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황도(皇都)
한편 준은 두 화염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확실히 지난 번과는 달리 염력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두 손이 터져나가지 않고 있었으니,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었다.
‘이번 파동은 확실히 지난 번보다 훨씬 약하긴 하네.’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던 동해는 준의 손에서 뻗어나오는 기운이 지난 번보다 훨씬 덜 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조금 안도하고 있었다.
‘쳇…그래도 잘못하면 지난번처럼 될게 뻔하다고…어휴…미친놈…’
동해는 그 꼴을 당하고도 또 두 개의 불꽃을 합치려는 준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죽을 고비를 넘기고 눈을 뜨자마자 그 짓을 또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된단 말인가…하지만 한편으로는 준의 용기와 패기가 대단하게 여겨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하…젊은게 좋긴 좋군…나도 조금만 젊었으면 저랬으려나…아니지, 저런 미친 짓은 젊다고 되는게 아니야…확실히 물건은 물건이군.’
콰르릉…
동해가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가 미소를 짓는 것을 반복하는 사이, 준은 바쁘게 손을 움직이며 기묘한 빛깔을 띠는 화염 덩어리의 위력을 조절하고 있었다.
잠시 후…그의 손에 모인 기이한 화염이 폭발할 듯 일렁이다가 평화를 찾아가는 순간, 준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준의 영혼에너지에 의해 안정을 찾던 화염 덩어리가 아름다운 청보라 빛을 띠며 준의 손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저 자식…정말 괴물이군…어떻게 죽다 살아난 놈이 저렇게까지 실력이 늘었을까…?”
……
준은 청보라색의 불꽃을 손 위에서 이리저리 굴리다가 사라를 바라봤다.
“사라! 조심해요!”
드디어 때가 된 것 이다. 사라는 문자 그대로 죽을 각오로 염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준이 가볍게 손가락을 튀기는 순간…
쾅!
뒷골이 울릴 정도의 폭발음이 훈련장을 가득 메우는 순간, 주위에 있던 모든 용병들은 저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가 한참 뒤에야 실눈을 뜨고 사라가 있던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들의 눈 앞에 창백한 표정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준의 모습이 들어왔다.
‘으으…확실히 전보다야 낫지만 이 정도 염력양이면 죽을 힘을 다해 쥐어짜내봤자 두 세 번이 한계야…’
준은 거미줄처럼 갈라진 바닥을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불꽃이 터진 위치에는 4~5미터 정도의 구덩이가 생겨 있었다.
“으으윽…”
그 때, 준의 화염으로 인해 생긴 구덩이에서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며 사라가 기어 올라왔다.
그의 견고한 염력 갑옷에는 여기저기 균열이 가 있었고, 구덩이에서 벗어나자마자 염력이 조각조각 부스러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준은 정말로 사라가 피하지 않고 자신의 공격을 받아낸 것을 보고 다소 당혹감을 느꼈다.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정말로 사라가 자신의 명령대로 목숨을 걸고 불꽃을 받아낼 것 이라고는 상상하지 못 했던 것 이다.
잠시 후 사라의 몸 여기저기서 화상 자국과 핏자국을 발견하자, 준은 더욱 미안함을 느꼈다.
“사라…! 미안해요! 제가 아직 힘 조절이 미숙해서…”
“하하, 괜찮습니다. 이 정도 부상은 며칠 정도 쉬면 나을겁니다.”
사라는 준이 자신에게 진심으로 미안해 하는 것을 느끼자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적어도 준이 자신을 죽이거나 괴롭히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기 때문이다.
준을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사막 용병단이 박살날 때도 그렇고, 준이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은 진작에 재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을 것 이니 이번 일은 단순히 자신이 용병단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준이 자신을 높이 사고 있다는 것이 못내 기뻤다. 강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외부인은 외부인, 사라는 이씨 가문 형제들의 신뢰가 절실했다. 세 형제의 신뢰는 자신의 목숨이나 지위와도 관련이 되어 잇지만, 그를 따라온 사막 용병단 출신의 부하들의 목숨과도 연결이 되어 있는만큼 사라에게는 부상보다 그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던 것 이다.
