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짧은 결투
이미 해는 내려앉은 시간대였지만, 나씨 가문은 불빛으로 인해 대낮처럼 밝았다.
익숙한 길을 지나 저택으로 들어서자,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저택의 한쪽에 유슬과 공주가 있었고, 주희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오늘은 날이 아니군…’
하지만 준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나설아가 그를 발견하고 생긋 웃으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염병…또 너냐…’
“임현 선생님, 듣자하니 이번 시험에서 엄청나게 좋은 성적을 거두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
“운이 좋았습니다.”
준은 짧게 한마디를 내뱉을 뿐, 나설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설아는 도통 이 사내의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한제국 최고 가문의 영애에, 운남종의 차기 종주. 거기다 그 지위 못지 않게 매력적인 외모까지…그런데 이 사내는 시종일관 자신과 눈조차 마주 치지 않으려 했다.
보통의 경우 자신과 눈을 못 마주치는 남자는, 너무 부끄러워서 이거나, 그녀에게 기가 질려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신을 싫어하는 기색을 드러내는 사내는 생전 처음이었다.
그렇게 나설아가 대체 이 남자는 나에게 왜 이러나…하면서 속으로 이를 가는 사이, 임현의 입에서는 또 다시 노골적인 거절의 말이 튀어나왔다.
“설아씨 안쪽에서 엄청 많은 분들이 설아씨만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계셔도 되는 건가요? 가보셔야 할 것 같은데.”
바로 그 때, 등 뒤에서 익숙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임현 씨, 또 만났네.”
주희였다.
“음? 임현 선생님과 주희 아가씨가 서로 아는 사이인가 봐요?”
“임현씨랑은 알고 지낸 지 몇 년 됐어요. 사이 좋아요 우리.”
주희는 웃으며 준을 바라봤다.
“그쵸, 임현씨?”
“왜 여기에 있어요?”
준은 주희의 질문에 답조차 하지 않고 그녀의 손에 들린 술잔을 낚아채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너,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야?”
주희는 이준에게 빼앗긴 술잔을 보며 장난스레 말했고, 준은 그런 주희를 보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임현 선생님, 주희 아가씨, 편하게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먼저 들어갈 게요. 죄송해요.”
이 광경을 바라보던 나설아는 더욱 자존심이 상해 즉시 자리를 피했다.
‘빌어먹을 놈, 내가 주희보다 못 하다는 거야 뭐야!’
나설아가 사라지자, 준은 즉시 목소리를 낮춰 주희에게 용건을 물었다.
“누나, 저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예요! 여기 왜 왔어요!”
“후…나씨 집안 큰어르신이 우리에게도 중요한 인물이라고 했잖아…그리고 가한제국에서 이름 있는 세력들은 거의 다 와있어. 그 자리에 내가 빠지라고? 그게 더 이상하잖아!”
“허, 아직 완치된 건 아닌데 벌써 축하연을 한다구요?”
“그만큼 널 믿는단 소리 아니겠어? 그보다 나도 진짜 놀랐다고. 기대는 했지만 네가 이 정도로 뛰어날 줄을 몰랐지! 고하도 못한 건데…지금 황도 전체가 네 얘기로 떠들썩하다고!”
“후…솔직히 정령의 꽃 아니었으면 이런 일 안 해요!”
준이 짜증스러운 말투로 미간을 찌푸리자, 주희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보다, 나설아를 만났는데, 생각보다 훨씬 덤덤하네?”
“걔랑 만난 건 내가 아니라 임현이에요.”
주희는 순간 준의 눈에 깃든 살기를 보고 이내 말을 돌렸다. 확실히 영리한 여자였다. 그녀는 장난을 칠 때조차 상대의 기분이나 생각을 읽어내는 것이 완전히 몸에 배어 있었다.
“들어가서 좀 둘러보지 않을래? 우리 대장로님도 널 궁금해 하거든.”
“별로 관심 없어……”
“제발 부탁이야. 내가 널 얼마나 도왔는데 내 체면 하나 못 세워줘?”
