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경매장
장장 7일의 비행 끝에 마침내 가한제국의 수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준은 안개에 둘러쌓인 채 오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웅장한 수도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며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운남종, 나설아…’
“빌어먹을…느릿느릿 거북이 기어가는 것도 아니고,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인파들 속을 뚫고 나온 동해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볼멘소리를 해댔다.
준은 불평을 늘어놓는 동해를 보며 씨익 웃음을 짓고는 이내 거대한 도시로 시선을 돌렸다. 눈 앞에 펼쳐진 도시의 장대함은 그야말로 제국의 수도에 걸맞는 그것이었다.
반면 동해는 건축물 따위에 관심이 없다는 듯 주변을 대충 쓱 둘러볼 뿐 이었다.
“운남종에는 언제 갈 예정인가?”
“보름 뒤예요.”
“아직 그렇게나 많이 남았단 말이야? 그럼 우린 어디로 가야하나?”
동해는 기다리기가 지겹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음, 먼저 황제의 수도에 있는 경매장에 가보죠, 뭐니뭐니해도 가한제국 최고의 경매장이니 원하는 물건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다음으로는 연금술사 총회도 들러봐야 하구요. 경매장에서 못 구하더라도 총회에서는 구할 수 있는 약재가 많을거예요.”
“하하, 좋아. 연금술사 총회라면 가한제국에서 흔치 않은 큰 행사인데 그냥 지나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경매장에 총회, 소생의 비약을 얻는데 필요한 약재를 얻기에는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였으니 동해 역시 불만이 있을리 없었다.
“그리고 약재가 아니더라도 그 곳에 가서 이름을 알리면 좋은 일이 많을거야. 동생에게도 좋은 일이니 꼭 가봐야지.”
동해의 조언에 준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연금술사라는 직업이 이름이 알려지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럴리가…동생도 고하의 명성 정도는 들어봤겠지?”
“단왕 고하요? 가한제국에서 고하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준의 대답에 동해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고하가 유명해진 계기가 바로 지난번 연금술사 총회라는건 모르는 모양이군…그 전까지 고하를 아는 사람은 가한제국내에 그다지 많지 않았네. 그런데 그 때 재능을 인정받아 운남종의 장로가 되었지. 사실 그 때는 4레벨 연금술사였어. 하지만 운남종의 지원으로 인해 단시일내에 6레벨 연금술사가 되면서 명성을 떨쳤네. 아마 운남종이 아니었으면 지금 수준이 되기까지 20년은 필요했을걸?”
동해의 말에 준은 놀랍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고하, 고하 이름만 들었지 그의 이력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연금술사는 확실히 희귀한 직업이지. 돈을 벌기도 쉽고. 하지만 그만큼 많은 돈이 드는 직업이기도 하네. 자네도 잘 알겠지? 타고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연금비약을 제조하는데 필요한 약초 중에는 값비싼 것들이 많아. 특히 고급 연금비약일수록 더욱 그렇지. 거기다 연금술을 연금하는 과정에서는 그야말로 약재가 끝도 없이 들어가니까. 타고난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돈을 들이는만큼 성장하는 직업이라고도 할 수 있지. 매번 발품을 팔아 귀한 약재를 구하려면 수련은 언제하고 연습은 언제하나, 안 그래?”
사실 준은 약로의 지도 덕에 빠른 시일내에 2레벨 연금술사가 된 것 일뿐, 이런 정보에 대해서는 거의 깡통이나 다름없었다. 동해의 설명을 듣던 준은 자신이 정보와 지식을 얻는 면에서도 얼마나 약로에게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실감했다. 성장에는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에 더불어 좋은 스승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스승이 제공하는 것 중 가장 가치가 높은 것은 바로 좋은 ‘정보’와 ‘지식’이었다.
“하긴…자네 같은 기술을 갖고 있다면 아쉬울게 없으니 운남종의 지원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동해의 마지막 말에 준은 씨익 웃으며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실 지금 그의 실력은 잘 쳐줘야 3레벨 연금술사 정도였으니,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동해의 태도가 어떻게 바뀔지는 눈에 보듯 선했다.
동해가 지금 새파란 애송이의 보모 노릇을 하는 것이 자신을 예뻐해서가 아니라 5레벨 연금비약 때문이라는 것은 준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휴…약재가 모였는데 스승님이 없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암울하군…’
그렇게 준이 말도 못하고 끙끙 앓고 있을 때, 동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도착했군.”
이런 저런 생각에 눈 앞을 볼 겨를조차 없었던 준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길 끝에 있는 거대한 건물을 바라봤다.
“과연 유씨 가문의 본부라고 할 만하네요. 이 정도 규모면 거의 성이나 다름없는데요?”
“하하. 유씨 가문이랑 비교할 수 있는 가문이 이 세상에 존재나 할까?“
준은 끝이 없는 동굴 마냥 끊임없이 사람을 집어삼킬듯한 기세로 열려 있는 대문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자, 들어가서 소위 제국 제1의 경매장이라고 하는 곳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지보자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찾아냈으면 좋겠군.”
경매장을 향해 가는 길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으니, 준은 울창한 숲에서 풀숲을 헤치고 나아가듯 사람들을 뚫고 걸음을 옮겨야 했다.
……
경매장에 들어서자 응접실 곳곳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경비원들이 가득했고, 그들의 가슴에는 저마다 유씨 가문의 휘장이 달려 있었다.
“가한제국의 삼대 가문중 하나라고 할만하네. 크다 커.”
