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만이살길-137화 (137/818)

제137화. 해독

“으음…아직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준이 몸을 일으키자, 다른 연금술사들의 입가에 묘한 비웃음이 서렸다.

나원철과 나설아는 준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듯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아, 미안하네! 설마 아직 들어가지 않은 자가 있을 줄은 몰랐네…”

‘하…2레벨 연금술사라고 무시했던 거겠지. 잊기는.’

준은 속으로 두 부녀를 비웃으면서도 겉으로는 온화한 표정을 유지했다.

“큰 어르신이 이렇게 되셨으니 정신이 없을 법도 하지요. 그나저나 시간이 없으니 바로 어르신의 용태를 살펴보아도 될까요?”

2레벨 연금술사의 당당한 태도에 이미 실패하고 나온 3레벨 이상의 연금술사들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일단 나원철이 그를 연금술사로 대우해주고 있는 이상, 그들이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런 연금술사들의 태도보다 더욱 기분이 나쁜 것은 바로 나설아의 눈빛이었다.

나원철이야 주희의 추천장까지 받고 온 자신에게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고 있었지만, 나설아는 대놓고 준을 무시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언제봐도 짜증나는 계집이네…’

준은 조용히 한숨을 내쉰 뒤 보란 듯이 손바닥 위에 새파란 불꽃을 피워냈다.

푸른 불꽃의 등장과 함께 주위의 기온이 상승하며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상상조차 하지 못 한 광경에 나씨 부녀와 연금술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뭔지는 아시죠?”

“이… 이건…”

“그럼 이제 들어가봐도 되겠습니까?”

가시돋친 소년의 한마디에 주위의 연금술사들은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못 했다. 단왕 고하조차 가지지 못한 천지의 불꽃이라니…아무리 생각해도 2레벨 연금술사가 가지고 있을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레벨 연금술사가 이런 물건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배후에 운남종 보다도 더 대단한 세력이 있거나, 고하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뛰어난 스승이 있다는 의미였다.

“제가 나씨 가문 전체를 대표해 사과 드립니다. 안쪽으로 드시죠!”

대지의 불꽃을 보자마자 나설아는 즉시 태도를 바꿔 고개를 숙였고, 준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방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방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공간안에 은은하게 불이 하나 켜져있고, 중앙에 놓인 큰 침대에 노인 하나가 누워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노인의 안색은 회색을 넘어 검정색에 가까웠고, 조용히 자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죽음의 기운이 가득했다.

“심각하군…”

“네…각인 독이라는 게 투황 강자라고 할지라도 억누르기가 힘드니, 어르신께서 버티시다가도 이젠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지요…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방법은 없고 단왕 고하가 말했던 대로 이화를 체내에 주입해 독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과연 고하님이십니다. 정확히 보셨어요.”

자신에게 말 한번 걸지 않고 무시하다가 천지의 불꽃을 보는 순간 태도가 바뀐 나설아를 보자, 준은 또 다시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약로의 부활이 걸린 문제이니만큼, 성질대로 할 수는 없는 일 이었다.

게다가 제국 최고 가문의 가장 큰 어른을 만지는 일이니만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임무였고, 약로가 없는 이상 자칫하면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일 이었으니, 준은 일단 보험을 들어두기로 했다.

“다만…천지의 불꽃을 사용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한 치라도 계산이 잘못되면 큰 어르신을 재로 만들어버리고 말테니…조금 겁이 나는군요.”

준의 말에 나설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왜 고하가 아니라 이런 애송이에게 천지의 불꽃이 있단 말인가. 고하였다면, 그런 실수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 이다.

하지만…방법이 없었다. 그 때, 나원철이 먼저 결심을 굳혔다.

“어차피 이대로 두면 아버지는 얼마 못가 돌아가실 겁니다. 그럴바에는 시도라도 해보는게 낫겠지요. 실패하더라도 선생님을 탓하거나 보복하는 일은 없도록 약속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성공 하신다면, 저희 가문에서 해드릴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나원철의 확답을 이끌어 낸 준은 그제서야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나원승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알겠습니다. 그럼 어르신의 말을 믿고 시작해보겠습니다.”

