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계산
이후 준은 매일 같이 약솥 앞에 앉아 대지의 불꽃을 조종하는 연습을 하다가 정신이 아득해지면 잠깐 쉬다가 다시 연습에 들어갔다.
준이 만든 치료약과 기력의 조각은 모두 사막의 칼날 용병단에서 사용되었는데, 덕분에 불과 며칠 만에 용병단에 능력 있고 통 큰 연금술사가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
그렇게 보름이 지났다. 준의 몸은 생각보다 더 빨리 회복되고 있었다.
“상처는 어때?”
이찬이 웃으며 질문을 던지자, 준이 조용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꽤 괜찮아.”
“이제 거의 다 된 것 같아, 아마 5일이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을까 싶어.”
“어휴…무식하게 튼튼하군. 내 동생이지만 징그럽다.”
형의 농담에 준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동해 선배님은?”
“네가 약재 이름을 알려준 날 이후로 약재 파는 가게란 가게는 다 찾아다니고 있으신 것 같아. 며칠 동안 코빼기도 보이질 않네.”
이정이 웃으며 동해의 행적에 대해 말해주자, 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도 빨리 힘을 회복해야 스승님을 회복시킬 물건을 찾을 수 있을텐데…운남종 일도 얼마 남지 않았고…’
* * *
다음 날 아침…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준은 손가락에 끼워진 검은 반지를 어루만지다가 자신의 허벅지 위에서 놀고 있는 칠색 이무기를 부드럽게 감싸 쥐어 침대 한켠에 올려두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괜히 일 벌이지 말고! 만일 날 보호해줄 수 있으면 더 좋고. 다른 사람들이 날 방해하지 못하게 말이야. 알겠니?”
지금의 칠색 이무기는 어느 정도 진화한 상태였기 때문에 준의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귀여운 아기뱀은 준의 말에 알았다는 듯 혀를 내밀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은 침대에서 내려와 저장반지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불꽃 씨앗 한 알이 밖으로 튀어 나왔다. 약로가 이준을 위해 준비한 마지막 물건이었다.
“이 불꽃 씨앗이 불의 정령이라 불린다던데…정말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대단한 물건인걸까…”
불꽃의 씨앗은 이준이 대지의 불꽃을 찾으면서 함께 발견한 보물로, 겉보기에는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만, 백 년에 걸쳐 만들어 진 물건이니 만큼 그 안에는 만만치 않은 에너지가 담겨있을 것이 분명했다.
준은 천천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다가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뒤 불꽃의 씨앗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씨앗이 입 안에 들어가자, 그의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오르며 머리 위로 새하얀 김이 펄펄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씨앗이 몸속에서 엄청난 열기를 내뿜으며 혈관을 타고 흘렀고, 잇달아 전신에서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꽃의 씨앗이 가진 열기가 준의 혈관을 태우기 시작하자, 준은 끔찍한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고온으로 인해 부풀어 오른 혈관이 수축되며 갑자기 푸른색 액체가 차오르고, 그 액체가 혈관을 감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푸른 액체가 자신의 혈관을 모두 덮어 보호막을 만든 뒤에도 이준은 새빨간 눈을 굴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가 너무도 방대해 쉽게 제어되지 않는 탓이었다.
……
뜨거운 에너지가 이동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준의 몸이 놀라운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준의 몸은 탐욕스러운 짐승처럼 미친 듯이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준은 자신의 몸이 거의 완벽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불꽃의 씨앗에는 아직도 방대한 에너지가 남아있었다.
‘이럴수가…정말 대단한 물건이긴 하구나…그 정도의 에너지를 썼는데도 이렇게나 많이 남아있다니…’
준이 감탄하는 와중에도 그의 몸은 끊임없이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어찌보면 이전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것이 득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전투 이후로 연금술도 늘었고, 불꽃 씨앗의 에너지 덕에 몸도 더 강해지고 있었으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스승이 사라진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잠시 후…준은 감당할 수 없는 에너지로 인해 또 다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억지로 멈추려 해도 그의 몸은 주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탐욕스러운 기세로 에너지를 계속해서 빨아들일 뿐 이었다.
소년은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든든한 스승도 곁에 없어 오로지 자신의 지혜만으로 이 상황에 대처해야 했으니 더욱 겁이 났다.
‘에너지를 억제할 수 없다면 밖으로 빼내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밖으로 빼내면 어디로 분출하지? 이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는 물건도 없을 텐데…’
그리고 통증이 정점에 달할 때 쯤, 준의 눈에 칠색 이무기가 들어왔다.
‘네가 도움을 줘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침대로 다가가 이무기를 손등에 올리자, 준의 몸에서 나오는 불 속성의 열기에 이무기가 괴로워 하는 표정을 지었다.
“착하지, 괜찮아, 해치지 않을게.”
준은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무기의 입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 넣었다.
그 순간 이무기의 몸부림이 멈추고, 강렬한 빛과 함께 준의 몸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쏟아져 나와 이무기에게로 넘어갔다.
……
잠시 후, 이무기의 몸이 무럭무럭 자라나며 부드럽게 변화하더니 이내 어떤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무기가 변화해 만들어 진 ‘그것’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준은 온 몸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메…메두사…여왕…?”
* * *
어느 새 칠색 이무기는 귀여운 아기 뱀이 아니라 요염한 여인으로 변해 있었고, 자신의 손가락을 물고 있는 메두사 여왕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준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약로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메두사 여왕의 출현이라니,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아악!”
그리고 준이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메두사가 갑자기 준의 손가락을 세게 깨물었다.
