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정령의 꽃
“당신은 누구지?”
유련은 너무나도 당당한 상대의 태도에 잠시 마음속이 뜨끔했다. 확실하게 믿는 구석이 있지 않고서야 유씨 가문의 경매장에서 장로인 자신에게 이토록 당돌하게 행동할 리가 없었다.
‘이런…설마 투황인가?’
동해는 싸늘한 눈빛으로 유련을 훑어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씨 가문…아랫것들 관리가 개판이군.”
노인의 한마디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목석처럼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다음 순간, 유련은 동해의 손에 들린 찻잔이 얼어있는 것을 보고 사색이 되고 말았다.
“당신…”
“당신?”
동해는 유련이 자신을 ‘당신’이라고 부르자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10분 안에 그 약재를 내 앞에 가져다 놓아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오늘 유씨 가문에서 장로 하나가 사라질거다.”
동해는 말을 꺼냄과 동시에 자신의 염력으로 유련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커억!”
투령급 강자인 유련이 동해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염력에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 하고 무력하게 피를 토하며 쓰러지자, 이 광경을 지켜보던 유씨 가문의 호위 무사와 유호는 새파랗게 질려 유련을 향해 달려갔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십분 주지. 나는 한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야.”
동해의 싸늘한 한마디에 유련은 공포로 몸을 떨며 즉시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빠, 빨리, 약재를 가져와!”
“네, 네….!”
투령급 강자인 유련이 저항조차 하지 못 하는 것을 눈 앞에서 목격한 손자 역시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가 명을 내리자마자 즉시 수하들을 이끌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한편, 이 광경을 바라보던 주희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동해를 바라봤다.
‘뭐…뭐야…투왕급 이상인줄은 알았지만…투황이었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투황을 데리고 다니는거야…’
주희가 긴장한 표정으로 동해가 건넨 금빛 카드를 만지작거리자, 준이 피식웃으면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괜히 돈 돌려주거나 하지 마. 선배님은 다시 받으실 분도 아니지만…”
“이거이거…우리 동생이 저 아가씨를 어지간히도 챙기는군. 아까 복도에서도 평소대로라면 주먹부터 나갔어야 하는 것 아닌가? 둘이 대체 무슨 사이야?”
동해의 짖궂은 농담에 주희는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고, 준은 그 광경이 못내 재밌는지 피식 웃음을 짓다가 다시 주희를 바라봤다.
“아, 누나, 혹시 경매장에 영혼 에너지를 회복할만한 물건도 있나요?”
“영혼 에너지…? 정말이지 구하기 어려운 것들만 골라 찾는구나? 기다려봐 한번 찾아볼게.”
주희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책장에서 책을 몇 권 꺼내더니 무언가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주희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미안…영혼 에너지를 회복하는 물건은 역시 없는 것 같네. 창고 물품을 전부 확인해봤는데, 없는 것 같아.”
준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약속한 10분이 거의 다 됐을 무렵…유호가 나타났고, 동해는 즉시 그의 손에서 물건을 낚아챈 뒤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보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동생, 확인 좀 해주게.”
동해의 한마디에 준은 즉시 일어나서 약재가 담긴 상자를 유심히 살폈다.
“흠…보관도 잘됐고, 수령도 괜찮아요.”
“좋아, 그럼 물건도 받았겠다, 이제 그만 가볼까?”
얼음왕은 흡족한 표정으로 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뒤 유련을 흘깃 쳐다보고는 다시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유천한테 가서 전해. 임시 감찰관에서 ‘임시’자는 빼도 좋을 것 같다고. 그리고 너, 내가 누군지 눈치 챈 것 같은데, 그럼 오늘 목숨 건진게 얼마나 운이 좋은 건지는 알고 있겠지?
잠시 후…용건을 마친 준이 주희와 작별인사를 하려던 찰나, 시녀 한 명이 빠르게 달려와 주희를 불렀다.
“주희 아가씨! 설아 아가씨께서 보자고 하십니다.”
“나설아?”
주희는 잠시 난처한 표정으로 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준과 나설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녀까지 두 사람의 악연에 대해 알 리는 없었으니, 그녀는 눈치 없게도 환한 미소를 지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준은 쓴 웃음을 삼키며 주희를 향해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가봐요 누나, 일인데요 뭐. 신경쓰지 마세요.”
주희가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방 밖으로 나가자, 동해가 뭔가 눈치챈 듯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준을 바라봤다.
“동생, 나설아랑 면식이 좀 있나보군?”
“네…”
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동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번에 운남종에 가는 것도 그녀와 관련이 있는 건가?”
그러나 준은 동해의 대답이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동해는 준의 반응에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뭐…자세한 내막까지 궁금해 할 이유는 없어. 그냥 호기심이 동해서 물어본거야. 그보다 영혼 에너지를 회복하는 약은 왜?”
“으음…예린이를 찾았을 때 그거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준은 태연한 표정으로 준비된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아…그렇지. 그런 짓을 하고도 후유증이 없으면 이상한거지.”
준을 바라보는 동해의 눈빛에는 티끌만큼도 의심스러운 기색이 엿보이지 않았다.
“심한가?”
“아니요. 심한건 아닌데…일단 영혼 에너지는 회복되는데 시간이 좀 걸리니까요. 평소라면 그냥 자연스럽게 회복되기를 기다려도 되긴 하지만…그래서야 선배님하고 약속을 지키는데 지장이 생길까 싶어서요.”
“아니 뭐 또 그렇게까지…그런 물건들이 한 두 푼 하는것도 아닐텐데…”
그렇게 예상치 못한 준의 답변에 동해가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적이고 있을 때, 주희가 방안으로 돌아왔다.
