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가철 장로의 실력
“자격이 없다고?”
얼음왕의 한마디에 가철의 동공이 두 배는 커졌다. 가한제국 10대 강자 중 하나의 입에서, 그것도 괴팍하고 오만하기로 유명한 동해의 입에서 ‘자격이 없다.’는 말이 나오다니, 동해를 잘 아는 가철인만큼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설아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 또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껄껄대며 호탕한 웃음을 짓는 동해를 멍하니 바라봤다.
가한제국의 얼마나 많은 젊은 투사들이 투황급 강자의 제자가 되기 위해 애를 쓰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하, 동해 선배님 농담도 참. 제가 선배님을 만나기 전에 스승님과 연이 닿아 그리 된 것이지요.”
이준은 민망한 듯 웃으며 다른 해명 아닌 해명을 했지만, 동해는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의 말이 사실인가?’
가철은 동해의 표정을 살피다가 그 말이 겸손이나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다.
“젊은이, 혹시 스승의 이름이 무엇인지 혹시 알려줄 수 있겠나? 어쩌면 내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니 말이야.“
그러나 호기심이 가득한 가철의 질문에 임현은 언제나와 같은 대답을 꺼내들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장로님. 저희 선생님은 산에서 은거하시면서 조용히 사시는 분이라 아마 들어본 적이 없으실 겁니다…게다가 스승님이 밖에서 자신에 대해 말하고 다니지 말라고 워낙 당부를 하셔서…”
임현의 한마디에 가철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렇군. 그럴 수 있지. 은거하는 강자들은 세상에 자기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니까. 알겠네.”
‘아무리 그래도 동해가 이렇게 저 자세로 나갈 정도의 인물이라니…어처구니가 없을 정도군.’
드넓은 가한제국에는 수 많은 강자들이 존재했지만, 동해를 아득히 뛰어넘는 강자라니, 가철은 속으로 적잖이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자, 자, 시간도 늦었는데 각자 집으로 돌아갑세.”
바로 그 때, 동해가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정리하며 손뼉을 쳤다.
“하하, 친구도 연금술사 총회에 참가하겠지?”
가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있는 젊은이를 향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네.”
준은 가철과 대화를 나누는 내내 스승의 빈자리를 실감했다. 좀 전부터 그 무시무시한 동해조차 능가하는 강자를 만나자 자기도 모르게 기가 죽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약로가 함께 할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후…빨리 나씨 가문에서 정령의 꽃을 얻어내야지 원…’
“젊은 친구들을 위한 무대이니 나도 내일 가서 참관을 좀 해볼까 싶네. 동해가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한 사람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보고 싶어졌어.”
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철은 또 다시 예의 그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돌려 자신의 증손녀를 바라봤다.
“월아야, 시간이 늦었는데 아직까지도 밖을 쏘아 다니고 있는 게냐. 빨리 돌아가자구나.”
“아아…”
가철의 말에 공주가 쭈뼛대며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왔고, 노인이 손을 뻗자 강한 염력이 그녀의 몸을 순식간에 그의 옆으로 끌어당겼다.
“설아, 유슬, 선생님께 안부 전해다오.”
그는 한 손으로 공주를 들고 조용히 웃음을 짓다가 무천에게도 한마디를 덧붙였다.
“무천 이 녀석, 또 돌아왔구나? 이번엔 조용히 좀 있거라. 아니면 다시 내쫓아버릴 테니까.”
“네.”
무천은 그 답지 않게 얌전한 고양이 마냥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 그럼 저희도 갈까요?”
상황이 정리되는 듯 하자 준은 동해를 바라보며 자리를 뜰 것을 제안했고, 그는 얼음왕이라는 명성답게 가천에게만 고개를 까딱한 뒤 다른 사람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날개를 펼쳤다.
……
“선배님, 설마 저에 대해 뭔가 이야기 하신 건 아니죠?”
다른 이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준이 동해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그럴 리가. 동생 눈에는 내가 그렇게 눈치 없는 얼간이로 보이나?”
“감사합니다. 운남종이 워낙 가한제국 곳곳에 손을 뻗고 있어서… 선배님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이래저래 신경 쓰이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네요.”
“상처는 아직 회복이 다 안 됐나?“
“흠…아직 조금 더 회복이 필요해요. 그래도 나씨 가문에서 정령의 꽃만 손에 넣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준의 대답에 동해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혀를 찼다.
“쯧쯧…그러게 그런 위험한 짓은 왜 해가지고 말이야…그나저나 저 늙은 괴물은 그새 8성 투황이 된 것 같군. 어쩌면 9성일지도 모르겠어. 저 놈은 나와 유씨 가문의 관계 때문에 늘 나를 경계하거든. 유씨 가문이 너무 강력해져서 황실의 통제를 벗어날까 두려운게지. 어제 우연히 놈이 내 기운을 눈치채고 나타나더니 오랜만에 실력이나 보자고 하더군. 말로는 자기 수련을 도와줄만한 자가 많지 않은데 나를 만났으니 반가워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지금 그 노인네가 내 실력을 파악하지 못 했을 리도 없고, 아마도 일종의 경고였겠지.”
준은 문득 가철이 운남종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이를 통해 황실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을 방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설마… 절 방해하진 않겠죠?”
“걱정은…저 늙은 너구리는 겉으로는 호탕한척 하지만 속으로는 음험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야. 내 말 때문에 네 스승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을 테니 자넬 건드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걸세.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가급적이면 빨리 영혼의 힘을 회복해 두도록 하게.”
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머리를 굴려댔다.
‘후…복잡하군. 동해도 조심해야지, 메두사 때문에 연금술사 총회에서 조합표도 손에 넣어야지…정령의 꽃도 손에 넣어야지…거기다 가철에 운남종까지…복잡해 죽겠군.’
