은 생각을 멈추고 그에게 눈길을 돌렸다.
“가철 장로님도 일찍 오셨군요.”
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즉시 가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세 명이나 만날 수 있을지 몰랐는데. 껄껄, 이 정도면 정말 인연이 맞긴 맞나보군.”
“그럼그럼. 인연이지.”
해길의 말에 해길 역시 공감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참, 인사를 시켜줘야지. 임현 후배, 이미 월아는 잘 알고 있을 테니 됐고…이쪽은 월아의 친언니인 초아일세. 이번 대회의 안전을 통제하는 5만 대원을 통솔하고 있지.”
준은 가철의 뒤에 서있는 차가운 인상의 여인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초아야, 이쪽이 내가 말했던 임현이라는 젊은이다. 실력이 아주 비범하지. 이번 대회의 유력한 우승후보란다.”
“안녕하세요, 임현 선생님.”
가철의 소개에 초아는 싱긋 웃으며 백옥 같은 손을 슬며시 내밀었다.
‘음…웃으니 인상이 확 달라 보이는 여자네.’
준은 얼음처럼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여인이 웃음을 짓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첫인상은 차가웠지만,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예쁜 사람이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초아 공주님.”
“이번 대회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으셨으면 좋겠네요. 때가 되면 제가 축하주를 준비해 연회를 열도록 하겠습니다.”
준이 월아와 달리 예의 바르면서도 계산적인 그녀의 태도에 속으로 적잖이 감탄하고 있는 사이, 초아는 동해를 비롯한 사람들에게도 깍듯한 태도로 예를 갖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준이 눈을 돌려 아래를 내려보자, 광장에 점점 더 많은 연금술사들이 모여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관중석 역시 사람들로 빼곡히 차 있었고, 드문 드문 어린 소녀들의 환호성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주희와 나설아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임현씨, 오늘 꼭 좋은 성적을 거두길 바랄게요.“
“임현 선생님 실력이라면 3등 안에는 들지 않을까요?”
주희와 나설아가 나타나 임현에게 친한 척을 하자, 초아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호오…나설아처럼 도도한 여자까지 저렇게 대할 정도로 대단한 남자란 말이야?’
* * *
대앵- 댕-
얼마 지나지 않아 경쾌한 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시끄러웠던 장내에 침묵이 내려 앉았다.
장내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해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귀빈석 앞자리로 서서히 걸어 나왔다.
“가한제국 연금술사협회장의 이름으로 제 7회 연금술사총회 시작을 공식 선언합니다.”
“와아아—!”
현장은 환호 소리로 들끓었다.
“지금부터 참가자 여러분들께서는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주시길 바랍니다.”
무섭게 수많은 연금술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분주하게 이동하기 시작하자, 해길은 고개를 돌려 유슬과 월아, 임현을 바라봤다.
“자네들은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게. 저쪽에 따로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니, 이름표를 찾아서 앉으면 될 걸세.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좋은 곳이네.”
해길의 손가락이 가리키던 곳을 바라보는 세 명의 표정은 성격에 따라 제각각 이었는데, 유슬은 조금 흥분한 듯 보였고, 공주는 대놓고 신이 나있었지만, 준은 영 내켜하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해길은 마치 이준의 속마음을 꿰뚫어본 듯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겸손을 아는 건 아주 좋은 일이야. 그렇지만 겸손과 소심함은 다르네. 이렇게 큰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자기를 내보일 줄도 알아야 해. 그리고 그 시선을 견뎌내는 법도 알아야 하지.“
노인의 말에 준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맞는 말 이었다.
“네. 맞습니다.”
“하하, 그래. 이제 내려가게나.”
“먼저 가보겠습니다.”
바로 그 때, 유슬이 자리에서 일어나 광장으로 껑충 뛰어 내렸다.
귀빈석에서 광장까지의 높이는 상당했지만, 유슬은 염력으로 기둥을 만들어내며 그것을 타고 내려가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유슬의 등장에 관객석에서 환호성이 일자, 동해가 피식 웃으며 준에게 눈치를 줬다.
“에휴…전 그냥 걸어갈게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해길의 말에 동의했던 준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유슬처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툭.
