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진정한 괴물
준이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천이 주희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생각 중인가?”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희는 유천이 다가오자마자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렇군. 내가 자네에게 물어볼게 있어서 말이야. 임현이라는 친구, 어떻게 생각하나?”
“괜찮죠.”
그녀는 자신이 대장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을 한 것을 깨닫고는 조금 민망한 듯 입술을 매만졌다.
“대장로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하. 나도 꽤 마음에 드네. 만일 두 사람이서 잘해볼 생각이 있다면 반대하지 않지.”
유천이 농을 건네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자 주희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장로님,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정말로…저희는 그냥 좋은 친구일 뿐이에요.”
그러나 그녀의 반응에 유천이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감정이 없다면 만드는 것도 괜찮지 않겠나…유씨 가문 사람들은 대부분 정략 결혼을 한다는 것…알고 있지? 사실 가문의 장로들 중에는 무천과 자네를 엮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네. 무천보다는 저 자가 낫지 않겠어?”
무천의 이름을 듣자, 주희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주희의 반응을 본 유천은 자신도 몰래 안타까움을 내비치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자리를 떴다
큰 가문에서 사람들이 동경할 만한 지위를 얻는다는 것은 그만큼 잃어야 하는 것도 많은 일 이었다. 주희 역시 이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가문에게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 수 밖에 없어. 나설아 같은 여자야 될 수 없겠지만, 나에게는 내 나름의 방식이 있으니까…관리자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겠지.’
주희의 생각은 결코 자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 정도의 나이에 유씨 가문 경매장의 관리자가 되는 것은 평범한 상재(商材)로는 어림도 없는 일 이었다.
‘흐음…그러려면 우선 경매장 본부에서 성과를 내야 하는데…’
그렇게 주희가 상념에 잠겨 긴 한숨을 내쉴 무렵,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소년의 그림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날도 추운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고개를 올려 준을 바라보던 주희는 문득 코 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준이 내민 검은 망토를 끌어안자, 따뜻한 느낌이 온 몸에 전해지는 것 같았다.
“일은 다 끝냈어?”
“괜찮아요?”
“나름…”
“그럼 다행이네요.”
둘은 그렇게 잠시 동안 말 없이 자리에 앉아 멀찍이 연회장에서 들려오는 웃음 소리를 들었다.
“휴. 피곤해서 들어가 봐야겠어요. 누나도 같이 갈래요?”
준이 먼저 입을 떼자, 주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막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갑자기 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아스라하게 먼 곳을 가만히 바라봤다.
“동해 선배? 이틀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갑자기 왜 이런 곳에서 싸우고 있는 거지?”
소년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두 개의 그림자가 그를 지나 건물 밖으로 날아갔다.
그림자의 주인공은 나원승과 유천이었다. 곧이어 유천을 따라 무천, 나설아가 자신이 바라보던 방향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준의 눈에 들어왔다.
“누나, 여기 있어요.”
준 역시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주희에게 당부를 남기고는 재빨리 날개를 펼쳤다.
잠시 후…방금 전까지 자신과 싸움을 벌였던 자가 날개를 펄럭이며 모습을 드러내자, 무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임현을 위 아래로 훑어봤다.
“말도 안돼…저 자식이 투왕급 강자였다고?”
너무나 뜻 밖의 상황에 나설아 또한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임현 선생’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저건… 임현? 어떻게 염력 날개를 갖고 있는 거지?”
나원승과 유천은 공중에서 펄럭이는 날개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은 무천보다 월등한 실력자였으니, 준의 실력이 아직 무투사 계급이라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예전에 사라졌다는 무투기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 있나?”
잠시 후, 유천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이준을 바라보다가 나원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비행 무투기?”
“아마 그게 아니겠나? 그나저나…사라진 전설의 무투기라니…갈수록 저 친구의 내력이 궁금해지는군.”
“그러니까 말일세…”
유천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원승은 ‘임현’을 더욱 더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이 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두 분 거기 계셨군요. 저랑 같이 가시면 속도에서 밀리실걸요.”
바로 그 때, 이준이 두 사람 앞에 멈춰서며 장난스레 웃음을 지었다.
“하하, 이런 귀한 구경을 하다니…설마 이거 전설의 비행 무투기인가?”
유천이 단 번에 날개의 정체를 꿰뚫자, 준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운이 좋아서 그렇죠. 어서 가시죠.”
……
강자들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유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설마 동해 선생님인가?”
준처럼 예민한 영혼 탐지 능력을 갖지 못한 유천은 싸움을 벌이고 있는 두 강자 중 한명에게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자,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네, 저 둘 중 한명은 동해 선배님입니다.”
“동해?”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나원승은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유천을 바라봤다.
“자네 혹시 그 투황 강자 중 한 명과 아는 사이인가?”
“하하. 일단 가보면 알걸세.”
* * *
두 명의 투왕과 준은 목적지에 거의 다다르자 속도를 조금씩 낮추며 조용히 거대한 정원 위에 자리를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정원 중앙에서 번쩍이는 두 개의 빛을 응시했다.
두 빛은 각각 흰색과 노란색으로, 무시무시한 기세로 이곳저곳을 민첩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두개의 빛이 서로 접촉할 때마다 폭발적인 힘이 터져 나왔고, 새까맣게 내려앉은 밤하늘에 두 개의 빛이 반짝일 때 마다, 순간적으로 낮이 찾아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흰색 빛에서는 한기가 느껴졌고 그 주변을 떠돌던 습기가 순식간에 얼음결정이 되어 땅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노란 빛은 무시무시한 백색 섬광을 피해 이리저리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섬광이 잠시 공중에 멈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하. 얼음 노인네. 몇 년 못 본 새에 많이 죽었군.”
