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우승 혜택
준의 시선을 끈 것은 조그마한 검은 돌 조각이었다. 그는 홀린 듯 검은 돌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보았다.
작은 돌 조각에서는 아무런 광택도 느껴지지 않았고, 표면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갈라진 작은 틈 사이로 모래까지 끼어 있었다.
‘내가 잘못 느낀 건가?’
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사내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것들을 교환하고 싶은데, 어떻게 파나요?”
“네, 선생님. 3레벨 연금비약을 받고 싶습니다.”
완전히 바가지였다. 3레벨 연금비약과 교환하기는커녕 2레벨 연금비약이나 받으면 다행인 물건이었다. 하지만 준은 뭔가에 홀린 듯 약병을 꺼내들었다.
“3레벨 연금비약인 기력의 조각입니다. 빠른 속도로 염력을 회복할 수 있죠. 그래도 비교적 구하기 쉬운 소모성 단약이니 3알을 드리겠습니다.”
허둥지둥 병을 받아 든 남자는 기쁨에 찬 얼굴을 감추지 못 한 채 돌아서는 이준의 등에 대고 허리를 굽혀 몇 번이나 감사인사를 했다.
……
준은 거래를 마치자마자 동쪽 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만지작 거려봐도 그 검은 돌조각에서 특별한 것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준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시녀 하나를 붙잡고는 검은 바위성의 연금술사 지부장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시녀는 공손한 태도로 서쪽 구역으로 간다고 되면 말했고, 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한 뒤 서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준이 서쪽 구역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호위병 하나가 그를 막아섰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이곳은 3레벨 이상의 연금술사님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네, 그럼 죄송하지만 검은 바위성의 오탁님이나 만석님에게 이준이라는 사람이 왔다고 좀 전해주시겠습니까?”
호위병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몸을 돌려 오탁을 찾으러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았지만, 오탁이나 만석의 손님이라면 절대 하대할 수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급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오탁이 환히 웃으며 달려 나왔다. 그러나 그는 문 앞에 서있는 사내를 보자마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스러운 눈으로 준을 바라봤다.
“오탁 부회장님!”
“너…누구?”
“하하, 준이 맞습니다. 여기는 보는 눈이 많으니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괜찮으십니까?”
오탁은 영혼 탐지 능력을 통해 준의 몸에 흐르는 염력을 확인한 뒤에도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준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흠…그럼 따라 들어오거라.”
준을 끌고 위층으로 올라가던 오탁은 고개를 돌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질문을 쏟아냈다.
“어떻게 된 것이냐? 왜 얼굴이 바뀐게냐? 저주라도 걸린 것이야? 어서 말해보거라. 그래도 이 오탁, 가한제국에서는 나름대로 힘이 있다.”
“하하! 감사해요, 부회장님. 별거 아니에요. 그냥 사람들에게 신분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잠시 변장을 한 것 뿐 입니다.”
검은 바위성 연금술사 공회의 기대주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오탁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것이냐? 그럼 다행이구나. 아니, 그나저나, 1년 사이에 어떻게 6성 무투사가 된게냐? 아니, 이 정도면 7성에 더 가깝겠어!”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됐어요.”
“허허, 역시 참 훌륭한 녀석이야. 입이 떡 벌어지는 천재라니까. 이런 제자를 둔 사람이 누군지 참 부럽구나!”
오탁은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도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눈 앞에 커다란 방 하나가 나타났고, 안에서는 고함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큭큭…만석이 설매를 혼내는 중일게다. 4레벨 조합표와 꽃불을 바꿨다는구나.”
방안으로 들어가자, 만석이 침을 튀겨가며 노발대발하고 있었고, 그 앞에는 불씨를 꼭 감싸 안은 설매의 모습이 보였다.
한편, 탁자 한쪽에서는 빨간 옷을 입은 여자 하나가 설매를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오탁과 함께 들어온 사내를 보자마자 몸을 일으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이 직접 맞이하러 간 사람이에요? 엄청 기 살겠다~”
그녀의 목소리에 욕이 한창이던 만석은 잠시 말을 멈추고 헛기침을 하더니 오탁의 옆에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오탁, 이 분은 누구신가?”
바로 그 때, 준이 가면을 벗어던지고 맨 얼굴을 드러냈고, 그 순간 만석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만석 회장님…어째 전보다 더 건강해지신 것 같군요. 반갑습니다.”
“하하! 이준? 나는 네가 오지 않을 줄 알았다!”
“하하, 회장님,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저 불꽃은 천지의 불꽃은 아니어도 나름대로 귀하고, 제 불꽃보다 훨씬 온순하니 연금비약을 제조하는데는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4레벨 처방전이 귀하다고는 해도 회장님에게는 더 이상 쓸모가 없을텐데, 시간만 있다면 얼마든지 새로 쓰실 수 있잖아요.”
뜻 밖에도 준이 설매의 편을 들자, 만석은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그래, 이제 그만하마.”
드디어 선생님의 잔소리가 멈추자 설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준을 향해 싱긋 웃음을 지었다.
한편 이 광경을 바라보던 세연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하, 준아, 그보다, 설마 이번에 연금술사 총회에 참석하려고 이쪽으로 온 게냐?”
“총회에 참여하면 좋은 점이 있나요? 저는 명성 같은건 크게 관심이 없어서…그런 것 말구요.”
“응?”
