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참가결정
만석과 오탁은 준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다시 대화를 시작햇다.
“저 놈이 10위 안에 들 수 있을지 모르겠군.”
“작년 10위권 참가자들은 전부 3레벨이었네. 녀석은 아직 2레벨이니, 아마 어렵지 않겠나? 다음 대회 때야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다 쳐도, 이번은… 시간적 여유도 없고, 어렵다고 보는 게 맞겠지.”
“그렇긴 하네만…또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20살도 안 된 2레벨 연금술사라니, 이 정도의 천부적 재능이면 왕년의 단왕 고하는 비할 바도 아니지. 어떤 기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아.”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군. 정말 기적이란 게 일어나면 우리 검은바위성 연금술사 지부도 명성을 떨칠 수 있을테고…하하. 내년은 총 본부에 훨씬 많은 자금을 요구할 수 있기를 빌어보세!”
“그리고 희귀한 약재도…하하하! 보물이 굴러 들어왔어 보물이!”
* * *
유씨 가문 총본부의 응접실, 한 사내가 눈 앞에 선 백발 노인을 바라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선생님, 이렇게 다시 뵐 수 있을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사라지신 뒤 온 힘을 다 해 찾았지만 조금의 흔적도 발견하지를 못 했으니…”
“일이 좀 생겨서 몇 년 동안 숨어 살았지. 지금은 괜찮아.”
동해는 자신의 앞에서 연신 들뜬 표정을 짓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천, 못 본 사이에 자네도 투왕이 됐군. 앞으로도 자네가 가문을 맡아서 관리하게. 난 끼어들고 싶지 않으니…그나저나 내가 돌아온 소식이 곧 황실의 늙은 요괴 귀에도 들어가겠지?”
“하하, 선생님께서 돌아오신 것은 실로 우리 유씨 가문 최대의 경사니까요.”
동해가 ‘천’이라고 부르는 사내는 바로 유씨 가문의 대장로 ‘유천’으로, 이미 가한제국의 10대 강자에 이름을 올린 거물이었다.
하지만 그 대단한 ‘유천’이 꼬박 꼬박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아이처럼 눈을 빛내니, 자리에 있는 유씨 가문의 젊은 투사들은 적잖이 당혹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유천이 저렇게까지 존경의 눈빛을 보낼 정도면 대단한 인물임이 분명한데, 대체 상대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동해가 유씨 가문에 발을 들인지도 벌써 몇 십 년이 지났으니, 젊은이들은 그를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유련! 당장 튀어나와!”
그렇게 모두가 눈 앞의 사내가 누구인지를 궁금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유천이 버럭 소리를 질렀고, 유련은 부리나케 달려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께 대든 것만으로도 널 가문에서 내쫓을 이유가 충분하지만 지금까지 우리 가문을 위해 쌓은 공이 있으니 장로 직위를 해임하고 다른 도시의 관리 지점으로 옮겨 3년 동안 총본부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는 정도로 처분을 마치지.”
유천의 살기 등등한 목소리에 장내에는 쥐죽은 듯 고요함이 맴돌았고,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 했다.
유련에 대한 처분이 끝나자, 유천은 돌연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주희. 이번 일은 아주 잘했네. 앞으로 자네에게 우리 유씨 가문 경매장 본부를 맡기지.”
“네! 감사합니다, 대장로님.”
주희는 갑자기 찾아온 뜻 밖에 행운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집에 돌아가서 지내시죠? 방은 매일 청소해두고 있습니다.”
유천은 동해에게 말을 걸 때 마다 눈에 띄게 얼굴이 밝아지고 있었다.
“하하, 당장은 어렵네. 약속한 게 있거든. 어떤 녀석의 호위를 맡아줘야 해서 말이지.”
“호위요?”
유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이미 ‘이준’이라는 아이에 대해 조사를 마쳤지만, 준이 은빛성을 떠난 뒤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 했기 때문에 그는 동해와 준의 관계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하, 얕보면 안 될 친구야. 내 평생 그런 놈은 처음 봤어. 재능도 재능이고, 성깔도 보통이 아니거든. 절대로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아이일세. 아마 그가 등을 돌리면 나라고 해도 유씨 가문을 보호해주지 못 할걸?”
동해의 한마디에 유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동해는 그 괴팍한 성정과 믿을 수 없는 실력으로 몇 십 년전 가한제국을 호령했던 강자였고, 그런 그가 누구에 대해 이토록 칭찬을 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하, 선생님이 그 정도로 높게 평가하는 분이라니…꼭 우리 가문에서 한번 모셔보고 싶은 분이군요. 걱정마십시오. 절대로 사이가 틀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그게 서로 좋을게야. 그리고 가능하면 최대한 도움을 주게. 내 장담하지, 얼마를 쏟아부어도 훗날 반드시 그 투자에 대해 감사하게 될 날이 올거야. 그럼 난 먼저 가보지. 내가 어디서 머무는지는 알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게.”
말을 마친 동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사라지자, 유천은 그제서야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딱딱하게 굳어있던 자세를 풀었다.
“모두 잘 들었겠지? 선생님의 말씀대로 이준이라는 분과 최대한 좋은 관계를 만들어 놓거라. 만일 누구라도 이준이라는 분의 원한을 산다면 유련과 같은 처분이 내려질 것 이다.”
유천의 엄명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쓰레기라 불리던 소년이 제국 3대 가문 중 하나인 유씨 문중을 등에 업게 될 줄은 몰랐겠지…나설아, 네가 정말 큰 실수를 했구나……’
유천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이는 유씨 가문들의 투사들을 바라보며 주희는 자기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지었다.
