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적진
“자, 어때? 효과가 나름 괜찮지?”
주희가 거울을 내밀며 자신의 얼굴을 확인시켜주자, 준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 앞에 있는 거울 속에서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강자들 사이에선 상대방의 기운으로 사람을 알 수 있다는데, 너는 나씨 가문이랑 왕래가 많이 없었으니까. 나설아도 3년이나 지났으니 네 기운을 알아보지는 못 하겠지. 그 사이에 많은게 변했으니까.”
“후…알았어요. 저도 그 약초가 꼭 필요하니까 한번 해볼게요. 그런데…아까 말했다시피 이 일은 까딱하면 ‘해독’이 아니라 ‘화장’이 될 수도 있어요.”
준은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 하는 말 이었지만, 주희는 이미 그런 말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신이 나서 종이와 붓을 들고 오고 있었다.
“내가 추천서를 써 줄게. 이 추천서를 가지고 나씨 집에 들어가면 검문도 심하지 않을거야. 꼭 좀 부탁할게. 이 누나 좀 살려주라. 내가 유씨 경매장 본부로 온 후로 처음 써보는 추천장이야. 내 추천을 받은 사람이 나원승 어르신을 잿더미로 만들면 나도 끝장이야. 이건 투자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부탁을 하는 너에게 내가 갖출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이기도 해. 네가 어르신을 태워죽이면 나도 무사하지는 못할테니까.”
추천장을 건네는 주희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 준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알았어요. 저도 그 물건이 꼭 필요하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말아요.”
“그래. 고마워. 제발 무사히 돌아와줘.”
준은 마지막까지 당부의 말을 하는 주희를 두고 즉시 몸을 일으켰고, 동해 역시 피식 웃으며 나란히 몸을 일으켰다.
“아, 아가씨, 아마 곧 유천이 날 찾느라 난리를 피울거야. 그럼 내가 직접 찾아갈테니까 헛지랄 말고 얌전히 기다리라고 좀 전해주게.”
“어…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대 유씨 가문의 대장로를 함부로 부르는 동해의 태도에 주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동해의 그 말을 끝으로 준과 동해는 나란히 경매장 밖으로 모습을 감췄다.
* * *
한편 가한제국과 인근에 있는 두 제국의 경계에 위치한 가람아카데미에서는 곧 관으로 들어갈 것만 같은 노인 하나가 입학식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자네들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에 온 이상 너희들은 모두 가람아카데미의 학생에 불과하다. 그러니 밖에서 무엇을 했든, 이곳에서는 실력만큼만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알아두도록.”
……
오래된 아카데미 근처 구석 진 곳에 위치한 산의 정상에서는 푸른색의 치마를 입은 소녀 하나가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쐬며 동쪽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나와……”
잠시 후, 소녀의 입이 열리자, 초록색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등 뒤에 있던 큰 나무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림자는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올렸다.
“아가씨. 이준 도련님이 가한제국에 도착했습니다.”
‘이준’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소녀의 미소에는 온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내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소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즉시 최근 이준에게 벌어진 일들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준의 소식을 듣는 은의 얼굴은 수시로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동해라는 자와 함께 다니고 있습니다. 동해는 과거 가한제국 10대 강자 중 하나로, 얼음왕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며, 얼음 속성 염력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가한 제국내의 그 누구도 이 자를 따라올 수 없다고 합니다. 몇 십 년 전에 타르 사막에서 메두사 여왕에 의해 염력을 봉인 당한 이후 종적을 감췄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보아, 도련님께서 그 봉인을 풀어준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확실하지 않다고?”
이은은 사내의 보고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눈썹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아가씨…아가씨도 이미 아시겠지만 도련님 몸 안에 신비로운 강자의 영혼이 있지만, 그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는 저희에 대해 이미 눈치를 채고 있는 듯 합니다. 영사님이 이준 도련님을 따라다니다가 몰래 도련님을 보호하는 와중에 신비로운 그 강자에 의해 발각이 됐다고 하니, 실력은 저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보입니다.”
“뭐? 영사님이?”
영사가 발각됐다는 말에 은의 눈동자가 또 다시 휘둥그레졌다.
“네, 하지만 그 강자가 도련님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는 않은 듯 합니다. 그러니 도련님께서는 아직 영사님의 존재를 모르십니다.”
준이 자신이 보호받고 있는 것을 모른다는 말에 이은의 얼굴에는 안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그럼 됐어. 절대 오라버니가 알아서는 안돼.”
“네.”
사내는 얼음처럼 싸늘한 얼굴과 소녀처럼 순수한 표정을 오가는 이은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이준이라는 사내의 이름만 나오면 이 소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있었다.
“음…그리고 은지라는 여자, 진율희지?”
“큼…”
생각치 못했던 물음에 사내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네, 운남종의 종주 율희가 맞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아마 도련님께…”
“오라버니는 아직도 이런 일에 서툰 것 같네…나중에 내가 운남종에 가면 이 복잡한 관계를 어떻게 정리할지도 생각해 봐야겠는걸?”
또 다시 싸늘하게 굳어버린 소녀의 표정을 보며 사내는 온 몸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됐어. 일단 그 문제는 나중에 내가 직접 처리하면 될테니까…그보다 영사님께 오라버니를 잘 지켜달라고 전해줘. 마씨 가문의 대장로를 살해했으니 불편한 일이 많겠지. 그리고…그 얼음왕인지 뭔지 하는 위인도 잘 살펴달라고 전해줘.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니 특별히 신경을 좀 써달라고.”