* * *
다음날. 구름 한 점 걸리지 않은 푸른 하늘이 눈부신 햇살을 쏟아내며 연금술사 총회의 열기를 더하고 있었다.
연금술사 총회는 8년에 한 번 열리는 가한 제국의 큰 행사였으니, 아침부터 도로 곳곳에 사람들이 가득했고, 거리 구석구석에서 연금술사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가한제국의 상점들 역시 평소보다 일찍 문을 열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특별한 날, 준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침대에서 일어났고, 언제나와 같이 침대 모서리에 앉아 정신을 집중한 뒤 천천히 눈을 떴다.
“일어났나? 오늘 이 도시로 몰려든 연금술사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을 거야. 괜히 연금술사 총회라고 불리는 게 아닌 것 같군. 하긴, 오늘이 아니면 언제 이리 많은 연금술사들이 한 곳에 모이겠어.”
창가에는 어느 새 동해가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뭐…연금술사들은 저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 실력을 자랑할 기회가 왔는데, 벌떼처럼 모여드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준의 대답에 동해는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난 자네는 대회에 참가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어쩔 수 없죠. 우승 상품이 꼭 필요하거든요.”
“껄껄…다른 연금술사들만 불쌍하게 됐군. 내가 보기엔 투황이 무투사들 사이에 끼어있는 느낌이거든.”
계속해서 동해가 자신을 한껏 추켜세우자, 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영혼의 힘이 많이 상해서…장담을 못 하겠네요. 솔직히 그 전에도 그렇게까지 자신이 있지는 않았어요. 선배님이 너무 좋게 봐주시는거죠.”
“하하, 그래? 내가 보기엔 동생이 너무 겸손한데 말이지.”
“휴…일단, 대회장으로 가죠. 시간이 됐네요.”
준은 속도 모르게 자신을 칭찬하는 동해를 바라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인파로 가득한 입구를 뚫고 연금술사 협회 건물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협회에 도착하자 오탁과 만석이 준을 반겼다.
“검은 바위성 협회에서는 자네만 바라보고 있어. 알지?”
“하하, 최선을 다 해야죠.”
오탁의 기대 가득한 말에 준이 웃고 있는 사이, 만석이 동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자 준은 만석과 오탁에게 동해를 소캐시켰다.
“아, 이 분은 동해 선배님이십니다. 일이 있어서 저와 함께 다니고 계시는 중이에요.”
“아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검은 바위성의 만석입니다. 이쪽은 오탁이고요.”
하지만 동해는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태도로 고개를 한번 가볍게 까딱하고 말 뿐 이었다.
“아아, 죄송해요. 선배님이 조금 괴팍하신 구석이 있어서…”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던 오탁과 만석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동해와 준을 데리고 뒷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 대회 장소는 황실 광장이야. 수 만명의 사람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곳 이지. 사전조사를 해보니 이번 대회 참가자가 2천명이 넘는다고 하더구나. 이전보다 훨씬 많은 숫자야.”
“2천 명……”
이준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치에 혀를 내둘렀다. 세상 모든 연금술사를 한데 불러 모으면 이 정도가 될까 싶을 정도의 숫자였다.
“대회는 몇 차례의 시험으로 진행되네. 뒤로 갈수록 난이도가 증가하고 마지막에 남겨진 사람이 우승하는 방식이야.”
“아아. 그렇군요.”
준은 2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서 불을 다루며 연금비약을 만들 것을 상상하자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 때, 황실의 광장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황실 광장의 규모는 상상했던 것 보다 더욱 대단해서, 고개를 돌려도 광장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광장 안은 먼저 와있던 사람들로 인해 시끌벅적했고, 대회 참가자와 관람객의 입장 구역이 나뉘어져 있었다.
물론, 준은 오탁 덕분에 줄을 서지 않고도 손쉽게 광장 안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원형 광장의 양 쪽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관중석이 배치되어 있고, 관중석의 옆쪽에는 화려하게 꾸며진 귀빈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고위인사들 및 수뇌부들을 위해 마련 된 곳 같았다.
광장 한켠에서는 수많은 연금술사들이 돌로 만든 의자에 조용히 앉아 대회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대회 시작까지 시간이 있으니 귀빈석으로 가보자구나. 앞으로 네게 도움이 될 인사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오탁이 웃으며 말했다.
“네.”
사실 준은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분위기상 오탁의 말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오탁과 만석은 연금술사 총회의 부회장인 최평이 앉아 있는 곳까지 준을 데리고 갔다. 최평의 곁에는 보라색 연금술사 복장을 걸친 노인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저 분이 바로 가한제국 연금술사총회 회장, 해길 어르신이네. 협회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분이시지. 현재 6 레벨 연금술사라고 알려져 있고, 해길 어르신에 비하면 단왕 고하조차 명함을 못 내밀 정도라네.”
바로 그 때, 동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던졌다.
“허, 저 늙은이가 아직도 안 죽었다는 게 놀랍군. 이놈의 가한제국에는 무병장수하는 노망쟁이들이 뭐 이리 많은 거야.”
그러자 그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동해의 말을 들은건지 졸린 눈을 한 노인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해길 어르신, 오랜만에 뵙습니다. 역시나 정정하시네요.”
오탁과 만석은 조심스레 앞으로 걸어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래. 만석과 오탁이군. 4 레벨이 되다니, 아주 훌륭하구먼.”
“모두 해길 어르신이 지난번에 가르침을 주신 덕입니다.”
“내가 가르쳐준 게 뭐가 있나. 그냥 경험 몇 가지를 늘어놓았을 뿐인데. 다 자네들의 노력 덕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