……

잠시 후, 준이 왼손으로 나원승의 어깨를 잡자 그의 몸을 덮고 있던 옷이 순식간에 가루로 변하며 피골이 상접한 그의 몸이 드러났다.

“시작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지만…혹시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준의 말에 두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고, 그 순간 푸른 화염이 부드럽게 일렁이며 나원승의 몸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준은 온 정신을 집중해 대지의 불꽃을 조종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불꽃은 서서히 나원승의 혈관을 타고 들어가 각인 독이 새겨진 뼈까지 도달했다.

‘아무래도 한 번에 제거하는 건 어렵겠어. 천천히 제거하자.’

푸른 화염이 뿜어내는 맑고 순수한 열기가 뼈에 닿는 순간, 나원승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이윽고 불꽃의 온도가 어느 정도 수준에 다다르자, 준은 그대로 나원승의 뼈에 새겨진 독을 태우기 시작했다.

“아악…!”

“어르신…지금 독을 제거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르신이 이 고통을 참을 수 있다면 독을 제거할 수 있지만 참을 수 없다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

“자네가 날 살리는 겐가?”

나원승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어깨는 붙잡고 있는 청년의 얼굴을 바라봤다.

“노력은 하겠지만 장담은 못 합니다.”

“하하, 어차피 죽은 목숨. 마음 놓고 해보게! 죽게 된다 해도 네 탓을 할 자는 없을 테니.”

“할아버지,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이 기지배야, 다 너 때문이다! 삼 년 전에 네가 멋대로 이씨 가문에 가서 파혼을 하는 바람에 홧병이 나 독이 이렇게 퍼진 게야!”

“조용히 해주세요. 이러다 정말 타죽으실 수도 있습니다.”

나설아와 나원승이 말싸움을 시작하자, 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둘을 말렸다.

준의 한마디에 나원승의 목숨이 걸린 상황이니, 세 사람 중 누구도 감히 그의 말에 반항할 수 없었다.

……

한참 뒤…나원승의 목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하자 나씨 가문의 두 부녀는 초조한 표정으로 준과 노인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이와 반대로 준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불꽃을 조종하고 있었다.

준의 푸른 불꽃이 뼈에 닿을 때 마다 나원승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몸부림을 쳤고, 그 때 마다 새까맣게 물든 뼈는 검은 색 연기를 뱉어내며 본래의 색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으으…젊은이…다, 돼…됐는가?”

“도저히 참기 힘들다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한 번에 모든 독을 다 제거하기도 힘들 것 같고, 천천히 해독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모두 제거할 수는 있는 겐가?”

“지금 진행 속도로 봐서는 문제 없을 것 같군요.”

“크큭…이렇게 어린 친구가 이 정도 능력을 갖고 있을 줄이야! 그럼…좀 부탁…하겠네…”

나원승은 나씨 가문의 큰 어른답게 고통으로 몸을 덜덜 떨지언정 결코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그가 비명을 지른 것은 처음 불꽃이 뼈에 닿았을 때 한 번 뿐 이었다.

준은 속으로 나원승의 강인함에 감탄하며 천천히 대지의 불꽃을 거두어 들였다.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나?”

뒤쪽에서 보고 있던 나원철은 이준이 해독을 멈추는 듯 하자 조심스레 다가가 상황을 물었다.

“오늘 치료는 여기까지 하죠. 지금 진행 상태로 봐서는 일주일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정말 고맙네. 아버지를 치료해주기만 한다면 절대 섭섭하지 않게 대우하겠다고 약속하지.”

비록 가주는 자신이었지만, 가문의 최강자이자 가장 큰 기둥은 아직 나원승 이었다. 게다가 피를 나눈 친부가 아니던가. 아무리 나씨 가문의 가주인 나원철이라 해도 나원승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새가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나원철은 혹시라도 준이 치료를 그만둘까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 몇 번이나 준에게 막대한 보상을 약속했다.