“사라, 미안해요. 일단 상처부터 치료하세요. 그리고 상처가 다 나으면 당신은 정말로 사막의 칼날 용병단에서 중요한 인물이 될 거예요. 사실 정말로 당신이 내 명령대로 목숨 걸고 그걸 받아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적당히 피할 줄 알았는데…어찌됐든 이 일로 이런 저런 이유로 당신을 고깝게 여기던 다른 단원들도 당신의 충성심이나 실력을 다시는 의심하지 않겠죠. 솔직히 말하자면 대단한 일도 아닌데 목숨을 걸고 제 명령을 글자 그대로 수행했으니까요. 부상에서 회복 되는대로, 당신에게 중요한 일들을 맡기도록 할게요.”
준은 그 말과 함께 사라에게 상처를 치료하는데 쓰이는 고급 연금 비약을 건넸다.
“제가 약속드리죠. 당신뿐 아니라 사막 용병단 출신의 모든 용병들은 앞으로 더 이상 불쾌한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될거예요. 특히 당신은 실력이 아주 뛰어나니까,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거구요.”
소년은 다시 한번 사라에게 신뢰를 표현한 뒤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럼, 잘 쉬세요. 내일 동해 선배님과 저는 이곳을 떠나야해요. 우선 첫 번째 임무는 저와 선배님이 떠나있는 동안 용병단을 지켜주는 것 이에요. 당신의 실력은 제 형들보다도 높으니까요.”
“떠나다니…어디로 떠나십니까?”
“수도요. 볼 일이 좀 있어서요.”
준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의 어깨를 몇 차례 두드리더니 몸을 돌려 훈련장 밖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 자식, 언제는 사람 죽일 것처럼 불덩이를 날리더니, 갑자기 저렇게 태도를 바꿔도 되는거야?”
현장에 있던 이정은 사라의 눈치를 살피다가 준을 향해 농을 던졌다.
“아니야 형, 믿어도 돼. 봤잖아. 동해 선배님도 꺼려하는 불꽃을 내 명령이라고 죽을 각오로 받아내는 거, 사라는 믿을만한 사내야. 앞으로 형들이 먼저 사라를 신경써줘. 형들이 믿고 중요한 일을 맡기고, 사라가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용병단원의 다른 사람들도 사라를 믿게 될거야. 난 내일 떠나야 하니까, 당분간은 형들이 사라와 힘을 합쳐서 용병단을 지켜나가야 해. 알잖아. 얼마 전에 소금성에서 있었던 일…뭔가 일이 벌어지면 사라가 큰 힘이 될거야. 다른 사막 용병단 단원들도 실력이 출중하니까 좋은 전력이 될거고.”
“내일 떠난다고? 이렇게 빨리?”
“응. 원래 한달 전에 갔어야 했는데 다치는 바람에 시간을 너무 끌었어. 더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아.”
준의 한마디에 이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운남종으로 가게?”
“당연한 소릴!”
“쉽지 않을 거야. 게다가 마승을 죽일 때와는 상황이 달라. 네 신분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이긴다고 해도 놈들이 널 무사히 보내줄리 없어.”
둘째 형이 자신을 계속해서 걱정하자, 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또 다시 미소를 지었다.
“됐어, 어떻게든 되겠지! 정 안되면 아까 그걸 힘조절 안하고 터뜨려버리지 뭐, 하하하!”
“정말 제정신이 아닌 놈이군…”
그리고 형제간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동해는 준의 한마디에 또 다시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 * *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대지를 까맣게 물들이고, 하늘 위에는 은색 달빛이 쏟아져 어둠을 조금 걷어내는 밤…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세 형제가 안락한 의자 위에 앉아 고개를 들고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준은 살짝 취한 형들을 바라보다가 서서히 몸을 일으켜 저장반지를 연 뒤, 오래 된 두루마리 두 개를 탁자 위로 꺼냈다.
“이건 3격 중급 무투기야. 하나는 나무, 하나는 번개 속성이라 형들에게 딱 맞을거야. 그리고 안에 3격 고급 무투기도 같이 수록되어 있어.”