준은 애써 억지 웃음을 지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주희를 바라봤다.
“나설아는 갔어요?”
“응. 그나저나…영혼 에너지 회복하는 물건 말이야. 꼭 필요해?”
주희의 한마디에 준의 얼굴에는 갑자기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네, 돈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혹시 경매장에 그런 물건이 있어요?”
하지만 주희는 준의 기대를 거절하듯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은 뒤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음…너도 영혼 에너지를 회복할 수 있는 물건이 엄청 희귀한 건 알지? 우리 경매장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런 물건은 구하기 힘들어. 그런데…황도의 어떤 가문에서 정령의 꽃이라는 물건을 가지고 있거든. 그 식물의 뿌리에서 영혼 에너지를 회복할 수 있는 액체를 추출할 수 있다고 들었어.”
그녀의 말대로라면, 약로가 되돌아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준의 가슴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가문인데요?”
“으으음…”
주희는 이 대목에서 또 다시 난처한 듯 말을 잇지 못 했다. 준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퍼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설마…나씨 가문은 아니죠?”
”으음…맞아. 나씨 가문이야.”
설마 설마했던 사실을 확인하자, 준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색이 되었다.
“하아…나씨 가문이 그걸 저에게 줄 리가 없잖아요.”
확실히 대책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잠시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주희였다.
“나씨 가문의 큰 어르신이 몇 년 전에 맹독이 있는 5레벨 요수족이랑 싸우다가 중독이 됐다는 이야기가 있어 물론 큰 어르신이야 가한 제국 전체에서 소문난 강자니까…그 독성을 염력으로 누르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독소가 서서히 올라오고 있대. 결국 보름 전에 그 독소가 온 몸으로 퍼지는 통에 지금 연금술사를 찾느라 난리가 났어.”
주희의 말대로라면 연금술사를 찾는게 맞지만, 가한제국에는 단왕 고하가 있었다. 굳이 자기 같은 애송이가 필요할 리가 없었다.
“네? 나설아라면 단왕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왜요?”
“불렀지. 그런데…그 독이 각인 독이라는 거라나 뭐라나…고하도 각인 독은 어떻게 제거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했대. 이름 그대로 뼈에 독이 새겨지는 독이라서 그 어떤 연금비약으로도 치료가 힘들다고 하더라.”
약로라면 뭔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약로가 없는 준이 고하도 못하는걸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준이 할 수 있는 것은 한숨을 내쉬는 것 뿐이었다.
“고하도 못하는걸 제가 어째요.”
“아냐, 대신 독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찾았대. 노인의 몸속으로 천지의 불꽃을 넣어 고온으로 태워버리면 된다는 거야. 아까 나설아가 날 찾아온 게 이것 때문이었어. 경매장에서 천지의 불꽃을 다룰 수 있는 연금술사를 수소문해 달라고.”
주희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준은 가만히 앉아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사실 나씨 가문의 ‘큰 어르신’인 나원승은, 유씨 가문과는 상당히 사이가 좋았고, 덕분에 유씨 가문의 가세를 확장하는데에도 큰 도움이 되는 인물이었으니 그가 죽고 두 가문이 다시 멀어진다면 유씨 가문 입장에서도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론, 주희는 준이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로 이야기를 꺼낸 것 이었다.
하지만 준의 배후에 있던 ‘선생님’은 끝을 모르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실력은 연금술을 잘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고하 이상이었으니 거기에 기대를 걸어본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준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없이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으니, 그녀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으음…그런데 말이에요. 그거 엄청 위험해요. 천지의 불꽃이 들어갈 때 그 주인이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나씨 어르신은 한순간에 통구이가 된다구요. 아니, 통구이도 모자라요. 그냥 재가 될걸요? 뼈도 못 추려요.”
한참 뒤, 준의 입에서 기대하던 답변이 나오지 않자 주희의 얼굴도 흙빛이 되었다. 그러나 뒤 이어지는 준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다시 활짝 피었다.
“그래도…전 그 물건이 꼭 필요해요…후…이걸 어쩌나…”
그녀가 아는 한, 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면,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주희는 준이 분명히 그 선생님을 불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누나, 혹시 여기에 외모를 바꿀만한 도구가 있나요? 제가 나씨 가문에 들어가서 그런 위험한 일을 하는걸 그쪽 사람들이 가만두고 볼 리가 없어요.”
‘역시!’
주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단 외모를 바꿀 수단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치료는 가능하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외모를 바꿀 수 있는 도구는 드물지, 그래도 우리 경매장에 하나 있어.”
……
잠시 후, 주희의 명에 따라 시녀 하나가 나무 상자 하나를 가지고 와 탁자위에 올려두었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사람 얼굴 형상을 한 가면 하나가 들어있었다.
“이 물건은 빙산에서 사는 누에가 뱉어낸 고치실로 만든 거야, 일류 장인이 세심하게 조각해서 이 얇은 가죽 위에는 이미 특정 사람의 얼굴 형체가 만들어져있으니 이걸 얼굴에 덮어쓰기만 한다면 원래의 용모를 감출 수 있을 거야. 사실…이 물건 엄청 비싼거거든. 경매 하면 최소 30만 골드는 나오는 물건이라고. 그래도 이번 한번은 무료로 빌려줄게. 사실 우리 입장에서도 나원승 어르신이 살아계셔야 할 이유가 많거든…무슨 뜻인지 알지?”
준은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인 뒤 그는 거절 않고 고개를 들어 상자에 있던 가면을 얼굴에 붙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차가운 느낌이 얼굴을 통해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