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방어
“준아, 저 분이 설마 그때 그 신비로운 노인은 아니겠지?”
주희는 앞을 보고 걸으며 작은 목소리로 준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니야.”
“그래.”
그녀는 동해가 과거의 그 노인이 아님을 확인하고는 말없이 계속 걸음을 옮겼다.
주희를 따라 가는 동안 준은 경매장안의 호위 무사들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을 느꼈는데, 사실 그들이 가고 있는 통로는 원칙적으로 유씨 가문의 일원이 아닌 사람들은 지날 수 없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희는 현재 유씨 가문 최고의 경매장에서 감찰직을 맡고 있었으니, 그녀에게 이에 대해 지적을 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 이었다.
복도 하나를 지나 모퉁이를 돌 때쯤, 마침내 호위 무사하나가 용기를 내어 주희에게 유씨 가문의 규칙을 상기시켰지만, 주희는 문제가 된다면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일축한 뒤 다시 두 사람을 데리고 계단을 올랐다.
그러나 막 계단의 첫 번째 칸에 발을 올렸을 때 쯤…갑자기 사내 하나가 나타나 그들을 막아섰다.
“하하. 주희 씨, 여기는 우리 가문이 행정 처리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어. 명색이 감찰장인데 이 정도 규칙을 몰랐던거야?”
주희는 사내를 발견하자마자 불쾌한 기색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즉시 차가운 표정으로 쏘아붙이며 준의 손을 이끌고 계단을 올랐다.
“흥, 됐어. 무슨 일이 있다면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잖아.”
무시를 당한 청년은 창백한 얼굴로 입 꼬리를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는 그토록 냉담한 그녀가 준의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흥, 도도한척은 혼자 다 하더니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한테 빠져서 감찰장 임무도 잊어버리는 여자였군.”
자존심이 상한 사내는 준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는 주희의 뒷통수에 대고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지만, 주희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묵묵히 계단을 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어 손을 붙잡힌 준이 통증을 느낄 지경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는 있지만, 준은 주희의 손아귀에서 그녀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어이, 꼬마, 재주도 좋군!”
청년은 주희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그 옆에 있는 소년을 자극하기로 한 듯 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소년과 눈이 마주친 순간, 청년은 즉시 험악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준을 위협했다.
“뭘 봐 자식아, 불만 있어? 그런데 애인이냐 보모냐? 주희가 널 싸고 도는꼬락서니를 보니 애인보다는 보모 같아서 말이야.”
결국 사내의 계속 되는 비아냥에 발걸음을 멈추자, 주희가 준의 팔을 거세게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후…”
“큭큭, 보모가 맞나보군. 아니면 벌써부터 잡혀사시나?”
준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청년의 입버릇을 고쳐주고 싶었지만, 주희가 계속해서 그를 붙잡는 통에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안돼, 여긴 원래 외부인 출입이 금지된 곳이란 말이야. 널 데리고 오는 것까지는 감찰관의 권한으로 허용 범위내지만, 금지구역내에서 네가 소동을 벌이면 정말로 문제가 커져. 게다가 저 녀석은 유씨 가문 장로의 손자란 말이야. 여기서 네가 저 녀석과 싸우기라도 하면 경매장 이용이 어려운건 물론이고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몰라.”
준은 당장이라도 눈 앞에 있는 사내를 쳐죽이고 싶은 것을 눌러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후우…참자…참아…누나 입장도 있고, 스승님의 부활이 걸려있는 일이야. 여기서 소란을 일으키면 모든게 수포로 돌아가.’
소년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자, 주희는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며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고마워, 얼른 응접실로 가자. 여기 있어봐야 좋을 것 없어.”
……
“좋아, 일단 뭐가 필요해서 온건지부터 얘기해줘. 경매장에 놀러온 건 아닐테니까.”
응접실에 도착하자마자 주희는 준을 의자에 앉힌 뒤 차를 따르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주희의 한마디에 준은 즉시 저장반지 속에서 흰 종이 한 장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종이에는 소생의 비약을 제조하는데 필요한 약재가 빼곡이 적혀 있었다.
“여기 있는 약재들 좀 모아줄 수 있어요?
“역시, 약재를 모으러 온거였구나.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어.”
주희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망설이지 않고 준이 건넨 종이를 읽어내려갔다.
“이 약재들이 전부 희귀한 건 알고 있지? 이 중 몇 가지는 나도 한 번도 보지 못한거야. 이름 정도만 아는 물건들이네…미안하지만 이 정도 물건이면 우리 쪽에서도 다 구해주기는 어려울거야. 시장에 우연히 한 두 개 나오더라도 보통 몇 십만 골드는 하니까…”
주희의 말에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동해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녀의 다음 말에 동해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그래도…반 정도는 모을 수 있을 것 같네.”
“그 정도면 됐어요. 반이 어디에요. 어디로 가야할까요?”
“으음…내 기억대로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네 가지 약재 정도는 구할 수 있을거야. 그런데…하나당 25만 골드 정도는 생각해야 돼. 괜찮겠어?”
하나 당 25만 골드면, 네 개를 모두 구매하는데는 100만 골드가 필요하니, 지금의 준에게는 다소 무리가 있는 금액이었다. 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음…아마 안 될 것 같은데?”
“흐음…은빛성이라면 어떻게든 해줄텐데…여기서는 내가 널 돕고 싶어도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금액도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고…”
“그럼 어떻게 해야하죠?”