오탁과 만석은 준의 당돌한 한마디에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하하, 호탕해서 좋다만, 만일 연금술사 총회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이면 많은 세력에서 널 원하게 될게다. 그렇게 되면 명성과 지위는 물론이고, 연금술사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후원도 잔뜩 받을 수 있지.”
“단왕고하가 어떻게 일어서게 된 건지 생각해보렴.”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준은 관심이 없다는 듯 기지개를 켤 뿐이었다.
“음…그런 것 말구요. 명성이니 지위니 후원이니 말고, 당장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없나요?”
“흠…”
너무나 솔직담백한 준의 태도에 오히려 오탁과 만석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장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니…참으로 대담한 발언이었다.
“규정에 따르면 연금술사 총회가 열릴 때마다 대회에서 우승한 사람은 연금술사 총회의 명예 장로가 될 수 있고, 원로와 동등한 권리를 얻게 되지. 그렇게 된다면 가한제국 연금술사 협회의 어느 지부를 가든 네 권력 만큼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창고에 있는 희귀한 약재들도 우선적으로 차지할 수 있게 된단다. 그리고 현재 가한제국에서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15명 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 장로가 될 수만 있다면 황실이나 운남종을 비롯해 거의 모든 세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된다고 봐야지.”
오탁의 설명에 드디어 준이 관심이 생겼다는 듯 눈을 반짝이자, 오탁은 미끼를 문 물고기를 바라보는 낚시꾼의 심경으로 다시 낚시 바늘 하나를 던졌다.
“게다가 이번 대회의 우승자에게는 6레벨 연금비약의 조합표가 상품으로 주어진다고 하더군.”
“6레벨 연금비약 처방전이요? 무슨 처방전이죠? 어떤 효능이 있는데요?”
“영혼의 결정이라고…영혼과 육체가 융합될 수 있게 도와주는 연금비약이야. 효능이 조금 특이하긴 하지만 ‘영혼체’에게 있어서는 또 그만한 게 없지. 영혼 에너지를 빠르게 회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영혼에 입었던 상처까지 말끔히 회복할 수 있단다.”
“영혼체요? 그러니까 영혼 에너지를 회복할 수 있다는 거죠?”
바로 그 때…그의 머릿속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꼭 저 물건을 손에 넣어! 그럼 내가 널 죽이지 않으마!”
‘메두사…?’
‘저 처방전이 필요하다는 거야?’
하지만 메두사는 그 말만을 남기고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만일 메두사가 부활한다면 그녀의 힘은 분명 투종급으로 뛰어올라 있을 것 이니 그녀가 약속을 지켜 자신을 살려준다 해도,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재앙을 세상에 풀어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요청을 거절하자니…그야말로 후환이 두려웠다.
준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아요. 저도 참가 할게요.”
어쨌거나 처방전을 손에 넣게 된다 해도 중요한 건 연금비약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는 이준의 힘이 꼭 필요했다. 따라서 메두사여왕과 협상을 하게 돼도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다. 어쩌면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을 내걸 수도 있었다. 보다 솔직하게는…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투종의 심기를 건드려 그녀와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다.
이준의 대답을 듣자 오탁과 만석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준은 검은 바위성 지부 출신이니, 그가 우승을 해준다면 검은 바위성 연금술사들의 지위도 껑충 뛰어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응?
그러나 신이 난 두 사람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고 싶기라도 한 듯, 준은 또 다시 당혹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사정이 좀 있어서 제가 대회에 참가할 때 아까 보셨던 그 모습으로 다시 변장해야 하거든요. 그러니 참가할 때 이름을 이준에서 임현으로 바꿔 주셨으면 해요.”
“참가하면 하는 거지 웬 가명?”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연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지만, 준은 그저 씨익 웃으며 말없이 두 사람의 대답을 기다릴 뿐 이었다.
“그래, 이름을 바꾸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 마음대로 하거라.”
“보아하니 성가신 일을 벌인 모양이구나? 우리가 필요한 일이면 언제든 말하거라. 최대한 돕겠다.”
만석과 오탁 두 명의 연금술사에게 원하던 대답을 이끌어낸 준은 씨익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하하, 그럼 참가하겠습니다. 그보다, 두 분이서 절 너무 높게 평가하시는군요. 고하도 4레벨 연금술사일 때 총회에 참석해서 우승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는 아직 2레벨 밖에 되지 않는걸요.”
“고하가 연금술사 총회에 참가했을 때는 이미 30살 이었다. 그런데 너는 아직 어리니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니, 게다가 이번에 네가 곧장 1등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아.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니까 말이다. 하지만 10위 안에만 들어도 대단하지. 네 나이로 보아, 10위권 안에 들어도 단왕 고하보다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 틀림없다.”
“대회 참가엔 나이 제한은 없나요?”
“물론 있지. 30세 이하의 연금술사만 참가 가능하단다. 고하는 딱 30살 이었으니 엄청 운이 좋았던게지. 물론 재능도 뛰어났고…한 손으로 불을 다루는 기술로 관중석 전체가 들썩였으니까. 확실히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었지.”
“총회는 언제 시작하나요?”
“3일 후란다.”
“그럼 3일 뒤에 이곳으로 찾아 올게요. 참가신청에 관련된 일들은 두 분께 맡기겠습니다.”
“그래. 그동안 계속 여기에 머물 생각이니 무슨 일이 있다면 잊지 말고 찾아오고!”
그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대화가 끝났고, 용건이 끝나자마자 준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밖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