준은 그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손가락을 잘라내지 않는 이상 벗어날 방도가 없어보였고, 그러는 사이에도 그의 손가락을 통해 푸른 에너지가 계속해서 새어 나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불꽃의 씨앗을 통해 간신히 흡수한 에너지까지 고스란힌 빼앗길 판이었다.
“빨리 이거 놔!”
그러나 준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대도 메두사는 미동조차 없이 그의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결국 다급해진 준이 왼손을 들어 푸른 화염을 꺼내들자, 갑자기 방안이 뜨끈하게 달아 올랐다.
“빨리 놔! 네 힘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걸 알아. 이 불꽃이 뭔지 알지? 당장 놓지 않으면 다시 타 들어가는 고통을 느끼게 해주겠어.”
결국 메두사가 입에서 손가락을 뺐다. 그녀의 몸은 아직 대지의 불꽃이 선사해준 끔찍한 고통을 기억하는 것이 분명했다.
준은 황급히 그녀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낸 뒤 피가 철철 흐르는 자신의 손을 움켜잡았다.
“건방진 것. 감히 나를 협박하다니.”
“독한 것. 피가 날 정도로 물다니.”
준이 악에 받쳐 자신의 말을 받아치자, 메두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아까 그 에너지, 대지의 불꽃 밑에 있던 연화대에서 나온 불꽃의 씨앗이지?”
하지만 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하게 네가 그걸 손에 넣었을 줄이야. 단왕 고하란 놈이 그걸 알게 된다면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군. 참 음흉한 꼬맹이구나. 내가 불타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불꽃만 훔쳐 달아날 생각을 하다니…대담함만큼은 칭찬해주지.”
“하하…”
메두사의 칭찬 비슷한 말에 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무시무시한 뱀 여왕의 칭찬이라니, 참으로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알 수 없는 일 이었다.
“게다가 이후에는 내 본체를 애완동물처럼 기르기까지 했지? 이건 대담하다기보다…거의 미친 놈이군.”
그러나 메두사의 말투에서 다시 살기가 느껴지자, 준은 바짝 긴장하고 임전 태세에 들어갔다.
“흥…어찌됐든…아쉽지만 네 말대로 지금의 나는 아직 힘이 많이 부족하지. 허나, 다음에 깨어났을 때는 반드시 네 목숨을 끊어주마.”
메두사의 말에는 한마디 한마디에 살기가 어려 있었다.
“그리고…아무리 내가 작은 뱀이 되었다고 해도 함부로 내 주인이라 칭하지 말거라. 이 세상에는 아직 내가 주인으로 삼을만한 자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의 너는 그럴 자격이 없다. 함부로 ‘주인’이라는 말을 쓰지 말거라.”
그 말을 끝으로 메두사의 몸에서는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고, 준의 눈앞에 놓인 것은 평상시의 그 작은 아기 뱀이었다.
보석처럼 빛나는 작은 뱀이 나타나자 긴장이 풀린 준은 온 몸에 힘이 빠져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온 몸이 땀범벅이 된 채로 한숨을 내쉬는데 아직도 그의 가슴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죽음의 문턱을 몇 번이나 넘나든 기분이었다.
바로 그 때 , 준은 푸른빛을 띠는 채찍 같은 것이 자신의 몸 주위에 돌아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채찍은 메두사의 공격을 피하면서 무심결에 만들어낸 것이었다.
준은 잠시 멍하니 그 채찍을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지난 20일간의 훈련을 통해 대지의 불꽃을 다루는데 적잖이 자신감이 붙었지만, 아직 그의 천지의 불꽃은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것 보다는 훨씬 느리고 정교하지 못 했다.
‘이걸 쓸 수 있을까…?’
소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을 내밀어 불꽃 채찍을 움켜쥐었다. 다행히 뜨겁지는 않았다.
곧이어 손을 움직이며 채찍을 휘둘러보자, 갑자기 열 가닥의 불꽃이 생겨났고, 손바닥 안에 있던 대지의 불꽃이 일렁이며 커졌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더욱 놀라운 것은 갑자기 대지의 불꽃이 온순한 양처럼 자신의 말을 잘 듣게 되었다는 점 이었다.
“뭐지…?불꽃 씨앗 때문인가?”
불꽃의 씨앗과 대지의 불꽃은 본래 하나였으니 불꽃의 씨앗에 담긴 에너지로 인해 대지의 불꽃과 자신의 염력이 더 잘 융합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결국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찌됐든 지금의 그에게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은 성과였다. 이유야 어찌됐든 본래 천지의 불꽃을 자유자재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불을 길들여야 하는데, 그 수고가 줄어든 것 이다. 그리고 불을 잘 다룰 수 있게 되면 전투력 역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스승님은 이걸 생각해서 나에게 불꽃의 씨앗을 챙기라고 하신 걸까…?’
준은 멍한 표정으로 열 손가락에 붙어있는 불꽃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집중해 불꽃을 조종해 보았다.
그러자 푸른 불꽃이 즉시 날카로운 가시로 변화했고,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갈랐다.
“오오오!”
소년은 신이 나서 허공에 있는 불꽃 가시를 조종했다. 이런 신기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불꽃의 형태가 변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다니, 그가 몇 년은 수련해야 이룰 수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수준의 능력을 불과 몇 분만에 갑자기 얻게 된 것이다.
“하하하하!”
준은 상처 하나 없는 자신의 손바닥을 보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적을 향해 날린 불꽃이 빗나간다해도 다시 조종해 적을 공격할 수 있다는 점과, 정 여의치 않으면 그 불꽃을 다시 회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