동생의 말에 두 형은 취기가 오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두루마리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웬만한 집안이라면 3격 무투기 하나를 얻기 위해 거의 전재산을 털어 넣는 경우도 흔했으니, 평소 냉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정마저도 흥분한 기색을 감추기 어려웠다.
“이건…수십만 골드는 족히 넘을 것 같은데…?”
준이 내민 손으로 표면을 만져보니 편안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최소 4레벨 요수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지난번에 주려고 했던 건데 너무 급히 움직이느라 깜빡했거든.”
사실 두 개의 두루마리는 뱀 인간들의 성지로 가기 전에 약로가 준 무투기였지만, 그 뒤로 너무 일이 많아 상당히 늦게 전한 것 이었다.
형들이 자신의 선물에 연신 웃음을 짓자, 준 역시 기분이 좋았다.
“이제 할 일은 웬만큼 끝났으니 내일 마음 놓고 떠나기만 하면 되겠어.”
“그래, 이 큰 형이랑 둘째 형이 여기서 널 기다리고 있으니 가서 본 떼를 보여주고 와.”
* * *
다음날 새벽, 이준과 동해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성을 떠났다.
“이봐 동생, 우리가 바로 수도까지 날아가면 훨씬 쉬울 걸 왜 굳이 비타성까지 가서 비행 마수를 타려고 하는 거지? 우리보다 훨씬 느리잖아.”
동해는 날카롭게 뻗은 얼음 속성의 날개를 파닥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이 쉽지…스승님의 도움이 없으면 어렵다구…’
준은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진실을 속으로 삼키며 천연덕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냥 비행괴수 위에서 시간을 조금 벌면서 이화를 연구해볼까 해서 말이죠. 게다가 선배님을 위한 소생의 비약 약재도 찾아봐야 하니 조금 천천히 가는게 나을 것 같아요. 중간 중간 대도시에 들러서 경매장에 가보죠.”
자신을 위한 연금비약의 재료를 찾아야 한다는 말에 동해는 즉시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준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새벽부터 오후까지 온 종일 날아가니 드디어 비타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도시 외곽에 착륙한 뒤 걸어서 도시로 향했고, 준이 연금술사의 망토를 걸친 덕에 이번에도 별다른 검문 없이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준은 도시로 들어가자마자 동해를 이끌고 성안의 모든 약재상을 이잡듯이 뒤졌다. 동해의 목적은 단연 소생의 비약을 만들기 위한 약재를 찾는 것 이었고, 준은 동해의 약재를 찾는 척하며 약로의 영혼을 회복시킬만한 약재를 바삐 찾아다녔다.
하지만 적잖은 상점을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 하고 실망한 채 돌아가야 했다. 마지막 상점을 나온 후, 두 사람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경매장에 들렀지만, 이번에도 헛수고였다.
대로에 선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힘 없이 한숨을 내쉰 뒤 수색을 포기하고 도시 중심에 있는 비행 운송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이준의 연금술사라는 신분을 이용해 순조롭게 호화로운 비행괴수 위에 오를 수 있었고, 그렇게 며칠간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 되었다.
……
비행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사람 모두 급한 성격이 아니라 각자 침대에 누워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릴 수 있었다는 것이 정도였다.
약로와 있었을 때의 나쁜 경험이 떠올라서였는지 준은 동승한 연금술사들과 말을 섞지 않았고, 우연히 마주칠 때 고개나 까딱하는 정도로 간신히 예의를 차리는 수준의 교류가 전부였는데, 마주치는 사람들보다 준을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었다. 20살도 되어보이지 않는 2레벨 연금술사라니, 확실히 놀랍기는 놀라운 모양이었다.
놀라기는 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국의 수도로 향하는 비행편에 가한제국 출신의 연금술사보다 다른 지역 출신의 연금술사가 더 많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오가는 길에 연금술사들 사이에서 ‘연금술사 총회’라는 단어를 들은 준은, 과거 검은 바위성의 연금술사 협회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연금술사 총회라면…그 사람들 손에 희귀한 재료가 있지 않을까?’
만일 총회에 가서 약로를 깨울만한 물건을 구할 수만 있다면…운남종에 가는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
‘이거…가봐야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