“음. 백만 골드면 적지 않은 돈이긴 하지만…다른 방법이 있긴 해…최근에 유씨 가문에서 연금술사를 구하고 있거든. 너만 괜찮다면 유씨 가문과 손을 잡아보는 게 어때? 연금비약을 만들어서 유씨 가문에게 공급하면 꽤 큰돈을 만질 수 있을 거야.”
주희의 제안에 준이 잠시 망설이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동해가 일어나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그가 내민 카드는 검정색 바탕에 아름다운 금색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어…?”
동해가 불쑥 내민 물건에 주희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 물건은 최소한 투왕급 이상의 투사들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이…이녀석 대체 3년 동안 뭘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투왕 수준의 투사를 데리고 다니는거야?’
“아가씨, 이걸로 모자란가?”
주희가 깜짝 놀라 멍하니 둘을 바라보고만 있자, 동해가 씨익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아, 아닙니다.”
노인의 한마디에 정신이 든 그녀는 즉시 시녀를 불러 명을 내렸다.
“이 네 가지 약재 좀 포장해서 가져다 줘요. 최대한 빨리.”
“네.”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리자, 주희가 상냥하게 웃으며 동해를 바라봤다.
“선생님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약재를 곧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동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의자에 돌아가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잠시 동안 정적이 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희의 시녀가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시녀의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약재는?”
“주희 아가씨, 유련 장로님께서 약재를 강제로 뺏어 가셨습니다. 이미 예약한 사람이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줘서는 안 된다고…”
쾅!
시녀가 곤란한 표정으로 우물쭈물거리며 입을 떼는 것과 거의 동시에, 주희가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 노인네. 창고에 여유 약재가 있는 걸 다 아는데! 누가 예약을 해?”
“왜요 누나? 무슨 일 있나요?”
뭔가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눈치 챈 준이 질문을 던지자, 주희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까 그 재수 없는 자식 할아버지야. 유씨 가문의 장로인데다가 제법 세력이 있는 사람이거든.”
바로 그 때, 동해의 손에 들린 찻잔에 새하얀 서리가 끼더니 이내 주먹만한 얼음 덩어리로 변해버렸다.
이 장면을 본 주희는 어두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앞장 서, 내가 직접 가서 얘길 해볼게.”
하지만 시녀가 막 발을 떼려는 찰나, 등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얘기? 흥! 지금 여기서 하지!“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망토를 걸친 노인 하나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청년 하나, 그리고 몇 명의 호위 무사가 걸어오고 있었다.
“유련 장로님, 이게 뭐 하자는 짓이죠? 아무리 한 가문의 장로라 해도 경매장 일에 함부로 관여할 수는 없을텐데요. 게다가 손님이 주문한 약재를 빼앗다니, 이래서야 우리 경매장의 평판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희는 노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앙칼진 목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간도 크구나 주희. 설마 네가 장로라도 됐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감히 경매장 임시 감찰관 주제에 외부인을 가문의 통제 구역에 들여? 다음 회의가 열리면 내가 이 일들에 대해 엄중히 책임을 물을 것 이야.”
유련은 말을 마치는 동시에 준과 동해를 바라보다가 소년의 가슴에 달린 2레벨 연금술사의 징표를 보고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씨 가문의 장로로 살아오면서 2레벨 연금술사 따위야 발에 치일 정도로 봐왔지만, 이렇게까지 어린 사람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제 아무리 대단한 재능을 가졌다 해도 유씨 가문의 힘에 대항하기에는 아직 너무 부족했으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옆에 있는 동해 역시 유련의 눈에는 그다지 대단치 않아보였다. 투왕 이상급의 투사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강맹한 염력이 느끼지지 않았고, 자신의 염력을 감추는 것은 투황급 투사나 가능한 것이었지만, 가한제국의 투황이라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껏해야 대투사급 노인이라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겨우 20살 남짓한 2레벨 연금술사가 투황을, 그것도 자신이 모르는 투황을 데리고 다닐 확률은 정말이지 천에 하나, 만에 하나에 불과했으니 유련은 동해가 투황급 강자일 것 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다.
“문제요? 귀빈을 모실 경우 감찰관의 권한으로 금지 구역에 들일 수 있다는 것은 장로님이 더 잘 아실텐데요?”
“귀빈? 좋아. 그럼 설명 좀 해보시지. 두 사람이 어떤 자격으로 우리 가문의 귀빈이 된 거지? 2레벨 연금술사가 언제부터 유씨 가문의 귀빈이었나?”
유련의 말에 주희는 잠시 망설이며 입을 열지 못 했다. 그녀는 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는 오히려 이씨 가문에게 폐만 될 것이 분명했고, 동해에 대해서는 투왕 이상의 강자라는 것 외에 아는 바가 없었다.
“흥, 왜 설명을 못 하지? 말해보라니까?”
하지만 장로가 또 다시 따지고 들자, 울컥한 주희는 이를 악물고 그에게 대들었다.
“흥! 제가 왜 그걸 설명해야 하죠? 언제부터 유씨 가문이 귀빈으로 모신 분들의 신원이나 정보를 꼬치꼬치 캐물었나요? 어서 저희 약재나 돌려주십시오. 진작 예약한 사람이 있고, 대금까지 치렀는데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면 저희 가문의 체면이 뭐가 됩니까!”
“하하. 그 약재는 이미 누가 예약을 했다고 하지 않았더냐? 네 말대로라면 먼저 예약한 사람에게 약재를 주는 것이 가문의 규칙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100만 골드짜리 거래가 이루어지는데 저에게 보고가 안됐다구요?”
바로 그 때, 뒤에서 주희와 유련의 언쟁을 지켜보고 있던 동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네, 내가 해결하지. 어차피 내 물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