“그럼 오늘은 여기에서 인사드리죠.”

“젊은이, 돌아가기도 번거로우니 우리 나씨 가문에서 지내는 건 어떠한가?”

나원승은 자신의 독이 줄어든 것을 체감하자마자 준이 혹시라도 그냥 사라질까봐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 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까지만해도 죽음을 각오했지만, 일단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자 제 아무리 투왕급 강자라도 초연해지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괜찮습니다. 일이 있어서요. 내일 뵙지요.”

하지만 준은 나원승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설아야, 어서 가서 모셔다 드려!”

상대방의 단호한 태도에 당황한 나원철은 즉시 설아를 불러 준을 배웅하도록 시켰다. 물론 오만하고 냉정한 젊은이의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

준은 무표정하게 앞만 보며 걸음을 옮겼고, 나설아는 강아지마냥 그 뒤를 졸래 졸래 따라갔다.

사내가 자신의 미모와 나씨 가문이라는 거대한 배경에도 털끝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 것이 그녀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확실히 눈 앞의 사내는 그럴만한 실력이 있어 보였다.

“그…저기요…”

준은 나씨 가문에 와서 자신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나설아는 눈 앞의 사내를 어떻게 불러야할지 몰라 어색하게 ‘저기요’ 하고 부를 수 밖에 없었다.

“임현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아…네, 임현 선생님…그…천지의 불꽃을 몸 안에 넣으려면 엄청난 불꽃 조절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잘은 모르겠지만…3레벨 약사들보다 훨씬 뛰어나신 것 같은데…”

“그럴지도.”

나설아가 아무리 애를 써도 사내는 여전히 나설아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필요 최소한의 답변을 할 뿐 이었다.

“왜 3레벨 연금술사 시험에 응시하지 않으세요?”

“자기 실력을 가슴팍에 달고 다니는 멍청한 짓은 하고 싶지가 않아서요. 그쪽도 휘장이 없기는 마찬가지인데요. 왜 그런걸 묻죠?”

사내가 처음으로 한 마디 이상 말을 하자, 나설아의 표정이 조금 밝아지기 시작했다.

“아! 스승님께서 등급에 따른 휘장 같은 건 그저 허상이라고 하셨어요. 게다가 제 실력은 저 스스로도 정확히 어떤 등급이라고 얘기할 수가 없으니까요. 워낙 차이가 커서요.”

“차이가 크다는 건 무슨 뜻이죠?”

“음…죄송해요, 운남종 기밀이라서…”

기묘한 대답에 호기심을 느낀 준은 조심스럽게 영혼 탐지 능력을 발휘해 그녀의 실력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약로가 말했던 대로 기이한 기운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어 도통 실력을 알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의 실력을 파악하는 것을 포기하려 할 무렵…준은 나설아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끼고는 식은 땀이 흘렀다.

“왜 그렇게 쳐다보시죠?”

“제 힘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네요. 연금술사는 아니지만 저도 영혼 탐지 능력이 뛰어난 편이거든요. 스승님 말로는 웬만한 연금술사보다 낫다고 하더군요.”

“하하, 나씨 가문의 아가씨가 운남종 차기 종주가 될 사람이라는 소문이 자자해서 한번 알아보려고 했는데, 실력도 못 알아보고 무안만 당하는군요. 과연 운남종 차기 종주는 아무나 되는게 아니다 싶습니다.”

상대가 자신을 추켜세우자, 나설아는 금세 의심을 거두고 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런가요?”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 새 나씨 가문의 대문이 나타났고, 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즉시 나설아를 돌아봤다.

“아, 도착했군요. 이제 돌아가시지요.“

“음…네, 그럼 조심히 가세요. 할아버지 일은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이미 약속하셨지만…보상은 절대 섭섭지 않게 해드릴테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나설아가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려 사라지자, 준은 식은 땀을 닦아내며 나지막하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흥…가증스러운 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