“오늘 해독은 여기까지 하죠. 몇 번만 더 하면 완전 제거할 수 있을 겁니다.”
며칠간의 치료로 나원승의 안색은 이전보다 눈에 띄게 좋아져 있었다.
“젊은이에게 정말로 평생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군. 몸 속에 독성이 많이 빠져나간 게 느껴지네.”
나원승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차분히 숨을 골랐다. 해독을 한 번 할 때마다 같은 계급의 강자와 전투를 치르는 듯한 피로가 몰려왔기 때문이다.
“각자 할 일을 하는 것뿐이죠.”
준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실은 매번 치료 때 마다 체내의 독성이 강해지고 있었으니 대체 어찌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휴, 대체 길인지 흉인지 모르겠다. 선생님께서 계셨다면 내가 괜히 걱정할 필요도 없을 텐데.’
“혹시 약재 같은 게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주십시오. 그런 사소한 일들은 저희 나씨 문중에게 부탁하고 선생님은 가서 편히 쉬시면 됩니다.”
나원철은 아버지의 안색을 살핀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신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그가 보기에도 나원승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었다.
나원철의 말에 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저장반지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 무언가를 끄적인 뒤 그것을 건넸다.
종이를 받아 든 나원철은 약재 이름들을 쭉 읽더니 표정의 변화도 없이 시녀를 불러 종이에 적힌 약재들을 창고에서 꺼내 오라 명했다.
‘하…제법 비싼 것들만 잔뜩 적었는데…나씨 가문이 대단하긴 대단하군.’
준은 나원철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가 그가 정말로 대수롭지 않게 약재들을 내주는 것을 확인하고는 속으로 적잖이 감탄했다.
“하하, 임현 선생님! 잠시 접객실에 앉아서 기다려주십시오! 곧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 드리지요.”
“네.”
준은 끄덕이며 나원철과 나원승을 따라 접객실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 선생님도 이번 연금술사 총회에 참여하십니까? 아주 젊으시니 충분히 나갈 수 있으실 듯 한데…”
“맞습니다.”
“하하, 정말 영웅호걸이 다 모이는군요. 아주 재미있겠어요.”
“그냥 가서 분위기 좀 살피려고 하는 거죠. 남과 다퉈 이길 능력은 없습니다.”
“너무 겸손하군요. 천지의 불꽃을 사용하신다면 아마 회장이 발칵 뒤집힐 겁니다. 천지의 불꽃을 가진 약관의 연금술사라니…저도 견문이 좁지 않다고 자부하는데, 선생님 같은 천재는 처음 만납니다. 아, 대회전까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지 부탁해주십시오. 저희 가문에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내어드리지요.”
‘벌써 밑 작업에 들어가는 건가…역시 이 사내는 보통이 아니야.’
준은 자연스럽게 자신과 친분을 쌓아나가는 나원철의 수완에 조용히 혀를 내둘렀다.
“혹시 나중에 필요하게 되면 두 분께 말씀 드리죠.”
준이 직접적으로 거절하지 않고 애매한 대답을 내놓자, 나원철은 그 말이 완곡한 거절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웃으며 화제를 돌릴 뿐 이었다.
“하하, 정말이지 선생님 같은 제자를 두신 스승님이 누군지 궁금하군요. 가한 제국내에서 이름을 떨친 연금술사는 모두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데, 천지의 불꽃을 가진 약관의 천재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셔서…오랜 시간 은거하고 계십니다. 제가 나오기 전에도 자신과 관련된 정보를 절대 누설하지 말라고 당부하실 정도셨으니까요.”
나원철은 ‘임현’의 대답을 듣자마자 이 젊은 연금술사를 반드시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이런 어린 연금술사가 제 힘으로 천지의 불꽃을 흡수할리는 없으니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상대는 ‘최소한’ 투황급임에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준이 하나마나한 대답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는 사이 시녀가 준이 부탁한 약재를 들고 나타났다.
시녀가 내민 쟁반 위에는 완벽한 약재들이 놓여 있었고, 이를 본 이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나씨 가문에는 약재를 잘 보존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꽤 많은 듯했다.
준은 그대로 약재들을 저장 반지 안에 챙겨 넣은 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하, 원철. 배웅해야지. 뭐하는게냐.”
나원승이 준을 따라 몸을 일으키자, 나원철도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한제국 최고 세력의 두 기둥의 배웅을 받는 20대의 청년이라니…이 기묘한 광경에는 나씨 가문의 모든 시종들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두 사내의 배웅을 받으며 나씨 가문의 대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준의 눈에 갑자기 불길이 일었다.
나설아가 뽀얀 피부를 가진 계집애 같은 사내 하나에게 연신 웃음을 지으며 다정하게 구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질투를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기분이 더러웠다. 사실 나설아가 뭘 해도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는 했지만…이번만큼 정말이지 특별히 더 기분이 더러웠다.
바로 그 때, 나설아와 그 옆에 있던 사내가 ‘임현’과 가문의 두 큰 어르신을 발견하고는 환히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몸을 돌린 사내의 가슴에는 연금술사의 표식이 빛나고 있었다. 그것도 3레벨 연금술사를 상징하는 표식이…
“임현 선생님,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나설아가 인사를 건네자, 준은 대답없이 고개만 까딱할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임현 선생님.”
뒤이어 잘생긴 남자가 준을 향해 밝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준은 평온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며 그의 손을 잡다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사내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자기와 비슷한 또래의 그것이었다.
‘뭐야…내 나이 또래잖아…’
“흠, 유슬, 자네 연금술 연습은 어쩌고 여기 있나?”
바로 그 때, 나원승이 다소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