“흥, 늙은 괴물. 당신은 몇 년 동안 변한 게 하나도 없군. 사람이 발전이 없어. 나이를 생각해보면 이제 곧 은퇴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이제 한계 아니겠어? 끌끌, 당신이 은퇴하면 가한황실도 꼴이 말이 아니겠구먼!”
“하하… 내가 명줄이 길어서 말일세. 그나저나 곧 은퇴할 퇴물도 못 이기다니, 얼음왕이라는 명성이 아깝군.”
흰 빛과 노란 빛의 주인공의 대화를 듣던 나원승은 멍하니 넋이 나가 유천을 바라봤다.
“얼음왕? 정말 그 동해인가? 아직 살아있다니.”
“아직 정정하시지. 다만 수 십년간 은거했을 뿐이네.”
유천의 말에 순간 나원승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동해와 유씨 가문의 인연은 보통이 아니었다. 과거 유씨 가문의 가주 자리가 꽤 오랫동안 비어있었음에도 가문이 그 위세를 유지했던 것은 오로지 동해의 비호 덕분이었다.
‘이런! 일이 복잡하게 됐군. 유씨 가문이 정말 얼음왕의 도움을 받는다면 순식간에 가한 제국 최대의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될텐데…’
물론 나씨 가문은 나설아를 연결고리로 사실상 운남종의 비호를 받고 있으니 두려울 것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투황급의 강자가 유씨 가문과 협력하는 것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물론, 계산이 빠른 유천 역시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대화를 들어보니 저 노란빛의 주인공이 황실의 가철 장로같지?”
나원승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유천을 향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지. 그 자를 제외하고는 동해 선생과 저런 대화를 나눌 자가 없으니까.”
“괜히 걱정했군.”
준은 분위기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자,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임현 동생도 얼음왕을 아는가?”
바로 그 때, 안도한 준의 표정을 발견한 나원승이 말을 걸어왔다.
“하하, 동해 선생님이 이곳까지 온 것이 다 임현 선생 덕분일세. 그러니 이 친구야말로 우리 유씨 가문의 은인이 아니겠나.”
유천이 실실 웃으며 대신 답을 하자, 나원승은 순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장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호오…비행 무투기에 천지의 불꽃, 거기다 투황급 강자까지…갈수록 탐이 나는 친구군…’
그렇게 세 사람이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무천을 비롯한 다른 투사들이 그들 곁에 도착했다.
“저…기운은… 증조할아버지 같은데……”
공주는 노란불빛이 번쩍이는 곳을 바라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럼 저 반대편은 누구지? 가한제국에서 투황이라 해봤자 손에 꼽을 정도니…황도 주변이라면…운남종 사람일 것 같은데.”
무천이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 선생님은 아니야.”
하지만 나설아가 즉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누구지?”
운남종 차기 종주의 한마디에 모두가 식은땀을 흘렸다. 정체를 모르는 투황 강자의 출현은 결코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쿵—
그 때, 정원의 상공 위에서 또 다시 거대한 기운이 충돌했고, 흰 색 빛을 내뿜는 그림자가 크게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휴. 이제 그만하지. 지금의 나는 도저히 당신 상대가 아닌 것 같군.”
“쯧쯧, 안타깝구만. 실력이 너무 떨어졌어…”
노란빛의 사람의 몸이 살짝 떨리며 빛이 사그라들자 검소한 삼베 망토 차림을 한 백발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만 기다리면 내 실력이 회복이 될 터이니 걱정 말게. 게다가 이번엔 유씨 가문을 관리하러 온 것도 아니니까 걱정 말고.”
동해는 자신과 노인간의 실력차에 빈정이 상한 듯 조금 불쾌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하하, 이제 둘 다 늙어빠져 곧 관에 들어갈 마당에 그런 머리 아픈 일에 더 얽혀서 좋은 게 뭐가 있나. 차나 마시면서 한가롭게 마실이나 좀 다니고. 얼마나 좋아.”
삼베 망토의 노인이 온화한 표정을 짓자 동해는 싸늘하게 냉소를 지었다.
“당신이 뭘 걱정하는지는 내가 잘 알지.”
하지만 삼베 노인은 씨익 웃음을 지을 뿐, 더 이상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지 않으며 고개를 돌려 정원 밖에 있는 이준 일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보아하니 우리 덕에 놀란 사람들이 좀 있는 것 같군.”
노인은 주변을 둘러보다 마침 몸을 숨기려 하던 공주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하하, 가철 장로님, 못 본 사이에 더 건강해지신 것 같습니다.”
그 때, 유천과 나원승이 노인을 향해 날개를 펄럭이며 다가왔다.
“허허…오밤중에 놀래켜서 정말 미안하네. 늙어서 이게 무슨 주책인지…”
“아이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인은 두 사람의 투왕과 대화를 나누다가 준을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행 무투기…? 이 친구는 누군가?”
“임현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준은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자, 가철은 흥미롭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 굉장하군. 이렇게 어린 나이에 그런 귀한 물건을 손에 넣다니…보통내기가 아니야.”
“이런 이런…”
잠시 후, 준과 유천을 발견한 동해가 날개를 펄럭이며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얼음 노인네, 이 친구가 당신 제자인가? 실력이 아주 뛰어난 것 같은데.”
궁금증을 못이긴 가철 장로가 먼저 질문을 던지자, 나원승 역시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준을 바라봤다.
“내 제자? 하하. 그랬으면 좋겠지만…이 아이의 스승이 되기에는 내가 부족한 점이 많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