동해가 무방비 상태의 이준을 광장 쪽으로 밀쳐낸 것이다.
“동생도 실력을 보여줘야지.”
“이게 무슨…”
준은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갑자기 등을 떠밀려 떨어지는 준을 바라보던 관객들은 젊은 연금술사가 그대로 추락해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허공에서 젊은 연금술사가 바닥을 향해 손을 내뻗자, 폭발적인 염력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몸을 띄워 올렸다.
“껄껄, 참 신묘한 방식으로 기류를 통제하는구만. 저 어린 나이에 날개를 사용하지 않고도 공중에서 이동할 줄 알다니, 투왕급의 투사들도 하기 어려운 것인데 말이야…”
“아무튼 늘 상상 이상이라니까……”
해길과 동해, 가철 세 사람은 준의 행동을 보며 염력 날개를 보는 것 이상으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투왕이 되면 누구나 염력 날개를 사용할 수 있지만, 염력 날개를 사용하지 않고도 공중에서 몸을 제어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였고, 대개의 경우 투왕이라 하더라도 상당한 실력자가 아니라면 그 정도의 염력 통제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짝짝……”
“너무 멋지다.”
“와! 저건 누구지!”
준이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관중석에서 박수와 함께 함성소리가 터져나오고, 광장이 순식간에 후끈 달아올랐다.
‘과연…증조할아버지께서 괜히 칭찬하시는게 아니군.’
이를 지켜보던 초아 또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준의 실력을 인정 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그 때, 무천을 바라보며 한 사내가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이 네가 말했던 그 녀석이냐?”
“네. 저 놈이 주희랑 아주 가까이 지내는 것 같아요. 나설아가 말리지만 않았다면 이 자리에 서지도 못하게 만들어줬을 텐데!”
그러나 무천의 거친 말에 사내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괜히 저 젊은이의 성질을 건드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주희라는 계집이 그렇게 좋다면 다른 방법으로 구애하거라.”
“하지만……”
사내의 말에 무천은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자기도 모르게 털이 삐쭉 서는 것을 느끼며 입을 닫았다.
* * *
준은 조용히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탁자 앞에 앉아 눈앞에 가지런히 늘어선 약재들을 바라봤다. 약재 앞으로는 얇은 종이 한 장과 함께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는 거울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얇은 종이를 손에 들고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가 문득 이상한 것을 밝견했다. 종이에 적힌 것은 2레벨 연금비약의 조합표였지만, 그가 알고 있던 전통적인 조합표와는 뭔가가 달랐다.
일반적인 조합표는 영혼의 힘으로 읽어야 짧은 시간 내에 연금비약을 만들 때 알아둬야 할 요점들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이 얇은 종이에 기록된 내용은 대략적인 순서가 전부였고 세부적인 묘사는 전부 생략되어 있었던 것 이다.
‘뭐야 이거…이 따위로 적어놓으면…실패 확률이 엄청나게 높아질텐데…’
더욱 말을 잃게 하는 부분은, 탁자 위에 놓여진 재료가 딱 2회분이라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에게 딱 두 번의 기회만 주어지며, 재료가 소진되었는데도 연금비약을 만들지 못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자연스레 실격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허…이정도 난이도일 줄이야. 괜히 8년에 한 번 열리는 대회가 아니군.’
준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젓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예상대로, 대부분의 연금술사들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 하고 있었다.
그는 하는 수없이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연구를 시작했다. 사실 이런 종류의 시험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난처하기는 그 역시 다른 연금술사들과 크게 다를바가 없었다.
광활한 광장에서 수많은 참가자들이 얇은 종이 한 장을 펄럭이며 표정하나 없이 내용을 읽어 나가는 통에 광장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그렇게 5분 가량이 지나자, 광장에 또 한 번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해길이 나타나 광장 한켠을 가리켰다.
“맞은 편 벽의 모래시계가 다 닳기 전까지 연금비약을 완성하지 못한 자는 실패로 간주합니다.”
“네!”
“좋습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관문을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이윽고 해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거대한 광장 위로는 수천 송이의 불꽃이 튀어 올라 불바다를 이루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