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제련
오탁이 건넨 문서에는 기다랗게 사람들의 명단이 가득했고, 실력이 뛰어난 이들에게는 표시가 되어있었다.
‘유슬? 역시…이놈도 나오는군.’
“이 공주님은 황실에서 온 그 사람이죠?”
준은 5번째 자리에 적혀 있는 공주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오탁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본적 있나?”
“아까 문 앞에서 봤어요, 이렇게나 앞 순위에 있을지 몰랐네요.” 이
준은 그녀의 순위를 보고 의외라는 듯 말했다.
“재능이 어마어마한 친구지. 황실의 지원을 아낌없이 받기도 하고 말이야. 만만하게 봐서는 안돼.”
그의 당부에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명단을 살폈다.
“역시나 쟁쟁하네요. 3레벨 연금술사만 해도 13명이나 되니까 말이에요.”
“쉽진 않을 거다. 그래도 실력으로 맞붙어야지.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힘이 닿는데까지 도우마.”
“대회는 내일 시작하죠? 지금은 뭘 해야 할까요?”
“하하, 해야 할 일이 있긴 하지. 대회 전에 진행하는 마지막 시험이라 봐도 될 것이야. 다른 사람들은 이런 시험을 보지 않지만 우리 같이 각 지부의 추천인 신분으로 참가하게 되는 선수는 별도의 절차가 필요하거든. 협회에서 우리의 안목을 시험하는 거랄까…만일 이 시험에서 낙제하게 된다면 추천도 날아가지. 동시에 기대주들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고.”
오탁은 설명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고, 준도 그 뒤를 따랐다. 그는 적막한 복도를 한참 걸어가더니 커다란 문이 나타나자 그 문을 밀어젖히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서는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왔고, 고풍스러운 장식품이 가득했다.
하지만 화려한 장식보다 준을 놀라게 한 것은 그 안에 자리잡고 있는 젊은 연금술사들의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천재란 천재들은 다 모아놨군.’
자리에는 유슬과 황실의 아가씨를 비롯해 20대 전후의 3레벨 연금술사들이 그득했다.
그야말로 가한제국 최고의 천재들이 모두 모인 자리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그 자리에서 2레벨 연금술사는 준 하나뿐 이었다.
“호오…오택, 그 청년은 누군가?”
잠시 후, 적막한 분위기를 깨고 백발의 노인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돌리자 높은 단상 위에 연금술사 복장을 잘 갖춰 입은 노인 하나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사람이 바로 협회 부회장 최평이다. 공주님의 스승이기도 하지.”
“그렇군요.”
“다른 녀석들 눈빛은 신경 쓰지 말거라. 저 나이에 3레벨 연금술사가 된 만큼, 오만한 놈들뿐이거든.”
오탁이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자, 이준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꽤 오랜만에 받아보는 얼간이 취급이었다.
‘옛날 생각나네…’
오탁은 몇 걸음 정도 앞서 나아가며 그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노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준은 묵묵히 뒤에서 기다렸다.
“오씨, 이 친구가 검은 바위성에서 꺼내는 비장의 카드인가보군.”
노인은 한눈에 봐도 연금술사 협회에서 높은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 같았는데, 정교하게 짜낸 연금술사 복장을 발목까지 늘어뜨렸으며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에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의 까만 눈동자에서는 평온함과 온화함이 느껴졌지만 신기하게도 신분을 나타내는 연금술사 망토와 반짝이는 휘장을 빼면 얼핏 보기에 평범한 노인처럼 느껴질 만큼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준이 노인을 관찰하고 있을 때 그 또한 이준을 찬찬히 훑고 있었다.
“그렇지. 이름은 임현이야. 잠재력이 대단해.”
오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십니까, 부회장님.”
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최평에게 공손하게 예의를 갖췄다.
“뭔가 특별한게 있는 친구군.”
