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예상외의 복병
자리에 막 소란이 일 무렵, 최평이 정밀 측정기를 손에 들고 걸음을 옮기며 입을 뗐다.
“이건 저희 연금술사협회에서 특수 주문제작한 측정기입니다. 이걸 이용해 여러분들의 제련 기술을 확인하겠습니다.”
“이곳에 먼저 측정 재료를 넣을 겁니다.”
그는 움푹 파인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럼 상단에 빛이 나면서 순도가 나타나지요. 10이 가장 높은 점수이고 1이 가장 낮은 숫자입니다. 4점부터 합격입니다. 자, 그럼 이제 여러분들께서 정련하신 재료들을 모두 꺼내 주세요. 재료를 기계 안에 넣기 전에 몇 번의 정련을 거쳤는지 말씀해주시면 더 좋습니다.”
최평이 박수를 치자 감독을 맡은 4레벨 연금술사들이 모두 의자에서 일어서며 측정기를 들었다.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응시자들은 일제히 저장반지에서 옥병을 꺼내어 움푹 들어간 구멍 속으로 넣었다.
“3번의 정련을 거쳤습니다.”
“5점. 시험 합격을 축하합니다.”
“자, 다음.”
“4점, 통과.”
그렇게 하나 둘씩 순서대로 평가를 받았고 합격한 이들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다음. 5점입니다. 통과.”
“다음은 3점이군. 불합격.”
몇 명의 실력 있는 합격자들 뒤로 드디어 불합격자가 탄생했다. 그녀는 2레벨 연금술사였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상태로 거의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얼마 뒤, 마침내 사람들이 모두 궁금해 하는 이의 결과를 들을 차례가 되었다.
“6번 밖에 정련하지 못했습니다.”
“7점. 축하한다. 통과했구나. 역시 단왕의 제자야.”
그리고 또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유슬과 정반대의 의미로 모두가 궁금해하는 이의 결과를 들을 차례가 왔다.
“몇 번이나 정련 했나요?”
“아마 8번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바로 다음 순간…싸늘하게 얼어붙은 분위기속에서 최평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9점……”
적막. 장내의 분위기는 그 두글자로 요약할 수 있었다.
측정기 화면에 나타난 빨간색 숫자는 모든 이들의 넋을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검은 영혼의 잎을 여덟 번이나 정련할 수 있는 능력은 4레벨 연금술사나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고, 오탁조차 화염을 이용해 재료를 정련한다면 많아야 9번을 할까 말까였다.
2레벨 연금술사가 내놓은 충격적인 결과에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은 넋이 나가 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그 중에서도 가장 얼굴이 어두운 것은 은연중에 준을 무시했던 공주와, 준에게 경쟁의식을 불태우던 유슬 둘 이었다.
“엣헴…”
잠시 후…최평의 헛기침 소리에 얼이 빠졌던 사람들이 하나 둘 정신을 차렸다.
“보아하니 나도 늙긴 늙었나보군. 그래도 임현이라는 친구가 너무 자기 실력을 숨겼군…어떻게 그 실력으로 2레벨 휘장을 달고 다니나 그래…흠흠…”
“부회장님께서 너무 과대평가 하셨습니다. 불을 다루는 데 재능이 조금 있을 뿐이지 다른 능력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준은 이번에도 예의 여유 만만한 태도로 겸손한 웃음을 지을뿐 이었다.
“친구, 안목이 상당한데?”
“나도 이건 예상 못했네. 일 년 사이에 이렇게나 성장했을 줄이야…우리 지부에서 2레벨 연금술사 시험을 볼 때 까지만 해도 이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지는 않았거든…”
최평이 씨익 웃음을 짓자, 오탁 역시 놀랍다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그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흠흠…그럼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1위 임현, 2위 유슬, 3위 월아…나머지는 각자 합격과 불합격을 통지 받았으니 합격 하신 분들은 내일 대회에서 뵙겠습니다.”