“네.”
“아, 그리고, 네 말대로라면 오라버니 옆에 있는 그 칠색 이무기가 메두사여왕이라는거지?”
“네. 그러나 현재 메두사 여왕은 칠색 이무기의 영혼에 의해 억눌려 있는 상태로, 부활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메두사여왕이 각성하게 되면 최소 투종 레벨로 승급할 테니 그 때 도련님을 살해하려고 한다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메두사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 이은은 걱정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대체 오라버니는 그런 위험한 걸 왜…일단 메두사의 영혼이 나오는데는 시간이 좀 걸릴테니까 그 일은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할게.”
“네.”
“알았어, 일단 이 곳을 떠나. 여기서 너무 오래 머물다가 들키면 성질머리 더러운 원장이 난리가 날테니까.”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즉시 녹색 옷을 입은 사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하, 그 분과 정면 승부를 펼친다면 영사님 조차도 힘드실 것 같습니다만…저는 은신에 능하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자취를 감췄고, 소녀는 또 다시 무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얼굴을 붉혔다.
* * *
준은 나씨 가문으로 들어가는 길목 앞에서 동해와 갈라진 뒤 홀로 걸음을 옮겼다.
나씨 가문 본가의 입구로 걸어가자 수 많은 연금술사들이 자신의 지위를 자랑하듯 연금술사의 휘장을 반짝이며 줄을 서 있었고, 그곳을 지나가는 행인들은 모두 존경과 부러움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연금술사가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준이 관찰한 결과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3레벨 이상의 연금술사로, 2레벨이나 1레벨은 모두 입장을 거절당하고 있었다.
‘역시…나씨 가문 정도 되면 연금술사도 길가에 널린 돌멩이 취급을 받는구나.’
준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자 관리자 노인 하나가 황급히 맞이하러 나왔다가 2등급 연금술사 표식을 보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저는 나씨 가문의 관리자입니다. 나원승 어르신을 치료하기 위해 오신 것이 맞는지요?”
소년이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현재 가문에서 3레벨 혹은 그 이상의 연금술사만 모셔오라고 하셔서…”
“레벨로 모든 걸 설명할 순 없죠.”
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저장반지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노인에게 내밀었다.
“괜히 당신 때문에 큰 어르신이 해독할 기회를 날려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레벨은 레벨일 뿐이죠. 그렇게 따지자면 단왕 고하가 어르신의 해독을 실패한 순간 가한제국 내의 연금술사 중 누가 여기 들어올 자격이 있겠어요?”
노인은 너무나도 당당한 소년의 말에 조금 당황한 듯 망설이며 추천서를 읽어 내려가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정말 저희 어르신을 치료할 수 있는 분이셨으면 좋겠습니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시녀 한 명이 후다닥 뛰어 나와 친절하게 이준에게 몇 마디를 건넨 뒤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시녀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니 생전 처음 보는 수준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가득했고, 경비 역시 다른 곳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건물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준을 바라봤다.
준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무시한 채 주변을 살피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나설아와 준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중년의 사내 하나가 다가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나씨 가문의 나원철이라고 하네.”
“아, 네. 저는 주희씨의 부탁을 받아 온 사람입니다.”
주희가 추천했다는 말에 나원철의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지자, 준은 다시 한번 그녀의 유능함에 감탄했다.
‘언제 또 자기 가문도 아닌 나원철에게까지 호감을 산거야…하여간 대단한 누님이라니까…’
나원철과 인사를 나누던 준은 나설아가 자신을 너무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눈치채고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변장이 발각 된 건가? 그럴 리가.’
그 사이 나원철은 자리에 모인 연금술사들을 향해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아마 여기 계신 모든 분께서 우리 나씨 가문이 맞닥뜨린 어려움에 대해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오랜 세월 몸에 각인 독을 지니고 계셨는데, 얼마 전 독성이 폭발해 아버지의 힘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단왕 고하께서 방문해 주셨지만 여전히 속수무책이었고, 천지의 불꽃이 필요하다는 것밖에 알아내지 못 했지요. 하지만 천지의 불꽃은 워낙 귀한 것이라…일단 여러분들 같이 실력 좋은 연금술사들을 한 자리에 모았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많이 도와주시고 여러 시도를 해보시며 다른 방법이 있는지 찾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만약 여러분들께서 어르신을 잘 치료해주실 수 있다면 보상만큼은 절대 섭섭치 않게 하겠습니다.”
나원철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자리에 있던 십 여명의 연금술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그 중 가장 나이가 많아보이는 연금술사 하나가 나원승이 있는 곳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러나…10분도 되지 않아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밖으로 나와 자리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죄송합니다…각인 독이 너무 완고하게 새겨져 있어 열 가지가 넘는 해독 단약을 만들어왔는데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노인의 말에 나원철은 실망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후로 나머지 연금술사들이 하나 하나 자리에서 일어나 나원승이 자리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지만, 하나 같이 10분도 되지 않아 어두운 표정으로 밖으로 걸어 나올 뿐 이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어쩌면 어르신의 천수가 다한 것일지도 모르지요…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여기까지 방문해 친히 애써 주신 노고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나름의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나원철은 과연 대가문의 현 가주답게 배포가 컸다. 준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대가문의 가주는 다르긴 다르군…해독은 못 하더라도 실력 있는 연금술사들과는 연을 만들어두는 게 좋으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챙길 건 다 챙기는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