“하하, 특별한 것은 모르겠지만…시험은 통과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감이 보기 좋군.”
최평은 준이 마음에 들었는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하, 시간이 다 되가니 나도 말을 줄이겠네. 먼저 내려가게나. 시험이 곧 시작될 테니까.”
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그 곳에서 걸어 내려왔다.
“흠…오탁 검은 바위성은 꽤 큰 도시가 아니던가? 왜 2레벨의 연금술사를 데리고 왔나? 3레벨도 있을텐데…”
최평은 준이 사라지자마자 의문스럽다는 눈빛으로 오탁을 바라봤지만, 오탁의 대답은 간단했다.
“난 저 아이를 믿네. 그게 다야.”
“허…자네도 참…알겠네. 그럼 시험을 시작하지.”
곧이어 최평이 아래쪽의 젊은 천재들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오른편의 방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향한 곳에는 여러 개의 검은 천막이 늘어져 있었다.
“각 천막마다 개인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저 곳이 여러분들이 시험을 치를 곳 이지요.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약재의 제련은 연금비약을 만드는 데 있어 몹시 중요한 절차입니다. 그러니 시험 내용 역시 약재를 제련하는 것 이지요. 매 시험장마다 필요한 약재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최단시간 내에 약재를 제련해 여러분들의 능력이 닿는 한 가장 순수한 상태로 만들어주시면 됩니다. 모래시계가 다 될 때까지 못 끝내면 실패이며, 만일 성공을 했다 할지라도 우리 협회의 평가 위원회들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수준일 시 이 또한 실패로 간주합니다.”
엄격한 평가 규칙에 어린 청년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불안한 눈빛을 했지만, 그 중에서 오직 하나, 준만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허…정말 묘한 친구군…’
최평은 그런 준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실력이야 모르겠지만, 확실히 담력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설명이 끝나자 자리에 있던 젊은 연금술사들이 하나하나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준이 자리를 잡으려고 구석진 곳의 커튼을 걷는 순간, 뒤에서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임현 선생님도 시험에 참가하실 줄 몰랐네요. 저희 정말 인연인가봐요.”
“끌려왔을 뿐입니다.”
“겸손하시네요. 선생님이라면 분명히 좋은 성적을 받으실 겁니다.”
이준은 유슬의 지나치게 겸손하고 친절한 태도가 어딘지 마음에 들지 않아예의상 웃음을 한번 지은 뒤 천막을 열어젖혔다.
“유슬 오라버님,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뭐하시나요?”
바로 그 때, 황실의 공주가 밝에 웃으며 유슬에게 다가왔다.
“그냥 아는 사람을 만나서 말이에요. 관심 있으시면 소개 좀 해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유슬이 준을 가리키자, 그녀는 단칼에 고개를 저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녀는 유슬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하하, 네…마음대로 하시죠.”
“저 먼저 들어갑니다. 유슬 오라버니 괜히 저한테 지지 마시고요.”
그녀는 유슬을 보며 눈을 찡긋 하고는 천막안으로 들어갔고, 유슬 역시 바로 천막안으로 들어갔다.
“이번 시험 아주 잘 냈는걸. 제련이야 말로 연금비약 제조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능력이니까. 게다가 불꽃을 얼마나 잘 조절하는지도 볼 수 있고.”
오탁의 말에 최평은 차 한잔을 홀짝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커튼 안에 마련된 작은 공간은 크기는 작았지만 굉장히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돌로 만들어진 탁자 위에 모래시계 및 각종 약재들이 놓여 있었다.
이준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것은 석탄처럼 온통 새까만 약재였다.
‘열에 강한 검은 영혼의 잎이라니…’
그는 즉시 저장반지에서 자신의 약솥을 꺼내 탁자에 올리고는 검은 영혼을 만지작 거리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흠…시작부터 대지의 불꽃을 쓰기는 좀 그렇지…본래 비장의 수는 감춰두는 법이니까.’