최평이 결과를 발표하는 사이, 준은 주위 사람들의 표정을 느긋하게 훑고 있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흥분으로 발그레 상기된 상태였고, 표정이 어두운 것은 유슬과 공주 뿐이었다.
한편 눈에 띄게 기뻐하는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의 준을 바라보며 최평은 또 다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뭔가 있긴 있다고 생각했지만…허허…실력은 둘째치고 어떻게 저나이에 저런 침착함을 가졌을꼬…이 정도 그릇이면 고하를 능가할 연금술사가 탄생할지도 모르겠군…’
잠시 후…공식적으로 시험이 종료되자 응시자들은 각각 원로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하나 둘 회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하하, 임현 선생님 아주 대단하신걸요? 실력을 꽁꽁 감추시더니,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유슬은 회장을 떠나지 않고 시커먼 낯빛으로 억지웃음을 지으며 준에게 인사를 건넸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하하, 역시 천지의 불꽃은 대단하군요.”
“네.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준은 유슬의 칭찬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등을 돌릴 뿐 이었고, 유슬은 그런 상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준이 대회장을 나서자, 오탁이 부리나케 달려와 그의 곁에 다가왔다.
“계속 따라오신 건가요?”
“하하! 이 친구! 서운하게 말하기는! 자네가 이번에 이목을 끈 덕에 최평이 곧 자네에 대해 조사를 시작할걸세. 어찌됐든 20살 짜리 연금술사가 검은 영혼의 잎을 8번이나 제련한다는 건 가한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니까!”
“네…그렇군요.”
사실 준도 이번 일로 인해 최평이 자신의 뒤를 캘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천지의 불꽃을 쓰지 않는 것 정도가 준이 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눈가림이었다.
“제 신분은…번거로우시겠지만 부회장님께서 좀 숨겨주세요. 여러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신분이 노출되면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오탁은 준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그가 정말로 참가하지 않는다면, 오탁과 만석 역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힘이 닿는 데까지 노력해보겠네. 다행히 아직 회원정보를 보내지 않았거든.”
“감사합니다.”
“이렇게 훌륭한 인재를 놓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바로 그 때, 만석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오탁, 어떻게 됐나? 시험 결과는 어땠어? 이 녀석은 어땠고?”
그 때, 주변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우며 자리에서 멈춰 섰다. 시험은 철저히 기밀로 진행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 결과를 알 리 만무했다.
“그럭저럭 괜찮았아요. 간신히 통과했죠 뭐.”
준의 입에서 나온 답에 오탁은 자기도 모르게 그를 두어번 정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가한제국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낸 사람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었다.
“허허, 통과했다니 다행이군. 그래도 조금 걱정했었는데, 이번 내부 시험 참가자들이 하나 같이 뛰어나서 말이야!”
“이봐, 넌 우리 검은 바위성을 대표해서 나가는 사람이라고. 유슬 같은 천재이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내부 시험에서 10등 안에는 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간신히 통과해선 안 되는 거라고.”
바로 그 때, 눈치 없는 세연이 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고는 신이 나서 훈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유슬이 천재는 맞지만 고하의 제자니까 그렇잖아. 게다가 나이도 이주…임현보다 많고. 이 정도 성적을 거둔 것만으로도 아주 잘 한거야. 우리였으면 이정도도 못 했을 걸.”
하지만 지난번 ‘꽃불’ 사건 때문인지, 설매는 대놓고 준의 편을 들었다.
“네가 유슬을 엄청 존경하는 거 알지만 임현씨는 우리 쪽 사람이라고. 이 분이 지면 우리도 좋을 게 하나 없고.”
“나도 그냥 저 사람이 우리 검은 바위 성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니까 하는 말이었어. 내가 뭐라 한 것도 아니고…갑자기 유슬 얘기가 왜 나와.”
“됐어. 둘다 조용히 하거라.”
오탁은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말리며 만석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는 자네도 깜짝 놀랄걸?”
“응? 왜지?”