준이 자리를 떠나려 하자 주희는 즉시 강아지마냥 달라붙어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취기가 올라 발그레한 볼이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하…누나…진짜 왜 이래요.”
“이잉…안갈 거야?”
주희의 귀여운 콧소리에 준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가요, 가!”
……
잠시 후, 두 사람이 연회장으로 들어가자 모두가 주희와 준을 바라봤다. 주희는 은빛성에서와 마찬가지로 황도에서도 이름 난 여자였으니, 그녀와 팔짱을 끼고 들어온 사내가 누구인지를 모두가 궁금해 하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주희는 다정한 표정으로 준을 이끌고 백발의 노인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앞에 있는 노인의 얼굴에는 짙은 세월의 흔적과 함께 위엄과 품격이 느껴졌다.
“이분이 바로 유천님이야. 대장로님…이분이 바로 선생님이 말씀하신…”
주희의 말에 유천은 즉시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벌떡 몸을 일으켜 환히 웃음을 지었다.
“아아! 자네가 바로 그, 이…임현이군! 나는 유천일세!”
“영광입니다.”
“아닐세,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네. 오히려 내가 영광이지.”
‘음…동해 선배님과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은데…이거 잘못 엮이는 거 아니야?’
너무나 친절한 유천의 태도에 준은 왠지 모르게 불길해지기 까지 했다. 동해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사내의 태도로 보아 동해와 보통 사이가 아닌 듯 했다.
‘하아…설마 동해 선배랑 틀어지면 유씨 가문에서 날 찾아다니는 건 아니겠지?’
“연금술사협회에서 진행한 시험 성적이 아주 뛰어나던데, 축하하네.”
‘뭐야. 이 사람들 정보망이 뛰어난 건지 그쪽 보안체계가 허술한 건지, 당최 모르는 사람이 없군.’
나설아에 이어 유천까지 자신의 시험 성적에 대해 언급하자 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닙니다.”
“앞으로 무슨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주희를 찾게나. 두 사람은 인연이 있지 않은가?”
……
“설아야, 임현 선생이 원래 유천과 알던 사이냐?”
“아닌 것 같아요. 임현씨와 주희씨가 친한 사이인 것 같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처음 우리 쪽에 임현씨를 소개 시켜준 것도 주희 아가씨였잖아요.”
“흠…미인계라…”
나원승은 눈앞에서 먹이를 뺏긴 듯 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사람이 가진 잠재력이면 나중에 또 어떻게 발전할지 모르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가고 싶겠죠.”
“하하, 그렇지만 우리도 굉장한 미인이 있지 않니.”
바로 그 때, 옆에 있던 나원철이 웃으며 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아빠,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얘 말이냐? 됐다 됐어. 며칠 동안 임현이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 거 보면 설아 이 계집애를 보내도 별 소용없을 게다. 내 손녀지만, 주희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거든.”
“할아버지…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나설아가 또 다시 도끼눈을 뜨며 할아버지를 바라보자, 나원철은 즉시 중재에 나섰다.
“하하, 아버지도 참, 우리 설아가 낫지요. 다만 주희가 경매장 일을 오래해서 사람 대하는 것이 더 능숙해서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무씨 가문 사람은 왜 아직 안 온 거지? 분명 초청장을 보내라 했을 텐데.”
나원승은 부녀 동맹을 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즉시 말을 돌렸다.
무씨 가문은 가한제국의 삼대 제국 중 마지막 하나로, 가문 구성원 중 대부분이 전투에 미친 ‘전투광’이었고, 그런 만큼 군사력 쪽으로는 다른 두 가문과 비교해도 상당히 앞서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무씨 가문의 모연님께서 오늘 서북쪽 변방에서 오신다고 들었어요.”
“모연? 무자비하게 사람을 때리고 죽이고 다닌다는 그 자가 온단 말인가?”
모연이라는 말에 나원승의 표정이 상당히 심각해졌다.
“그 난폭한 자가 제국 변방에서 2년 동안 수련하며 어떻게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진 않을 것 같아요.”
나설아 역시 모연이라는 사내를 껄끄럽게 여기는 듯 했다.