소년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응접실 곳곳에는 수 많은 판매대가 놓여있었는데, 저마다 진귀한 보물들이 올려져 있었고, 대부분의 물건이 3만 골드 이상의 고가품이었다.
“이 곳은 그저 주변 판매대에 불과해. 그러니 팔리는 물건들도 싸구려지. 유씨 경매장의 본부는 4개 등급으로 나뉘어져 있어. 그 중 가장 높은 등급인 1급 경매는 1~2년에 한번 열리니 거의 구경할 일이 없지만, 1급 경매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가한 제국 곳곳에서 유력 인사들이 몰려오지. 나도 한번 구경한 적이 있는데…그 때 팔았던 물건은 6레벨 불꽃 악어의 알이었어. 듣기로는 알을 부화시켜 잘만 키우면 투황급의 마수를 얻을 수 있다더군. 2급 경매도 잘 열리지는 않아. 보통은 3급이나 4급 경매지. 4급은 항상 열리고…3급도 제법 자주 열리는 편이네.”
동해는 유씨 경매장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었고, 마치 경매장 관리인이라도 된 양 자세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3등급 이상의 경매는 상설 경매가 아니라서 입장 가격 정도는 알아두는 편이 좋네. 참고로 1급 경매는 백 만 골드가 기본이야. 그나저나, 동생 수중에 지금 얼마나 있나?”
갑작스런 질문에 준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음…30만 골드 정도 있을 겁니다.”
“그럼…참여 할 수 있는건 거의 4급 경매뿐이라고 봐도 무방하겠군.”
동해는 상당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준을 바라봤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6급 연금비약을 제조할 수 있는 연금술사의 재산이 30만 골드라니…여러모로 놀라운 일 이었다. 일반적으로 6레벨의 연금술사라면 돈에 관심이 없다해도 몇 백만 골드 정도의 현금은 즉시 꺼내놓을 수 있었고, 가지고 있는 다양한 보물들은 대부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어딘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동해는 소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뒤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곳은 유씨 경매장의 고위급 인사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일세. 소란스러운걸 보니 오늘 누군가 높은 사람이 왔나보군.”
바로 그 때, 대리석 바닥에 맑은 소리가 울려퍼지며 눈처럼 새하얀 다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어…?”
화려한 빨간 옷을 입은 여자 하나가 인파를 뚫고 로비 중앙으로 들어가는 순간, 수 많은 남성들이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그리고 준이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 하고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사이, 빨간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더니 갑자기 멍한 표정으로 준을 바라봤다.
여인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자 주위에 있던 수많은 사내들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망토를 걸친 소년을 바라봤다.
“설마…”
곧이어 그녀의 눈이 커지며 입가에 미소가 어리자, 응접실 안에 서있던 수 많은 사람들이 준에게 질투어린 시선을 보냈다.
“준아! 이준!”
주희는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준에게 다가갔다.
“와! 못 본 사이에 정말 많이 컸네!”
“누나는 여전히 예쁘군요.”
“하하! 그런 말도 할 줄 알게 됐네?”
마을을 떠난 뒤 두 형을 제외하고 처음 만난 지인이니, 준의 얼굴에도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반가운 표정도 잠시…갑자기 주희가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너 여기 온 거…그 약속 때문이지?”
주희의 질문에 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준, 3년 동안 세상을 돌아다녀보니 어때? 운남종…장난 아니지?”
“하하…그렇죠…솔직히 운남종한테 찍히는 순간 우리 이씨 가문 같은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는걸 깨달았어요.”
그 말은 얼핏 나설아와의 대결을 포기한 것처럼 들렸지만, 주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준의 표정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할 모양이구나.”
그 때, 준과 대화를 나누던 주희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응…? 그러고 보니 이 옷…너 설마 벌써 2레벨 연금술사가 된거야?”
곧이어 주희는 눈을 돌려 준의 가슴에 달린 휘장을 확인하더니 놀랍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헤헤. 그냥 운이 좋았어요.”
“뭐? 운? 무슨 소리하는거야. 제법 재능이 있다는 사람들도 1레벨에서 2레벨 연금술사가 되는데 5,6 년은 족히 걸린다고!”
준은 주희가 호들갑을 떠는 것이 영 불편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설마, 이 경매장…누나가 맡고 있는 거예요?”
“하하, 그럴리가…이 경매장 본부는 모두 유씨 가문의 늙은이들이 관리해. 나는 기껏해야 잡일이나 하는 정도야.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일로 온거야? 날 보러 오지는 않았을거고…필요한 거라도 있어?”
둘의 대화가 길어지자, 준은 점점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지난 3년간 주희는 더욱 아름다워져 있었고, 그만큼 주위의 사내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따가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가 할 얘기는 사람들 앞에서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누나…그보다 우리 다른 곳으로 좀 가서 말하면 안 될까요?”
“아, 그래. 그럼 따라 와.”
주희는 막 몸을 돌리려다 판매대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서 있는 동해를 발견하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선생님께서는 일행이시니?”
“응. 왜? 둘이서 해야 될 얘기라도 있어?”
준의 말에 동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아, 둘 사이에 비밀얘기라든지, 사랑얘기 같은 거라도 할 요량이라면 나는 다른 물건을 구경하면서 기다려도 되네. 신경 쓰지 말게.”
“하하, 어르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함께 들어가시죠.”
주희는 아무렇지 않게 동해의 농담을 받아친 뒤 몸을 돌려 응접실 구석에 있는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구두가 매끄러운 대리석 위에서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려 퍼질 때 마다 사내들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