오탁이 씩 웃으며 막 입을 열려는 찰나, 복도가 시끄러워지며 유슬과 공주를 비롯해 젊은 연금술사들이 줄줄이 회장에서 걸어나왔다.
“저 사람이 유슬이지? 단왕 고하의 제자?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다.”
“이렇게 어린데 3레벨이라니, 와 진짜…”
“시험 성적도 엄청 뛰어나겠지?”
“좋은 스승님을 둬서 좋겠다. 부러워 죽겠네.”
그렇게 사람들이 모두 유슬을 칭찬하느라 여념이 없는 사이, 갑자기 그가 준을 향해 걸어오며 웃음을 지었다.
“임현 선생님, 축하합니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임현씨 그럼 내일 대회에서 뵙죠.”
유슬은 또 다시 임현이 무뚝뚝한 태도로 하나마나한 대답을 하자 서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뒤 그대로 가던길을 갔다.
“임현씨. 축하드려요.”
곧이어 유슬과 함께 걸어가던 공주가 준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녁에 성에서 연회가 있어요. 대회에 참가하는 연금술사 분들도 굉장히 많이 오십니다. 혹시 임현씨도……”
“하하, 죄송해요. 저녁에 또 볼 일이 있어서요. 시간이 없을 것 같네요.”
공주의 청에도 임현의 대답을 한결같았다. 공주는 은연중에 임현을 무시했던 것을 후회하며 씁쓸하게 억지 웃음을 지었다. 황실 입장에서는 연금술사나 뛰어난 투사를 얼마나 같은 편으로 두느냐가 황실의 권위와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이번 일은 그녀에게도 제법 뼈아픈 실수였다.
“아닙니다. 나중에라도 혹시 연이 닿으면 차라도 한잔 하고 싶네요…그럼 이만.”
준은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공주를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시험 보기 전과 후가 엄청 다르군. 누가 황실 사람 아니랄까봐. 쓸모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칼 같이 구분해내는군.’
“뭘 축하한다는 거야?”
“별거 아니야.”
유슬과 공주가 나란히 축하인사를 건네자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챈 세연이 고개를 들이밀며 질문을 던졌지만, 이번에도 준은 하나마나한 답만을 할 뿐 이었다.
“저도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일 뵙죠.”
준은 세연이 뭔가를 더 캐물을까봐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 준이 사라지자마자, 오탁이 흥분한 기색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시험 내용이 영혼의 잎을 제련하는 것이었네.”
“영혼의 잎을 정련한다고? 꽤 어려웠겠군. 중급 재료라 정련하기 까다로울 텐데 말이야. 나도 지금 하라 한다면 여덟, 아홉 번밖에 하지 못할 것 같은데…”
“하하, 그렇지. 그런데 유슬은 여섯 번이었어. 과연 고하의 제자다웠지.”
“여섯 번이라니? 정말 대단하군. 저 나이에 그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했다니…”
“와, 저는 두 번밖에 못해요. 세연이도 저랑 비슷할 걸요. 역시 천재는 천재인가봐요.”
오탁의 말을 듣던 설매 역시 감탄을 금치 못 했다.
“아주 잘했지. 맞아. 그런데 말이야……큭큭…우리 검은 바위성 대표께서 8번을 해버렸지…”
오탁의 폭탄 같은 발언에 모두가 벼락을 맞은 듯 자리에 우뚝서고 말았다.
“선…선생님… 농담이시죠?”
세연은 너무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고, 설매는 아예 넋이 나가버린 상태였다.
“정말인가?”
“하하하! 그래. 8번이라고…제련만 놓고 보면 자네나 나랑 거의 동급이야.”
* * *
연금술사 협회에서 돌아온 준은 숙소에서 몇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나씨 가문의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독을 할 때 마다 그의 몸 속에 각인 독의 독성이 쌓이는 것은 분명했지만, 스승을 부활시킬 희망과 투왕의 염력을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 이다.
게다가 아직 각인 독은 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라도 대지의 불꽃이 있으니 어떻게든 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도 그가 이런 위험한 결정을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