“영…불길하구만…”
……
“유슬 형님, 저 분이 바로 형님을 이겼다는 그 놈입니까? 그냥 보기엔 별거 없어 보이는데요.”
빙 둘러 싸여 담소를 나누던 중 화려한 의상을 갖춰 입은 사내 하나가 이준을 곁눈질로 슬쩍 보고는 말했다.
“하하, 기술이 엄청나. 어쩔 수 없었지.”
유슬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술잔을 기울였다. 확실히 속이 쓰리긴 쓰린 모양이었다.
“우리가 모르는 방법으로 부정행위를 했을 수도 있죠. 유슬 형님은 단왕고하 님의 제자인데 어떻게 저런 무명 연금술사한테 밀릴 수가 있겠어요.”
바로 그 때, 공주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톡톡 두드려댔다.
“오늘 밤에 뭐 재밌는 일이 하나 생길 것 같군.”
“무슨 뜻인가요?”
“보면 알겠지.”
유슬의 질문에 공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잔 속에 남아 있는 술을 깨끗이 비우고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잠시 후…갑자기 어디선가 푸른 염력 한줄기가 주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준을 향해 날아들었고, 순식간에 그의 손에 들려있던 유리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다.
쾅!
곧이어 이준의 주먹에서 나오는 묵직한 소리가 사방으로 퍼지자,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토끼 눈을 하고 그쪽을 쳐다봤다.
“드디어 싸우기 시작한 건가?”
공주는 이런 소동을 예상이나 했다는 듯 씨익 웃음을 지었다.
“아… 저 사람…무천 아니야?”
공주 주변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갑자기 연회장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사내를 가리켰다.
“오늘 일어날 일이라는 게 이거였군요……”
유슬 또한 놀란 모습이었다.
“무천이 주희한테 엄청난 호감이 있다는 사실은 황제 수도 사람들이라면 다 알겠죠. 그래서 떠나기 전에도 주희를 건드리면 다 죽여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놨었잖아요.”
공주는 안색이 어두워진 준을 바라보며 연신 웃음을 지었다.
“불쌍해라. 하필 무천이 들어올 때 주희랑 그렇게 다정하게 있다니.”
……
준은 뜬금없이 자신을 향해 날아든 염력의 위력에 짐짓 놀라면서도 태연한척 고개를 들었다.
“누구시죠? 뭔가 오해가 있는 듯 한데…”
하지만 상대는 이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주희를 응시할 뿐이었다.
“주희, 오랜만이야. 더 예뻐졌군. 역시 내 미래의 아내다워.”
“너… 이 미친 자식!”
주희는 무천을 보자마자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감정을 숨기지 못 하고 있었다.
‘별일이군…누나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다니…’
무천의 한마디에 대충 상황을 파악한 준은 주희를 향해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저 사람 누구야?”
“무천. 3대 가문 중 하나인 무씨 가문 사람이야…하아…날 쫓아다니는데…미쳐버리겠네. 완전히 미친놈이야…”
주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낮은 목소리로 그에 대해 설명하다가 문득 준의 눈동자에 어린 살기를 보고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이런 표정의 준을 본적이 있었고, 그 뒤의 결과가 어땠는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충동적으로 굴지마. 무천은 무씨 가문의 젊은 세대에서 제일 실력 있는 사람이야. 이 황제의 수도를 떠날 때만해도 3성 무투사 였다고…”
한편, 주희와 준이 무언가 소곤거리는 것을 보자 무천의 얼굴이 더욱 더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걸 보면 새로 굴러 들어온 녀석인가 보군. 버릇을 고쳐줘야겠어.”
무천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자, 주위에 있던 나씨 가문의 시종 몇이 황급히 달려 나갔다. 아마도 나원승이나 나원철을 부르러 가는 듯 했다.
그러나 준은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무천을 노려봤고, 이 흥미진진한 광경에 연회장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다음 순간, 준의 주먹에 염력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하더니 이내 우뢰 같은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무천이 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주먹을 들어 맞대응 한 것이었다. 그리고 두 주먹이 부딪히며 고막을 타격하는 폭발음을 만들어내는 순간, 무천이 반대편 팔을 휘둘러 준을 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