생각을 마친 준은 저장반지에서 자신이 만든 하늘 사자의 불꽃을 담은 가짜 연금비약을 꺼내 입안에 문 뒤, 자주색 화염을 손바닥에 옮겨 담았다.
……
적막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는 와중에, 최평이 가장 먼저 눈을 뜨고 반 정도 떨어진 모시 시계를 향해 걸어가며 가볍게 하품을 했다.
“보아하니 시험이 어렵긴 한가보군. 아직 나온 사람이 없는 걸 보니 말이야.”
“실력 있는 사람은 최대한으로 순도를 높이기 위해 시간을 쏟을 테고 실력 없는 자들은 정해진 시간 내에 재료를 제련하기도 힘들어하고 있겠지. 아직은 아무도 나오지 않는게 당연하네.”
최평이 웃으며 입을 열자, 오탁도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누가 가장 높은 성적을 받을 것 같나?”
“아무래도 유슬일 가능성이 가장 높지 않겠나? 천부적 재능에 단왕 고하의 가르침이 더해졌으니, 또래 중에는 당할자가 많지 않을 것 같은데.”
최평은 유슬을 우승자로 점찍어 놓은 듯 했다.
“허허, 공주님일 가능성도 있지 않겠나. 황실의 전폭적 지원이 있으니 그녀가 복병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오탁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공주님도 실력이 뛰어나지. 그래도 내 경험상 유슬이 이번 시험에 더 유리해. 똑같은 재료를 이용해서 오직 실력으로만 겨룬다면 말일세. 유슬이 가진 능력이 공주님보다 더 뛰어날 테니까. 혹시 자네가 데려온 아이에게 아직까지 희망을 품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하.”
최평의 질문에 오탁은 멋쩍게 웃음지을 뿐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
모래시계가 1/4 정도 남았을 즈음, 검은 천막 하나가 홱 열리며 뽀얀 얼굴의 미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유술은 방 중앙까지 걸어온 뒤 단상 위에 있는 심사위원들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천막이 걷혔다.
“유슬 오라버니, 이렇게나 빨리 완성하실줄 몰랐네요.”
“하하, 공주님도 만만치 않으신데요?”
“흠. 저보다 일찍 나오시긴 했지만 약재의 순도를 따지자면 제가 더 높을 수도 있어요.”
공주는 유슬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는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유슬은 언제나처럼 신사적인 미소를 지을 뿐 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검은 천막들이 줄줄이 걷히며 사람들이 하나 둘씩 쏟아져 나오며 중앙을 향해 모여들었다.
먼저 천막을 열고 나온 13명의 사람들은 모두 가슴에 3레벨 연금술사 휘장을 달고 있었으니, 확실히 2레벨 연금술사들과는 격차가 있었다.
13명의 사람들이 함께 10여분을 기다리자. 그제서야 2레벨 연금술사들이 한 명씩 밖으로 나왔고, 2레벨 연금술사들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서 있는 3레벨 연금술사들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준은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었다.
‘이 녀석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아직도 안 됐을 리는 없고 말이야. 정제 속도로만 따지면 유슬이나 공주에 비해 뒤쳐질 친구가 아닌데…’
“아이고…”
최평은 오랜 친구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렇게 현장의 모든 이들이 이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슬 오라버니, 친구분이라고 하셨었나요?”
“하하, 친구라기보다는 그냥 얼굴 몇 번 본 게 다입니다.”
“하긴요. 오라버니의 실력과 수준에 맞지 않는 사람인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제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
“네, 그럼 여러분. 저희 시험은 이제 여기까…지…”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늦었네요.”
최평이 시험 종료를 외치기 직전, 마침내 준의 천막이 열렸다.
그러나…표정만 보아서는 그가 가장 먼저 천막을 연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태연하고 느긋해 보였다.
“휴……”
오탁은 그제서야 고개를 푹 떨구며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